테아이테토스 - 지식에 관하여 푸른시원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상의 대화만이 아니라, 언론의 인터뷰에서도 상대방의 질문이나 의견에 '추임새'처럼 하는 말이 있다. "맞아요!"다. '네.'라고 하거나, "그래요"나 "네, 그렇습니다."하면 될 것을 습관적으로 "맞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려니 하지만 좀 생각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맞아요'는, 상대방에 의견(주장)에 동참하는 나의 '의견(판단"을 포함한다. 'A는 B이다.'는 상대방의 진술이 참이라면 '맞아요.'는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A는 B이다.'가 아닌 경우에도 습관적으로, '예우'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다. '맞아요'라고. SNS나 각종 기사 등 콘텐츠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좋아요'는 그나마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맞아요'는 '좋아요'와 사뭇 다르다. 발언자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 포함하고 있음에도 그런 줄 모르고 말하는 것이다.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견에 '맞아요!'라고 대응하는 사람이 싫지 않다. 또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맞아요'는 나는 당신의 '하나뿐인 내 편'임을 인증하는 일이기도 한다. '맞아요!'에는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에 대한 반응이기보다는 나는 그렇게 진술하는 당신을 항상 '믿어요'라는 진단이 전제되어 있다. 나는 당신을 항상 믿는다. 때문에, 이번 진술도 '맞을 것'이라는 '신뢰' 또는 동지적인 '믿음'의 반영이며, 'A가 실제로 B가 아닌' 경우에도 '그렇군요.'하고는 나름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맹목적으로 그런 줄도 모르고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의 틀린 진술을 교정할 기회 자체를 앗아버리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과 정말 그렇다고 믿는 것의 차이는 크다.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되는지, 사유의 발생학이랄까,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는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함으로써,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를 꼬치꼬치 그리고 천천히 복기(바둑에서)하고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서구 철학을 이끈 사람은 플라톤이다. 세계를 인식하고 반응하는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자가 '신들'에서 '인간들'로 이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널리 알리는데 힘을 쏟은 철학자, 그가 플라톤인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직접 펼치지 않는다. 일련의 대화편들을 통해 문제를 툭 던지는 것이다. 연못에 던진 돌이 동심원을 일르키게 하듯이다. '대화편들'은 나라의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은 순간에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유력한 정치가가 하는 정치연설처럼 하고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하면 여느 비극과 다르지 않는 하나의 '문학 작품'일 뿐이다.

공연을 통해 당대의 시민들이 처한 상황과,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정치행위(여론몰이)를 한 장르는 희극(아리스토파네스로 대표되는)이었다. 반면, 비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의 인간됨의 정체성을 캐묻는 데 집중했다. 오늘날 철학 영역에서 플라톤이 '대화편'작품)을 통해서 하고자 한 일을 비극 작가 중에서는 소포클레스가 했다. 그가 작시술을 배웠던 선배 아이스퀼로스가 전적으로 신의 영역에서 신들의 세계에 의지했다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이성에 입각하여 세계를 보려 했고, 그런 작품 세계를 펼쳐 놓았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이 비록 7편뿐이지만, 소포클레스가 완성한 비극의 세계에 대해 가장 정확히 '수석 대변인'  역할을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시학>)가 있어, 그의 작품 세계의 의미는 입증되고 있다. 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학문의 시원(始原: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비롯되는 처음)이 아리스토텔레스인 것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비해, 3대 비극시인 가운데, 제3시인 에우리피데스에 대해, '비극의 창시자'(아이스퀼로스)나 '비극의 완성자'(소포클레스)처럼 딱 떨어지는 규정(닉네임)이 힘든 점이 있다. 서양철학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3대 비극작가 중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자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 것. 시대정신을 자신이 익숙한 장르에 담아낸다는 것, 이렇게 볼 때 플라톤과 소포클레스가 한 일은 장르가 다를 뿐 큰 차이는 없다. 저마다의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플라톤의 '작품'은 정치연설이 아닌 것이다. 

5.18광주항쟁의 의미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여 하는 말이지만. 1980년대를 대표하는 몇몇 시인들이 참여하여 동인을 형성했다. <5월시>다. 일종의 협동조합을 결성한 이들의 목표는 1980년 5.18의 진실을 시를 통해서 온 나라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시가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그런 '서정시인'들도 상당수 속해 있었다. '맞아요!'라고 동의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데.. 작품'은 대상화되는 것이라서 작품의 생산자로서의 한계를 인지한 움직임, 그런 '한계'를 안고서 나름의 움직임을, 노고를 집중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일어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시인들이 시로 나섰다. <시학>에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또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시를 쓴다 해도 그는 시인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에도 개연성과 기능성의 법칙에 맞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 점에서 그는 이들 사건의 창작자[역사상 많은 사건 중에는 시인-여기서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가도 포함된다-이 그 전후 관계의 인과 관계를 밝힘으로써 스토리를 '창작'하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옮긴이 주석]이기 때문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창작자에 의해 그 사건이 재구성됨으로써(전후 관계의 인과 관계를) 비로소 '보인다'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 사건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플롯'이 좋은 작품의 필수요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한다. 가령, <그것이 알고 싶다>(sbs)는 그런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제 문필가 플라톤의 작품 <테아이테토스> 이야기를 하자. <테아이테토스> 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지금 멜레토스가 제출한 고발장에 답변하기 위해 왕의 주랑으로 가야 하네. 하지만 테오도로스 님, 우리 내일 아침 이곳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멜레토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1) '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2)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아테나이인 중 1인다. 왕의 주랑이란 아테나이 아고라에 있던 주랑.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하는데, 대화편 <소피스트>의 대화가 바로 다음 날 진행된다. 기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를 위해 소크라테스가 잠시 법정에 간 날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소피스트>이후에 <정치가>의 대화가 이어진다. <변론>을 해야 하는 본 무대(법정)에 나서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무려 세 편의 대화마당을 가진 것이다. 

-<정치가/소피스트>[플라톤(지은이), 천병희(옮긴이)|도서출판 숲 | 2014년 7월]의 대화 시점은 '소피스트'가 먼저이고 '정치가'가 다음이다. 이들 대화편 이전에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지의 지"를 역설한 <테아이테토스> 대화가 이뤄졌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있고, 대화순으로 보면 <크리톤>과 <파이돈>이 이어진다. 플라톤은 참 뒤끝이 '상당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변론'을 중심에 놓고, 평생에 걸쳐 스승을 변호하고 있다. 그렇고 그런 것으로 받아들리자면 그렇다. 좀 그렇지 않은가!

-<정치가>는 소송을 당한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앞서 아테네법정에 출두한 다음날, 나눈 대화이며 이날에 앞서 나눈 대화들이 <소피스트>에 수록되어 있다. 그 하루 전에 나눈 대화가 <테아이테토스>(지식에 관하여)로, 소크라테스가 인생을 마감하게 결정적인 재판을 코앞에 두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이런 대화를 나눴단다. 그런 대화편 3부작이다.

-(숲의)<정치가/소피스트>의 수록 순과는 달리 사실은 <소피스트>가 <정치가>보다 먼저 진행된 대화다.  특히 앞부분, 소피스트란 어떤 존재인가 찾아가는 짧은 문답들이 흥미롭다. 두 대화편은 궁극적으로 철학자의 고유한 영역을 찾는 과정이다. 진정한 철학자를 찾아내기 위해 주의해야 할 '유사품' 소피스트(<소피스테스>)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으며, 사이비 정치가와 거리를 두고자(<정치가>) 한다.

-<정치가>에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전 대화편의 소크라테스 자리(역할)에는 낯선 '방문객'이 앉아 있다. 말하자면 외부초빙강사인데,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요즘말로 'X맨'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대화편에 스승을 등장시켜 자기 이야기를 하던 플라톤이 집필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를수록 자기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그 과도기에 방문객(X맨)이 주대담자이자 이론을 주창하는 이로 나서는 것이다.

어쨌든 <테아이테토스>는 '변론'을 보완하는 대화편으로 '무지의 지'의 근거를 제시한다. 초점은 '변론'에 맞춰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실제 그렇게 발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으로 만드는, 설정 그것이 <테아이테토스>다.

 

"소크라테스: 자네가 처음에 그랬듯이, 대답하기를 망설이기보다는 이렇게 열성적으로 말해야 하네. 테아이테토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찾게 되든가, 아니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든가 둘 중 한 가지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일세. 사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 보담이라고 할 수 있지."(187c) 

 

"소크라테스: 테아이테토스, 자네가 앞으로 다른 생각들을 임신하려다가 임신에 성공하면 지금의 이 탐구 덕분에 더 훌륭한 생각들을 임신하게 될 걸세. 설령 임신하지 못하더라도 자네는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덜 부담스럽고 더 유순한 사람이 될 걸세. 자네는 지혜롭게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 기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이고, 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210c)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든가', '자네는 지혜롭게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변론'을 보완하는 결정적인 말씀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변론'에 앞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자 한다. "그렇군요."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 모르는 것이 무엇이든 있다는 것을 안다. 무지의 지. <테아이테토스>는 안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변론>의 부록이다. '그래요'보다는 '맞아요!'에 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