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해후' 수록작 '사람의 일기'(1985)는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친 엄마의 심경을 담고 있다.
Red Vision, 1984 - Leonor Fini - WikiArt.org
남에 대해 무심하고 때로는 차갑기까지 한 만큼 내 식구들에 대한 나의 애정과 관심은 내가 생각해도 좀 지긋지긋한 바가 있었다.
여직껏 써갈긴 이야기에 넌더리가 났다. 내 소설에서 주로 다루어온 나보다 못난 사람들, 짓눌리고 학대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다만 이야기를 꾸미기 위한 관심이었다는 걸 왜 느닷없이 깨닫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관심만 있고 사랑 없음이 그 삭막한 바닥을 드러내자 이제야말로 마지막이다 싶었다.
그 무렵 나는 나의 문학적 관심의 사랑 없음에도 절망하고 있었지만, 가족이라는 가까운 핏줄에만 집중적으로 국한된 나의 지긋지긋한 모성애에도 적이 절망하고 있었다. 밖으로 확산하지 않으면 독이 될 것처럼 그 사랑은 이미 너무 진하고 편협했다.
내 딸 외의 모든 여자들이 흠 하나 없이 건강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내 건강과 정신을 무참히 좀먹고 있었다. 흠 없고 건강한 사람한테 질투가 나서 꼴도 보기 싫었다.
헤어날 길 없는 불행감이었다. 병원에선 달 반도 후딱 갔는데 퇴원하곤 하루가 여삼추였다. 원망과 불행감에 짓눌린 시간이란 얽힌 실타래처럼 마냥 더디게 풀렸다.
내 딸의 불행이 그들의 위안거리가 된다는 걸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을 원수처럼 노려보았고 내심 불같은 증오심을 불태웠었다. 그러나 내가 내 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고 느낀 기쁨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웃 사랑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처럼 육친에 대한 사랑이 지긋지긋하게 뭉친 사람에겐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신은 죽었다’는 참 근사한 말이었다. 나는 한술 더 떠 ‘신을 죽였다’고 뽐내고 싶지만 예전에 죽은 신을 죽여봤댔자였다. - 사람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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