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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을 보라 - 비통한 시대에 살아남은 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수업
엘리 위젤.아리엘 버거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평점 :
엘리 위젤의 조교였던 아리엘 버거의 '나의 기억을 보라'를 읽을 때 마치 잔디밭에서 아주 우연히 네잎클로버를 발견한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내용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에게 큰 울림과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엘리 위젤은 1986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다룬 자전적 소설 '밤'(Night)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아리엘 버거는 이 책에서 우리가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소설가로서의 엘리 위젤이 아닌 대학교수로서의 엘리 위젤을 묘사한다. 이는 사실 대부분의 한국 독자에게는 매우 생소한 엘리 위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생소한 엘리 위젤의 모습 속에서 묘한 감동이 전해진다.
'나의 기억을 보라'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이 책이 내가 지난주에 읽은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읍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엘리 위젤과 하이젠베르크는 분야는 다르지만 모두 노벨상을 수상한 위인이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정통 독일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조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엘리 위젤은 나치의 반유대 정책으로 인해 가족들과 함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 가족들이 거기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즉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의 부역자로 나치를 경험했고, 엘리 위젤은 나치의 희생자로 나치를 경험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하이젠베르크와 엘리 위젤이 나치에 대한 경험은 많이 다르지만, 하이젠베르크와 엘리 위젤 모두 나치의 대실패 이후 종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는 점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의 실패 원인을 종교에서 멀어진 것에서 찾았고, 엘리 위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많은 지식인들이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허무주의에 빠진 것과는 조금 다른 흐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이후에도 하이젠베르크는 개신교 신앙을 이어갔고, 엘리 위젤은 유대교 신앙을 이어갔다. 전쟁의 참혹함이 그들로 하여금 절대자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했던 것이다.
아리엘 버거는 보스턴 대학교에서 엘리 위젤의 조교로서 약 20년가량 엘리 위젤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나의 기억을 보라'에서 아리엘 버거는 자전적 내용과 엘리 위젤의 강의를 교차 편집했다. 그래서 이 책은 아리엘 버거의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엘리 위젤의 강의록이라 할 수 있다. 아리엘 버거는 엘리 위젤과 같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엘리 위젤의 학생이 되었다. 따라서 아리엘 버거가 엘리 위젤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타 다른 학생이 엘리 위젤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많이 다르다. 아리엘 버거는 엘리 위젤을 유대교의 위대한 영적 스승으로 바라보며, 그와의 친밀한 인격적 교감을 통해 깊은 영성을 형성한다.
"경건파에서 유대교의 스승이나 교사를 일컫는 '레비'(rebbe)는 좀 더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레비는 교사, 성자, 정신적 지도자처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레비는 전통을 고수하지만 독창적인 모습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보통 유대교 학교에서 만나는 랍비는 주로 지식을 전달하며, 학생들이 유대교의 전통적이 ㄴ생활과 의식에 익숙해져 잘 따르도록 돕는 일을 한다. 그렇지만 레비는 랍비와 약간 다르게 좀 더 권위를 가지면서 각 학생의 영적 여정을 안내하는 친구이자 후원자 역할을 맡는다. 랍비가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규범을 강조한다면, 레비는 겉으로 드러나는 조직보다 정신적 측면에 집중하고 각자의 개성을 더 존중한다." (78쪽)
왜 아리엘 버거는 이 책에서 유대교의 랍비와 레비에 대해서 언급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아리엘 버거가 유대교 학교에서 랍비들은 만났지만, 엘리 위젤과 같은 레비는 처음 만났기 때문인 것 같다. 엘리 위젤은 아리엘 버거의 레비로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의 가장 좋은 스승으로서 그의 가는 길을 안내했다. 따라서 아리엘 버거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도 분명하다. 그것은 자신의 레비인 엘리 위젤을 사람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엘리 위젤의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어찌 보면 저자의 목적은 나에게 그대로 적중했다. 왜냐하면 나도 엘리 위젤을 나의 영적 레비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 책을 다 읽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나누어졌고, 전체 400쪽 정도 되는 두툼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워낙 깊고 넓기에 평소에 종교와 문학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읽기 어려운 책일 수 있다. 그러나 평소에 인문학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에 흥미를 가질 요소들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엘리 위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거나, 엘리 위젤의 인생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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