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읽기

1
내가 사랑하는 시인 헤르베르트는 책 읽기의 무용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누군가 그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그 책들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그 책들을 읽은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랬다. 늘 무언가를 읽고 있었으니 읽은 만큼 삶이 바뀌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현명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헤르베르트처럼 읽은 책들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느 날은 책장에서 언젠가 꼭 읽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책을 문득 꺼내 펼쳐보고는 내가 좋아하는 펜으로 내가 좋아할 법한 문장에 밑줄이 쳐진 걸 보고 놀랄 때도 있다. 이 책을 언제 읽었더라?

2
"세계는 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계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은 독일 시인 슈나이더의 이 문장으로 저자 서문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 빨간 수첩과 내 머릿속은 이렇게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한 타인의 문장들로 가득하다. 가끔은 내가 이름 없는 낡은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 속 인물같이 느껴진다. 출처를 쉽게 잊는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들이 어디서 왔는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나 학술 작업을 할 때를 빼고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조각의 출처를 기억하는 놀라운 편집증의 소유자는 드물다. 보르헤스 소설의 주인공, 기억의 천재 푸네스 정도?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죽고만 싶었던 숱한 순간에 나를 살린 누군가의 문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삶을 연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던 헤르베르트를 봐도 그렇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한 뼘이라도 더 훌륭해지는 건 아니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쉼 없이 읽었다. 그리스·로마 고전, 과학적 사회주의, 우주비행, 벌의 삶에 관한 책들, 키츠 같은 시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플라톤, 데카르트, 스피노자, 니체 같은 철학자들의 책, 우파니샤드 같은 종교서 등등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의 고백처럼 책 속에서 연명했던 것이다.

3
프루스트는 위고를 열심히 읽었다. 그는 『되찾은 시간에서 "풀은 자라야 하고 아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위고의 말을 인용한 뒤 덧붙인다. 예술의 잔인한 법칙은 존재들이 죽어야 하고 우리 자신도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고 죽어야하는 것이라고. 진실하지만 서늘한 말이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여기서 다룬 저자들은 다 그렇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소송이거나 400년 내내 분투한 뒤에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소망,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윗돌, 보상 없이 행하는 사랑, 끝없이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 숲 같은 것이다. 또는 내 속에 울음이 사는 시간, 경멸을 통해서 극복되는 운명의시간, 사회가 찍어내는 자동인형 같은 삶에 맞서는 시간이다.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 P7

실비아 플라스도 똑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도로 인부들, 선원과 군인들, 술집의 단골손님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 목마른 갈망―이름 없이, 귀 기울여 들으며, 기록하며, 난장판의 일원이 되고 싶은 갈망이―이 모든 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가져버리고 만다. 공격당하고 포격당할 위험이 상존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온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관심은 그들을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은밀한 관계로 유인하는 도발로 곡해되는 일이 흔하다. 아, 제기랄, 그렇다. 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야외에서 잠을 자고, 서부로 여행을 하고, 밤에 마음껏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 - P30

한나 아렌트의 구분법대로라면, 타자를 전제하는 활동인 대화는 ‘행위action‘에 속한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인 작업과 달리, 행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그런데 행위에는 불안이 따른다. 나와 다른 욕구와 관심을 가진 타인들이 내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아서 행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안이란 대부분 이런 것이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통제 과정에 속해서 불안을 제거하려는 욕구가 생겨난다.
‘행위‘하는 대신 ‘기능‘하려는 욕구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요아힘 페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기능하기 functioning‘는 행위하기를 멈추는 것임을 강조한다.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된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부모든, CEO든, 총통이든) 한 명이면 족하고 나머지는 그 계획에 따라 기능하면서 예상한 결과를 얻으면 된다. 대화는 불필요하다. 매뉴얼을 숙지하고 실행하라. 만일 최고 결정권자가 머릿속에서 지옥을 그리면 지옥의 질서가 그대로 실현된다. 이것이 기능적 안전성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안전하게 지옥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게서 안전성에의 터무니없이 멍청한 열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능하기는 복종의 쾌감을 주는 변태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행위하기가 기능하기로 대체될 때 대화와 설득의 공간인 공적영역은 사라진다. 상명하복의 원칙을 신봉하고, 공무원과 국민은 자기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만하면 된다고 여기는 최고 결정권자가 있다고 하자. 자신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이라 확신할 테지만, 아렌트는 망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그의 마음이 설령 진심일지라도 정치는 실종되고 만다. 그가 유일한 진리의 담지자를 자처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소통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대화하고 행위할 가능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 P43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외쳤던 연인에게 바치는 소설이라면 소설의 주인공에게 모든 행복과 사랑을 다 줄 법도 한데 작가는 그러지 않았다. 올랜도의 완벽함은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필연적 어긋남과 빈 구멍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처럼 활용된다. 심지어 그토록 아름답고 총명해서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올랜도이건만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러시아 공주 사샤에게는 버림받는다. 사샤가 더 멋진 사람을 사랑해서 올랜도를 배신한 것도 아니다. 사샤는 올랜도와의 야반도주 약속을 저버리고 러시아로 떠나는 쪽을 택했다. 버지니아는 우리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 안에 사랑받지 못할 어떤 결핍, 열등함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저 너의 사샤는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갔을 뿐이야.
400년이 흐르도록 올랜도는 사샤를 떠올리고, 여성의 육체에 더 끌리고 여성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늘 사랑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올랜도 역시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여러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소중하지만 자신이 짜 넣을 인생의 무늬들이 모두 관계로만 환원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랜도는 고독을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전기작가는 그가 굼뜬 것이 그가 종종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랍상자 따위에 걸려 넘어지는 올랜도는 당연히 고독한 장소나 광활한 전망들을 좋아했고, 자기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혼자라고 느끼기를 좋아했다." - P33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해."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 P61

그는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연명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떠올리면 벽 위의 그림자처럼 느껴질만큼 학교, 군대, 사무실, 집, 저녁 파티, 이 모든 곳에서 그는언제나 창백하고 흐릿한 존재였다. 이 지독하게 평범한 삶에 대해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어떻게 아내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힘은 긴장하고 있었노라고 어리석은 짓 하지 않고 꼬임에 속지 않고 더 강한 자와는 어울리지 않기 위해서

그는 평범함을 유지하려고 애써왔다. 평범함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우리가 그 상태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한순간도 교활하거나 타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순간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그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그가 왜 내가 항상 피로와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도대체 나는 언제쯤 쉴 권리를 가지게 되는 거냐고 질문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도 그 답이 가장 궁금하기 때문이다. - P96

"고통이나 비참함 앞에서 달아나지 마라. 덧없는 이익들, 특권들, 일시적인 명예들 때문에 네 자신 안에서 네가 그리도 잘 느끼고 있는 것의 가장 작은 조각까지도 양보하지마라." 이렇게 말했던 루오는 노년에 발표한 판화집 『미제레레』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미제레레 miserere‘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는 라틴어 성경 구절에서 온 제목이다. - P107

시인은 오래전의 시 「6월」에서 썼다. "어딘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아름다운 힘은 없을까/ 동시대를 함께 산다는 친근함 즐거움 그리고 분노가/ 예리한 힘이 되어 모습을 드러낼". - P110

시인들은 목록의 단순한 양식이 주는 기쁨을 잘 알고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즐거움」을 보라.

아침에 처음으로 창밖 내다보기
다시 찾아낸 오래된 책
감격에 겨운 얼굴들
눈, 계절의 바뀜
신문

변증법
샤워, 헤엄치기
옛 음악
편안한 신발
이해하기
새로운 음악
글쓰기, 어린 식물 심기
여행하기
노래하기
친절하기 - P112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은엉겅퀴, 라이너 쿤체

……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위해 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물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 P126

히피는 타락한 마약쟁이 집단에 불과하다고 폭로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약에 절어 몽롱한 상태로도 서로를 돌보고 채식주의와 명상을 고집하고 체포, 집단강간, 성병, 임신, 폭행, 굶주림을 피하는 법을 알리는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조앤은 거기서 "안쓰러우리만큼 아무 대책도 없는 한 줌의 아이들이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 애쓰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확신한다.
……
이 예리한 글들을 읽다 보면, 공정, 불공정, 진보, 보수와 같이 우리 사회를 떠도는 말에 대해 우리가 너무 막연한 수준의 지지와 반대만을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단순한 결론을 향해 가는 언어 말고 제대로 듣고 충분히 관찰한 뒤에 생겨나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언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되자는 간곡한 요청을 그녀에게서 듣게 된다. - P135

카뮈에 따르면, 비극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자각하고 응수해야 할 운명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싸우든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어렵다. 조금 전진한 기분이었는데 도로 제자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P141

베유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은 보잘것없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싶어도 세계의 난폭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유는 부재하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에 대한 경애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뭐든지 하기"는 인간을 운명의 중력에서 뜯어내어 영원 속으로 들어 올리는 사랑이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승리에 대한 상상 없이, 미래의 보상을 구하지 않고 전투에서 목숨을 거는 병사와 같다.
……
인류에게 공통적 처참함을 만들어내는 몰개성적인 힘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몰개성적인 사랑뿐이라는 뜻이다. 「신을 기다리며』에 실린 한 에세이에서 베유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줄 사람들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즉 "당신의 고통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는 일일 뿐이다. 우리는 그 물음을 통해 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 끔찍한 불행과 만나 천형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거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불행한 사람을 집합체의 단위로서나 ‘불행한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회 계급의 하나로 보지 않고 말이다." 자신도 언제든 불행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수난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한 이를 비난하거나 사물처럼 무시하게 된다. 현실에서 수난은 평범한 이들 모두에게 닥친다는 정확한 인식만이 약자에 대한 경멸을 막을 수 있다." - P148

"아! 매일 아침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이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져 우리들 자신의 손에서 탄생되어 나올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위대한 삶이 되랴!" 닦고 치우는 일을 통해서, 나아가 일상을 이루는 크고 작은 일들을 직접해봄으로써 삶을 갱신하는 것은 예술적인 작업이다.
……
바슐라르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한결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사물들에 스스로를 주고 스스로에게 사물들을 줌으로써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살림살이의 영역이든 또 다른 노동의 영역이든 우리가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느낌 속에서 일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눈길이란 무엇인가. 몽상가의 새로운 눈길은 사물에 대한 깊은 몽상을 통해서 그가 새로운 이미지를 살(체험)게 되었을 때 생겨난다. - P162

그래서 푼크툼은 꼭 별난 순간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다만 거기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난 데라고는 전혀 없는 사진들 속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특별할 것도 없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찍고 그것을 계속 바라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타임라인을 흐르는 그토록 많은 구름과 노을 사진들. 그것은 우리가 금세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있었다는 다정한 증언이자 그들이 가버린 뒤에도 계속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조금은 쓸쓸한 약속이다.
사진 속의 연인, 친구, 강아지와 고양이들. 우리는 떠난 이들을 쉽게 보내지 못하고 그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을 담아서 ‘밝은 방‘에 자꾸 쌓아두려고 한다. 네가 거기 있었지. 나는 너를 보았지. 이제 안녕, 안녕....... 언제나 사진은 작별 인사인 동시에 지금 곁에 없는 너와 만나는 재회의 인사다. - P184

‘백인식 소유자white man keeper‘는 "재산을 돌고 도는 선물의 순환 고리에서 빼내 창고나 박물관에 두는 사람이다. 선물은 정확히 이러한 백인 소유자의 본성에 반대한다. 우리가 받은 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나눠 주는 것이 선물의 원리이다. 그런데 인디언식 선물은 서로 주고받는 게 아니다. 대체로 받은 것은 제삼자에게 건네지고 그에 의해 또 다음 사람에게 건네진다. 이처럼 선물이 대가 없이 건네질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는 느낌과 생기가 생겨난다. 수건돌리기가 놀이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듯 선물 - P193

은 계속 돌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결속감을 부여하고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하이드는 예술 작품도 선물처럼 움직인다고 말한다. 시를 한 줄도 읽어본 적 없는 시인, 소설을 한 편도 읽은 적 없는 소설가가 있을까? 좋은 작가들은 언제나 좋은 독자였다. 그들은 다른 예술가의 작품에서 자극받은 생기를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 다른 독자에게 선물하는 독자다. 선물을 받은 인디언이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선물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동하듯 예술가는 받은 선물을 증식시켜서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작품에 헌신한다. 우리가 종종 재능이라고 부르는 선물의 출처가 꼭 선배 예술가들인 것만은 아니다. 노발리스에게는 열일곱 살에 요절한 약혼녀가, 네루다에게는 민중이 영감의 원천이었다. 재능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든 좋은 시와 그림, 음악과 영화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늘 느낌이 생겨나고 정서적 유대 속에서 서로 접촉하는 공동체가 마술처럼 생겨난다. 아, 우리는 이 시, 이 소설, 이 음악을 사랑해. 우리는 함께하며 고통을 통과할 수 있어. - P194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에너지의 방향을 조금 바꿔서, 매일매일 움직이면 될 뿐. 우리의 사랑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듯 구원도 혁명도 그럴 것이다. - P20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대낮에는 별들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들을 대낮처럼 환한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별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제 안에서 춤추는 별을 찾게 된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라. 심지어 행복을 원하는 마음까지도. 니체는 춤추는 별을 언급한 다음, 행복을 찾아다니는 것은 비천한 인간의 일이라고 덧붙인다. 행복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우리가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당한다고 말한다. 행복이 지배의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은 이제 우리가 따라야 할 절대적으로 올바른 길로 간주된다. 이를 확인해주는 기본 지표들도 있는데, 결혼이나 안정된 가족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 ‘얘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너의 행복뿐이다. 그러니 네가 뭘 하고 싶든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해라. 때 맞춰 결혼하고 행복한 주부, 행복한 가장이 되어라. 빨리 안정을 이루어라........‘
그러나 세상의 아이들아,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는 삶은 불행할 거라는 협박에 굴하지 말고, 혼돈을 기꺼이 맛보며 천천히 네 자신이 되어라. 남이나 스스로에게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점점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우리를 향한 그의 다정한 전언이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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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에세이&
김현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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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동사,라고 어느글에 쓴 적 있고. 덧붙이자면 일렁이다는 여름 동사의 일종. 겨울의 동사는 속삭이다. 봄의 동사는 어른거리다. 가을의 동사는 흘러가다. 어른거리고 일렁이고 흘러가 속삭이는 마음의 사계절. 동사를 활용해 마음의 사계절을 그려보세요. 그것이 바로 당신을 설명하는 일. - P26

고요히 한 생각 머물면
앞 강물도 지워지고
앞산 숲도 지워진다

너는 말없이 말하고
나는 들리지 않게 듣는다

-강상기 묵언(默言) 부분 - P66

폭력 피해 여성 없는 세상을 꿈꿨던 (여성인권운동가) 이문자님의 자취에 마음이 동하여 그가 일흔살에 남긴 이런 말을 몇번씩 되뇌어보는 하루.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았다. - P83

언젠가
내 얼굴이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게 될 때
나는 내게 묻게 되리

봄이 저 멀리 아득해지는 이유를
여름이 콸콸 쏟아지는 이유를
가을은 어디까지 떨어져 내리는가
겨울은 왜 마음을 쌓아 올리는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리

나는 살아왔으므로
이유도 모르고 살아왔으므로

(…)

살아 있다는 것
신이 결코 알 수 없는 것

신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불행한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행복한 것

친구들
그대들이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빛을 채워주는 날
작고 따뜻한 손으로 내게 말 걸어주시오

우리는 평화로운 영혼임을
우리는 확신에 찬 신념임을
우리는 다정한 우정임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음을

그리하여
언젠가 내 얼굴이 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들의 곁에서 다시
첫 우정의 말을 시작할 것이니

고맙소, 친구들이여 - P85

어쩌면 많은 작가들이 조장하고 있는 것은 빛나는 미래에 대해 꿈꾸기일 것이다. 전진하지 않고 후퇴하는 현실의 이야기를 바꿔 쓰는 사람. 그 행동하는 몽상가를 작가라 달리 부르는 것이기도 하리라.
오랫동안 성소수자 해방에 헌신한 운동가 피터 태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이 원하는세상을 꿈꾸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꿈이 생겼으니,
이제 나아가자고. - P120

언젠가 한번 한 책방에서 열린 문학 행사의 진행자가 되어 작가와의 만남을 이끈 적이 있다. 참여 인원이 적어서 행사라기보다는 정모 같은 분위기가 되었는데,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에 한 여성이 말했다.
-저는 마음에 병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그이 마음의 병은 말을 살아지 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날 그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헤아려 적은 글에서 나는 마음에 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지. 나도, 너도 마음에 말이 있지. 다 말해버릴까, 하는 고민을 최근에 꽤 여러번 했다. 그 가운데 한번은 말했다.
-내가 받은 고통을 생각해봤어?
그러나 그러니까 누군들 할 말이 없겠는가. - P180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시는 사치가 아니라고 썼습니다. 1977년에 백인 아버지들은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말하지만, 흑인 어머니는 느끼므로 자유롭다 (꿈속에서) 속삭인다. 시는 그 꿈의 실행을(혁명적 요구를) 선언하는 새 언어를 만들어낸다. 시를 사치라고 폄하한다면 그것은(여성됨이라는 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얘기하지요. 오드리 로드의 ‘행동을 위한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후마니타스 2018)는 1984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34년이 지나서야 한국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삶을 성찰할 때,라는 말로 시작해 우리가 진실을 말한다면,이라는 말로 끝납니다. 삶을 성찰해야만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울화의 불씨가 진실의 불씨가 된다는 말. - P206






그리고 어깨

강아솔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을 달리 부를 수 있는 말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고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봄. 정말 봄이구나. 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회갈색 직박구리 한마리가 날개를 펴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생명의 몸짓에서 사랑을 보았다고 한다면 믿으실지 손님이 한명도 없는 카페에 앉아 실로 오랜만에 말갛게 미소 지었다. 식은 사과차에 미지근한 물을 넣어 마셨는데도 제법 따스한 기운이 몸에 돌았다. 몸이 따뜻해지는 일도 역시 사랑이고, 들키는지도 모르고 혼자 웃는 일도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말없이 어깨를 낮추는 것은 각각 아름다운 일이지만, 역시 엇갈리지 않고 동시에 이루어질 때 더 사랑스럽다. 나란히 숨을 고르는 일. 사랑은 모쪼록 그런 일.
……
빛과 내가(그림자가) 정말 좋아하는 ‘우리의 일’은 잠이 들기 전에 서로의 이마를 짚어주거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아주었다 놓는 일. 먼저 잠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발등을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의 일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했다. 강아솔은 우리가 우리의 일을 그토록 아끼는 까닭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마음이 순해지는 일, 사랑.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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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 글쓰기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 25명의 삶과 철학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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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은 자신이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을 모두 부정하고 싶었다. 환멸로 가득했다. 생래적 허무주의자 도리스 레싱은 아프리카에서도 또 한 차례 인간의 한계를 깊이 깨닫는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관목 숲 사이에서 "시간이 한 손으로 모든 것을 주면서 또 한 손으로는 그것을 전부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 P26

1925년에 『댈러웨이 부인』, 1927년에는 『등대로』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드디어 작가로서 자신감을 획득한다. "내 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자 일종의 해방감도 느꼈다. "매일같이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등대로』를 쓰고 난 다음에, 나는 그들을 내 마음속에 묻어 버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나는 이제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선언했다. - P39

책을 읽으며 콜레트는 점점 지혜로워졌다. 비로소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몇몇 친구들은 콜레트에게 너는 너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작가로 살아가면서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콜레트를 칭찬하며 여성 작가의 탄생을 기다렸다. 콜레트도 더 이상 허송세월하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기 시작했다.
콜레트는 누군가를 제대로 격려해 주는 일이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콜레트도 먼저 누군가를 알아보고 응원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1951년, 콜레트는 지독한 관절염으로 고생하며 어쩌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될지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그러자 가 보지 않은 길이 궁금해졌다. 자전적 소설을 스스로 극으로 각색까지 한 「지지」를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 보고 싶었다. 주인공 지지 역을 물색하던 중 몬테카를로에서 우연히 오드리 헵번을 발견하고, 콜레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길 봐, 내가 찾던 지지야." 대문호 콜레트가 손짓했지만, 오드리 헵번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출연을 거절한다. 콜레트는 오드리 헵번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공연 전까지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그저 맹렬히 연기 수업을 받을 뿐이던 오드리 헵번은 막이 오르자 서서히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막이 내릴 때쯤에는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 P48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했다. 프리다의 소망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되고 싶은 여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65

제이디 스미스가 지향하는 문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작가는 오직 그 질문만을 던진다. "구원은 현재하고 있는 일에, 지금 쓰고 읽는 것에 존재한다." 글 쓰는 여자는 오늘에 집중한다. - P93

볼프는 신화의 가치를 긍정했다. "신화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적인 것,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문학에서 문제 삼고있는 그 인간적인 것에 대해 질문하도록 강요합니다. …… 우리는 왜 인간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가. 왜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계속해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가?"
오래된 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발견해 낸 볼프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볼프 자신이야말로 분단과 통일 시대의 갈등 상황에서 여러차례 "희생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새로운 질문을 계속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몸을 끌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에게 어울리는 세계, 나에게 어울리는 시간은 과연 어디에 존재할 것인가." 코린토스의 희생양 메데이아는 마지막까지 묻고 또 물었다.
81세가 되던 해인 2010년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볼프는 그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 볼프는 분단과 통일의 중요 국면마다 "나에게 어울리는 세계, 나에게 어울리는 시간"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성찰한 작가였다. 글 쓰는 여자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 P122

2001년 9·11 테러 직후, 수전 손택은 부시 행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반(反) 이성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미국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전 손택에게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한 (과도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한 수전 손택은 문학을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고 정의하며, 문학을 선택했기에 "국가적 허영심, 속물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안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다행스러워했다. 다만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듬해인 2004년 12월, 71세의 수전 손택은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P148

1877년부터 <폭풍의 언덕>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시대마다 새로운 찬사가 잇달았다. "<폭풍의 언덕>은 어떤 소설과도 닮지 않았다."는 서머싯 몸의 평가는 정확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에밀리 브론테의 "거대한 야심"을 꿰뚫어 보았다. 에밀리는 "세상을 한 권의 책 안에 결합시킬 힘"을 스스로 발견한 작가였다. 오직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용기"만을 간구했다.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다/ 세상 폭풍우에 시달리는 지구 안에서 떨지도 않는다." 에밀리는 자신의 영혼을 지켰다. 세상 앞에 당당했다. 글 쓰는 여자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 P159

사형수 가네코 후미코는 남은 시간을 "자서전인 듯한 글을 쓰는 데 열중하여 거의 휴식도 운동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원고 쓰는 일에만 매달렸다." "가까운 시일 안에 형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자서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출판되어 하나라도 내게 공명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나의 시작부터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이 세상의 절멸과 나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거라 믿고 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쿠보쿠의 시를 잊지 않았다. "핑계대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몸이니까." 1926년 4월 가네코후미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석 달 뒤 자살을 감행하여 천황의 ‘은사‘에 저항했다. - P182

헤르타 뮐러는 스스로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지는 곤혹스러운 시대에 과연 문학은 무엇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증언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겪었던 ‘악몽‘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가치를 환기시켰다. "이것들 보라고, 살고들 싶지." - P201

그의 단편소설 「천년의 기도」의 주인공 시 씨의 딸이 아버지에게고백한 것처럼, 이윤 리도 영어로 소설을 쓰며 해방감을 느꼈다. "자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 본 적이 없는 언어를 쓰며 자란 사람은 새 언어로 말하기가 더 쉬워져요. 그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요."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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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싸움‘에 관해 적은 글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간 발표한 글도 있고, 새로이 쓴 글도 있다. 언제 쓴 글이건 대부분 이런 물음을 품고 있다. 무엇이 그들의 존재를 가리는지, 왜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그리고 싸움이 지나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이런 질문을 품고 썼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 없는 사람들‘ 같은 표현을 질색한다. 누군가의 존재를 온갖 장치로 가리고, 적극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고, 목소리마저 가로막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혹은 ‘들리지 않는‘ 같은 수동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놓고 거짓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왜 보이지 않는가?‘ 이 질문의 답은 자명하다. 왜 외면하는가? 왜 앞서 잊는가? 왜 제대로 보지 않는가? 이 질문은 누굴 향하기 전에 나부터 걸려드는 질문이다. - P5

이 책에 담은 것은 흔적이다. 싸움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흔적. 사건과 과정, 평가와 의미가 아니다. 그저 흔적이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은 흔적을 남긴다.
싸움이 끝나질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부터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때론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났다. 그들의 흔적을 좇았다. 지워진 발자국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이들을 설명할 문장을 만들었다.

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작은 후회를 감수하며 사는 사람.

후회없이 살고 싶다. 이 말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살면서 깨닫는다. 후회 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우리는 후회를 예감하며 한 발을 내딛고 자신이 감당할 만한 후회를 삼키며 살아간다. 어떤 일을 겪어낸 이들에게서 내가 본 의지와 끈기 같은 것, 그러니까 저력이라 불렀던 것은 숱한 후회를 감수하면서도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마음이자, 후회를 뒤로 감춘 채 내주는 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뒷자리에서도 여전하다. 어떤 흔적을 뒤적여도, 아무리 오래된 사건과 만나도, 여전히 움직이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움직였기에 나 또한 아주 천천히 몸을 틀 수 있었다. - P9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송전탑이 세워지고 마을이 쪼개지고 다친 몸이 욱신거리고 상처가 잊히질 않아도,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싸움을 끝낼 수도, 질 수도 없다. 이곳은 그네들의 삶터였다. 사는 일엔 끝이 없다. 돈 몇 푼에 숨어 들어갈 수도, 쪼개진 마을이 싫다고 떠날 수도 없다. 어차피 막아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고 거짓 위안을 할 수도 없다. 그저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거친 흙에서 열매를 얻기까지 땀 흘린 날들처럼, 과정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땀 흘려야 하는 삶처럼, 살아온 대로 살아가야 한다.
상처도 땀에 흘려보내야 한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싸움을 끝낼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은 질 수가 없다. - P29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슬기로움을 느끼거든요. 도시처럼 서로가 연이 없는 그런 동네가 아니라, 뭔가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 하고 같이 놀아야 하는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이 지혜롭다 느낄 때가 많거든요. 서로 조금씩 뭔가를 회복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어요. 일 있으면 내일 온나. 밥 먹으러 간다면 같이 가자. 뭐 이런 거죠. 밉지만 용서하겠다. 그러니 같이 뭐라도 해보자. 그러면서 자기의 분노가 어쨌든 조금씩 사그라드는 거죠. 이건 슬기로움이랑 어쩔 수 없음이랑 반반인 것도 같은데. 오래된 공동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죠." - P41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비롯해 숱한 외침을 들으며, 십수 년간 한국 사회가 깨달은 것은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체라는 허상을 위해 희생을 치르는 공간이 존재한다. 이미 존재하는 곳을 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소리를 내고 외쳤기에 그들은 존재를 드러냈고, 메아리 같은 응답을 받기도 했다. 그 외침이 멈춰야 싸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응답이 더는 오지 않을 때 싸움은 끝이 난다. 응답은 기다리는 일이다. - P44

평화는 포탄이 멈춘 날, 갑자기 만들어진 완성작이 아니다. 그때로부터 돌탑을 쌓아 올리듯 지켜내야 하는 일이다.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란, 시대에 따라 이름만 바꾸어 등장한다. 그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건 사는 동안의 과제이다. 바람이 부는 날에도 누군가는 부둣가를 정비하고, 비가 오는 날에도 누군가는 장사 준비를 한다. 미군 폭격장이 설치된 마을에 사람이 살았듯이 어디서든 사람이 산다. 새마저 알을 낳고 살아간다. 모든 생명이 기억하고 살아낸다. 평화란 살아가는 일이다.
평화란, "아침까지 푹 잘 수 있는 것". 동화작가 하마다 케이코는 어린이의 입을 빌려 평화를 말했다. "폭탄 따위는 떨어뜨리지 않는 것" "집과 마을을 파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잘못을 저질렀다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땅이 평화롭기를, 삶이 고요하기를. - P60

"오늘은 누가 몸이 아프나, 어디가 안 좋아서 못 나오려나. 전화를 해보는 거야. 내가 자꾸 전화를 하니까 사람들도 미안해하고 일 생기면 나한테 미리 전화를 주고. 그렇게 못 오는 이유를 말해주면 나는 또 이제 안심하는 거야."
허물어진 자리를 책임으로 메우고 있는 걸까.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버텨주기 때문에, 반핵아시아포럼도 경주에 오고. 이런 것조차 없으면 (탈핵 운동이) 발 디딜 틈이 없잖아. 저 사람들 마음대로 할 수 없게 우리가 버텨주는 거잖아."
책임이란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은 마음이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 나 또한 그런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를 자꾸 찾아 다독여. 그래 나는 잘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억지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어. 그러니 잘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디 나라를 크게 바꾸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믿는 만큼 씩씩하게 이야기하고 내 주장을 뚜렷하게 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지. 세 사람만 모여서 월성에 대한 우리 이야기 듣고 싶으면, 불러라, 가겠다. 그래서 참 안가본 곳이 없지." - P95

"콜센터 이야기를 많이 봐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취재를 가니 콜센터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고."
감정노동과 진상 고객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우리는 콜센터 노동을 모른다. 이들의 기술과 자부심, 경력을 모른다. 그걸 모르는 것은 회사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들이 싸운 덕분에 알게 됐다. 단지 저임금, 닭장, 고용불안, 감정노동으로 이야기되는 고충이 아닌, 이들의 고용을 야금야금 갉아먹은 어떤 시스템에 대해.
외주화, 인력파견, 아웃소싱이라는 말을 참으로 쉽고 익숙하면서도, 잘 모를 것으로 만든 이 사회를 알게 됐다. - P97

"세상은 여자 노동을 뜨겁게 생각해주질 않아요.‘
남편이 직장에서 잘리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줄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해고되었다고 하면 "이참에 쉬어" "봉사나 해"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 여자 노동은 뜨겁게 생각해주지 않는지 물었다. 자신의 뜨거운 노동을 가벼운 해고로 되돌려준 회사와 싸우길 결심한 이였다.
그의 말이 좋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터에서 차별받아선 안 된다고, 여성들의 노동이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는 것이 문제라고 말해왔지만, 저토록 당당하게 여성의 노동이 "뜨겁다"고 말해본 적이 있던가. 그에게서 이 말을 들은 이후로 나에게 여성의, 아니 누군가의 노동은 뜨거운 것이 되었다.
미적지근하게 취급되는 것들이 있다. 여자 노동이 그렇고, 나이 듦이 그렇고, 빈곤이 그렇고, 서울이 아닌 곳이 그렇고, 사람이 아닌 생이 그렇고, 그러니까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밀려난 모든 것이 그런 온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온도를 지닌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 가려져 있다. 공단 담벼락 너머, 변두리 지역, 여느 가정집, 어느 곳에나 숨겨진 사람들이, 아니 가로막힌 사람들이 있다. 장막은 결국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시선에 있는 것. 장막을 들춰 그곳에 가면, 내가 보게 되는 건 몸을 숨긴 이들이 아니라 이들이 지키려는 무엇이었다. - P182

그런데도 세상이 ‘힘든 일 안 하려 한다는‘ 한국 젊은이를 탓하고, ‘한국인 일자리 뺏는다는‘ 이주노동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그 사이를 ‘쓸모없는 노동‘이라 낙인찍힌 노년 노동이 메운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배운 게 많아도, 힘이 세도, 혈기가 넘쳐도 못하는 일. 손에 익고 일머리가 깨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경험과 숙련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이들이 하는 노동에는 ‘저숙련‘이라는 이름을 붙는다.
저숙련, 단순, 반복이라는 말이 붙는 노동의 특징은 ‘대체 가능‘이다. 언제든 내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위협감은 ‘이 돈 받고도 일하는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이병철은 자신은 쉽게 대체될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내가 없으면은 회사가 일을 못 합니다. 작년에 고무호스를 끼우다가 산재가 났는데. 한 달 회사를 못 갔어요. 내 없을 때 회사에서는 이 사람도 넣어보고 저 사람도 넣어보고. 못해요. 고무 모형이 10개 20개가 아니고, 1,000개가 넘어요. 그만큼 다양하게 있다는 겁니다. 저도 다 몰라도 800개 정도는 아는데. 며칠 와서 일하는 사람이 그걸 다 기억할 수가 없어요. 내가 없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회사도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회사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정하지 않는다. 저렴하기에 사용하는 노동력이다. 그 노동을 인정하는 순간 저렴하게사용할 수 없어진다.
탓을 하는 이는 사장이나 관리자 개개인만이 아니다. 이 사회가 노년 노동을 얕본다. 이는 사회가 노년 노동(과 저숙련·육체·단순·반복이라 부르는 노동)을 관리하는 방식이기도 한데, 따로 부르는 말이 있다. ‘후려치기‘. 알다시피 흥정을 할 때 물건을 후려치는 이유는, 가격을 깎기 위해서다. 애초에 저렴한 노동은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값싼 노동이 만들어진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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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동 사람들 -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2021년‘올해의 인권책’선정
정택진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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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공공부조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차적인 복지의 주체를 가족으로 설정하고, 가족으로부터 돌봄과 복지를 제공받지 못하는 대상에 한해서만 수급권을 부여하는 잔여적 (residual) 형태로 구성된다. 수급신청자가 소득 및 자산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법적 부양의무자인 ‘1촌 직계혈족(부모, 자녀) 및 그 배우자(며느리, 사위 등)‘에게 부양능력이 없거나 미약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수급권이 보장된다. - P74

"유령"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복지 시설과 제도 속에서 정영희는 분명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성은 정신지체 장애인, 노숙인, 일반수급자라는 형태로 환원될 때에만 인정받는다. 거기에 ‘정영희‘라는 정체성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존재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유령"이 되었다. 하지만 성적 욕망을 표출하고 누군가를 만나 연애 관계를 형성할 때 정영희는 성적 욕망을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 성적 욕망을 매개로 상대방과 상호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며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
……..
여기에서 정영희가 표출하는 욕망은 자아의 표현이나 주체적 의지가 아닌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정신지체 장애는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라는 특성으로 이해되고 전문적 시설을 통해 치료되어야 할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정민희가 정영희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포괄적 의미의 돌봄과 "사람다운" 삶은, 이러한 욕망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그것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폐쇄 시설 역시 가족이 제공하고자 한 일상적 돌봄의 일부분이다.
물론 폐쇄병동을 단순히 통제와 억압의 기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은 정신질환이나 장애가 가진 병리적 특성과 시설의 치료적 효과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욕망, 정상, 통제와 치료로 이어지는 문법에서 부정될 수밖에 없는 정영희의 욕망이 본인에게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 P85

그런데도 기초생활보장제도에 관한 정보 부족이나 ‘주거조사관이 오고 나서 수급이 끊겼다‘는 식의 무성한 소문은 언제 수급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우려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현장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주민들은 기초생활수급에 대한 우려와 공포를 수없이 내게 들려주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현재 상황 때문에 곧 수급이 끊기는 것은 아닌지, 수급이 끊기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째서 이번 달 수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지 물어오곤 했다. 기초생활수급은 쪽방촌 주민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그 수단이 사라졌을 때 언제라도 일상이 중단될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 P94

그래서 그녀는 경제적 궁핍과 불안정에 시달리면서도 홍인택과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쥬앙 빌(João Biehl)과 피터 로케(Peter Locke)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논의를 빌려, "욕망은 끼어들고, 회피하고, 자신이 의도하는 것으로 승화함으로써, 권력이 만들어내는 주체화의 양식과 영토화를 지속적으로 비집고 나온다"고 말한다. 정신지체 장애인, 일반수급자, 클라이언트로, 돌봄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는 존재로 주체화되었던 정영희는 그것을 "비집고 나오는" 욕망을 관계의 형태로 "승화(sublimation) "함으로써 동자동 쪽방촌에서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 P104

시신이 안치소에서 차량으로, 차량에서 카트로, 카트에서 화장 시설로 옮겨지는 과정은 행정 규정에 따른 절차다. 주민들이 볼 때 이러한 행정 절차에서 무연고 사망자는 추모와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 처리되어야 할 "짐짝"에 가깝다. 그러나 절차와 절차 사이에 존재하는 - P117

그러나 주민들은 각자 동자동 쪽방촌에 오기까지 경험한 "과거 얘기, 가족 얘기, 자식 얘기" 등 서로의 "각자 사정"을 묻지 않는다. 물론 같은 공간에 거주하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과거를 알게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거 이야기 잘 안 한다"라는 조정일의 말처럼, 쪽방촌 주민들은 서로의 과거와 기억을 의도적으로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는다. 현장연구 기간 내내 많은 주민들이 이러한 ‘암묵적 윤리‘를 보여주었다.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다가도 "내가 너무 많이 말했네. 쓸데없는 이야야기를…………"라며 황급히 말을 중단하기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던 다른 주민에게 "그런 깊은 이야기는 막 하지 말어!"라고 소리치며 말리기도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과거의 기억은 서로 함부로 묻거나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주민들의 암묵적 규범이다.
이처럼 쪽방촌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암묵적 윤리를 기반에 두고 있다. 누군가를 온전히 알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주민들 사이의 연결은 가능하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연결은 완전한 연결이나 가까워짐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 거리 두기와 단절을 포함하는 망각의 관계에 가깝다. - P125

"여기에 나눠주는 게 정말 많잖아요. 이게 주민들을 마비시켜요. 이제 고마움도 못 느끼는 거죠. 나눠주면 좋아하긴 하는데 막상 물어보면 누가 준 건지도 몰라요.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거예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거죠."
김동석은 무언가를 나눠주는 활동 때문에 주민들이 "마비"되고 "길들여진"다고 생각한다. "고마움"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은 어두워진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인데도 자기힘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능력은 점차 사라진다. - P158

그가 바라보는 주민은 누구나 두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그중 후자가 주민의 "본모습"에 더 가깝다. 그러나 평소에는 전자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설령 주민들이 마비되고 길들여져 있다고 하더라도 강제적으로 없애거나 고쳐야 할 것이 아니다. 가려져 있는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민자조조직의 목적이다.
"그런 거죠,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
여기에서 김동석이 말하는 "본모습"은 곽주형과 황민욱이 말한 임금노동과 경제적 생산 중심의 독립과는 다르다. 동료 주민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에서 꺼낸 "3만원"은 주민의 "본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임금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지도, 부를 창출하지도, 독립을 성취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플 때 병문안을 온 주민의 ‘줌(giving)‘에 응답해 "3만원"의 형태로 ‘되돌려주었을(reciprocat-ing)‘뿐이다.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 두 주민 사이에 이루어진 줌, 받음, 되돌려줌을 통해 둘은 상호 의존 관계를 형성하고 상징 차원에서 연결된 ‘우리‘가 된다. 김동석이 말하는 "본모습"이란 바로 이러한 상호의존 관계와 주민 사이에 형성되는 연대(solidarity)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민자조조직이 목적으로 삼는 변화란 의존에서 독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의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의존으로의 변화다. 김동석은 각종 물품 지원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주민이 결국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의존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품 지원에 대한 일방적 의존이 주민 간의 연대와 상호 돌봄, 즉 긍정적 상호의존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 P168

식도락에서 밥을 먹는 쪽방촌 주민의 모습, 무언가를 돌려주려 노력하는 1단지 주민의 모습이 일상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호혜적 실천이라면, 난협이나 주민협동회의 활동은 조직화된 차원에서의 호혜적 실천이다. 이들은 일상적 · 조직적인 차원에서 상호 의존과 연대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주민들의 인격과 자존감을 유지하고 마비와 길들여짐의 낙인을 거부한다. 짜장면 나눔과 식도락 사업은 주민을 위해 식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당사자인 주민에게는 결코 같은 경험일 수 없다. - P193

예컨대 칠레 산티아고 빈민 거주 지역(poblaciones)의 주민들은 선물과 증여를 통해 서로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받는 이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마치 자신의 행위가 주는 행위가 ‘아닌 척‘한다. 주민들은 안부를 묻는 척하며 은근슬쩍 노동을 돕고, 너무 많이 만들었다고 거짓말하며 음식을 나누거나, 우연한 만남을가장해 차를 태워준다.
선물의 순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선물의 시작, 즉 줌에 대한 최초의 인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아닌 척하기는 줌에 대한 상호 인지를 차단한다. 따라서 줌에 수반되는 돌려줌의 의무도 발생하지 않는다. 동료 주민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도움이 아닌 것처럼 우연으로 가장된 이상, 도움을 받는 이는 그 도움을 다시 되돌려줄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자신이 받은 도움이 돌려주지 못할 정도로 큰 것이라 하더라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무에 응답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인격 손상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도움을 받은 주민이 보답할 때에도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돌려주는 행위가 아닌 척한다. 즉 돌려주는 행위는 주는 행위에 대한 답례로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는 행위로 발생한다. 이러한 행위가 계속해서 발생하면 선물은 ‘줌-받음-되갚음-줌‘의 순환이 아니라, ‘줌. 받음1, 줌. 받음2, 줌. 받음3‘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끊어진 시간들이 마치 지층의 단면처럼 층층이 쌓이는 "동시간적 선물(contemporary gift)"을 통해 주민들은 경제적 불안정성 속에서도 서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다. - P195

출구 없는 세계에서 과연 어떤 윤리적 응답이 가능할지, 그 응답의 형태는 무엇일지 쉽게 결론내리기 힘들다. 포비넬리 또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포비넬리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그는 "삶은 어떤 구원적 미래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지금 여기의 모습이다(this is what is)‘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전미래적 관점에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대안을 제시하기에 앞서 벽장 안의 아이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아이의 고통 위에서만 자신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결이 어떠한 공통의 구조 위에서 등장하는지 ‘지금 여기의 모습‘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책이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버려짐의 모습을 포착하고자 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개입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궁극적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동자동 쪽방촌이라는 환경에서 주민들이 보여주는 ‘지금 여기의 모습‘을 가능한 한 충실히 그려내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 이후 다시금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벽장을 마주하고 난 오멜라스의 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 벽장 안을 들여다본 독자와 쪽방촌 주민들 사이에도 부분적인 연결이 생겨났다. 이 연결이 지속될 수 있을지, 지속된다면 언제까지 가능할지, 또 어떠한 형태로 지속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벽장과 그 바깥의 부분적인 연결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계속해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방식은 같지 않을지라도, 각자가 벽장 안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일 또한 이러한 물음을 놓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모른다. 쪽방촌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도 결국 주민들이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하는 까닭은, 이러한 시도가 전미래 시점에 서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구원적 미래를 너무나 섣불리 제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은 중요하다. 공통의 구조 위에서 벽장 안팎의 부분적 연결은 드러난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응답은 이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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