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추모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실린 '아라의 소설'(정세랑)은 짧은소설집 '정세랑 미니픽션'의 표제작이다.

사진: Unsplash의 Vinícius dos Santos


*  올해 6월에 나온 산문집 '당신의 독자가 될게요'도 담아둔다.





그래도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박완서 선생님이 계시는 듯했다. 세상을 뜨고 나서도 그렇게 생생한, 계속 읽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좋은 가늠이 되었다. 사실 아라가 생전에 작가를 뵌 건 아주 잠깐, 아주 멀리서였고 그것도 뒷모습이었다. 그때 아라는 대작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다고 기이한 생각을 했다……. 한 올만 뽑으면 안 될까 하고 록스타에게 손을 뻗는 팬처럼 침을 꿀꺽했지만 물론 그런 망나니짓은 하지 않았다. 용기 내 앞에서 인사라도 할걸, 뒤늦은 후회를 하다가 따라 걷는 자에겐 뒷모습이 상징적일 수도 있겠다고 여기게 된 건 요즘의 일이었다. - 정세랑 _ 아라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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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수록작 '아라의 소설'(정세랑)로부터 옮긴다.

사진: Unsplash의 Mihai 👑


사진: Unsplash의 Jack Chen


cf. 아래 글 속 "박완서 선생님이 한 젊은 SF 작가에게 내린 빛나는 평가와 관련된 일화"는 검색해보니 제1회 젋은작가상 심사 때 박완서 작가가 배명훈 작가를 높게 평가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https://munhak.com/bookAndAuthor/books/detail/2256





영환은 몇 년 전에 SF를 쓰려다가 크게 실패한 적이 있다. 어쩌면 아라의 안에 장르적 코드가 자연스럽게 있는 걸 질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코드는 갑자기 흉내 낸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지고 싶은 걸 가진 다른 작가를 한번 깎아내려 본 걸까? 꼬인 사람이니 가능성이 있었다. 대가일수록 편견 없이 똑바로 장르 소설을 바라본다고 늘 여겨왔다. 박완서 선생님이 한 젊은 SF 작가에게 내린 빛나는 평가와 관련된 일화는 유명하고, SF 작가들이 한결같이 박완서 선생님을 흠모하는 것은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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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완서 작가 추모를 위한 짧은소설집 '멜랑콜리 해피엔딩'(2019)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그 겨울의 사흘 동안'(함정임)으로부터 옮긴다. 화자는 알베르 카뮈의 딸 카트린 카뮈와 돌아가신 'P선생님'(박완서)의 딸 - 어머니 별세 후 아치울의 노란 집에서 살고 있는 호원숙 - 의 만남을 상상한다.


박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래 글 속 '저녁식사가 끝난 뒤'(함정임)는 2012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옥수수와 나' 수록작이자 2015년에 나온 개인 소설집 표제작이다. 그리고 산문집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2022)에 '카뮈의 루르마랭에서 박완서를 추억하다'란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겨울의 사흘 동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아차산 자락 아치울 마을에 새로 지은 P선생님 댁을 생각하면, J는 제일 먼저 박하차가 떠올랐다. 선생님은 새로 가꾼 뜰에 박하를 심었고, 손님들에게 그 박하 잎을 우려낸 차를 내주었다. 선생님은 이사한 뒤 한동안 매일 아침 창가에서 목도하는 일출 장면을 경이롭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흥분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그 장관을 J가 직접 본 적이 없기에 일출보다는 박하차의 향기가 J에게는 하나의 감각으로 새겨졌다. 가끔 화원에서 허브들 속에 놓여 있는 박하와 마주칠 때면, 선생님의 뜰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뒤, J는 그 집에 간 적이 없었다. 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딱히 갈 명분도 없었다. J는 카트린 카뮈와 그녀의 만남을 상상하면서, 선생님의 자료를 찾다가 그 집이 노란 집으로 불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7년 전, J가 이곳 루르마랭에 머무는 사흘 동안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떠나는 장례 의식을 마쳤다.

돌아와보니, 더 이상 선생님은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선생님의 영전에 작별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에 맺혀, J는 박하의 추억을 담아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 함정임 _ 그 겨울의 사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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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디올러스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77XXXX100172


'아치울의 리듬'(호원숙)의 '2장 마을의 리듬' 첫 글 '백일홍 이해인 수녀님'이 아래 글의 출처이다. 배롱나무로 시작하여 백일홍을 거쳐 글라디올러스로 끝난다. 오늘은 정말 덥다.

Woman with Gladioli - Charles Blackman - WikiArt.org







배롱나무가 붉다. 시야를 가리며 점점 커지는 나무를 잘라도 기본 키가 유지되고 꽃이 핀다. 한편에 씨앗을 심었던 백일홍이 꽃대가 올라왔다. 느리게 느리게. 작년에 피었던 자리에서 저절로 올라온 것인데 햇빛이 아주 뜨거운 날에는 꼬부라진다. 거기서 물을 따로 주고 눈길을 주니까 건실하게 올라온다.

이해인 수녀님의 해인글방 앞뜰에서 받아온 씨앗이었다.

수녀님은 어머니에게도 위로자였고 어머니도 수녀님의 위로자였다. 어머니의 기일에 오셔서 어머니의 침대에 누우신 편안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산 글라디올러스 하나가 꽃을 피웠다. 그것만으로 만족한다. 서너 개가 더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여린 핑크빛이다. 그래도 이십 프로는 건진 것이 아닌가? 다행히 튼실하다.
 
여름이여.
어찌 되었든 가고 말 여름이여.
내 눈에 눈물이 어린다.
꽃이 피면 웃고 꽃이 지면 가슴이 쓰라려지는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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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수록작 '그 겨울의 사흘 동안'(함정임)에서 필자의 분신인 화자는 박완서의 딸(호원숙)과 알베르 카뮈의 딸(카트린 카뮈)을 겹쳐본다. 

루르마랭에 있는 알베르 카뮈의 묘비(위키미디어커먼즈)


'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김화영 역)을 출간한 카뮈의 딸 카트린은 아버지의 미완성 유고 '최후의 인간'을 정리하여 펴냈다. 불문학자 김화영의 산문집 '김화영의 번역수첩'과 '여름의 묘약'에 카트린 카뮈를 만난 일화가 담겨 있다.





카트린은 아버지가 남긴 모든 글의 전문 에디터였다. 동시에 카뮈라는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전문적으로 정리하고, 배열하고, 쓰는 작가였다. 『홀로 그리고 함께』 『나눔의 세계』는 알베르 카뮈의 사진들로 구성한 카트린 카뮈의 저작이었다. 엄밀히는 아버지 카뮈와 딸 카뮈의 공동 저작이었다. 카뮈에게 카트린이 있다면, P선생님에게는 그녀가 있었다.

J가 뤼베롱산 자락 고원 마을 루르마랭에서 그녀를 떠올리는 것은 아주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 카뮈가 살았던 그 집에 장녀 카트린이 살고 있다면, P선생님이 살았던 아차산 자락 아치울 마을 그 집에는 선생님의 장녀인 그녀가 살고 있었다. - 함정임 _ 그 겨울의 사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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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6-08-03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님의 따님인 호원숙 작가의 책도 에세이 읽어보면 좋더라고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은 이후에 가족들이 자료를 정리한 예가 적지 않을 것 같네요.
서곡님, 날씨가 너무 더워요. 폭염에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서곡 2026-08-03 20:22   좋아요 1 | URL
네 호원숙 님의 글 잘 읽히더군요 그러게요 작가의 유산을 보존유지하려면 자손들이 할 일이 많을 거 같아요 카뮈 남매는 쌍둥이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건강히 여름 잘 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