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트 / 백수린 - 호우

악스트 9/10월호에 발표한 백수린 작가의 단편소설 '호우'가 아래 옮긴 글의 출처이다.


Lydia Reading on a Divan, 1880 - 1881 - Mary Cassatt - WikiArt.org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순리 같았다. 결혼식은 여름날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결혼식이 다가왔을 때 하필이면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대." 우울해진 기분을 떨치려고 결혼식 전날, 그녀는 카페에 앉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우린 잘 살 거지만 그런 건 미신인 거 알지? 그냥 위로하려고 지어낸 말일 뿐이야." 남자가 말했다.

그녀가 이 시간에 도서관에 가지 않은 건 폭우 탓이었다. 이상기후가 점점 심해진다더니, 닷새째 비가 계속 퍼부었고 바깥출입이 어려워졌다. 상습 침수 지역은 주의하라는 알림 메시지와 산사태 위기 경보가 수시로 도착했다. 빌린 책이 연체되도록 그녀가 도서관을 방문하지 않은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규칙적으로 동네 도서관에 가는 건 그녀의 낙이었다.


남편과 아이가 나가고 나자 집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녀는 설거지를 했고, 어질러진 침구들을 제자리에 정리했다. 집 안이 꿉꿉한 것 같아 인터넷으로 제습제를 몇 개 주문했다. 또 한 번 재난 문자가 왔다. 호우주의보가 발효 중입니다. 위험한 지역에 접근하지 마시고 반지하주택이나 지하상가 등에 물이 차오르거나 하수구 역류 시 대피해주세요.

어린 시절 언니가 학교 간 사이 아버지의 복사실 바닥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활자가 찍힌 종이와 책을 가지고 놀았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읽는 것을 좋아했고 책과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책을 가장 많이 읽은 것은 열네 살 때였는데, 그 시절은 새로 진학한 중학교 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 해서 친구 없이 외톨이로 지내던 시기였다.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느꼈던 것은 비밀스러운 기쁨이었다. 책을 펼치면 그녀의 상상 속에서 그 세계는 실재했고, 그녀는 자신이 겪는 고독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 알 수 없는 존재가 너만 그런 것 아니야,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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