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의 링 스타일
[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오스트리아 빈(WIEN) ‘음악의 성지’에서 환희를 맛보다] http://jmagazine.joins.com/forbes/view/337948: 이 필자가 쓴 책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의 빈(비엔나)과 도시 건설 부분을 읽었다. 저자 정태남은 이탈리아 로마 공인건축사라 하고 유럽 문화에 해박한 모양이다.
아래 옮긴 글에 황제가 도시계획에 서명한 날이 1857년11월20일로 나오지만, 12월20일의 오기로 보인다. https://de.wikisource.org/wiki/Die_Erweiterung_der_Stadt_Wien
[네이버 지식백과]프란츠 요제프 [Franz Joseph I] -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오스트리아 황제 (독일-오스트리아 왕가, 최용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30475&cid=56790&categoryId=56801 여기도 명령일이 12월20일로 되어 있다.
성벽해체 후 새로 건설된 빈의 링슈트라세(ring road 순환도로) The Schottenring section of the Ringstraße in 1875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18세기 도시'와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 그리고 '도시의 진화 체계'에 빈에 대한 글들이 있다.
오늘날 유럽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중세의 성곽도시들처럼, 비엔나도 중세에는 도시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도시성벽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더욱더 굳건하게 보강되었는데, 가장 위협적이었던 외적은 오스만 튀르크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 전투의 양상이 바뀌는 바람에 이 도시성벽은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를 정벌했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 다음 1815년 이후부터 오스트리아는 다시 보수왕정체제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폴레옹 등장 이후 전 유럽에 뿌려진 자유사상은 마침내 1848년에 시민혁명으로 이어져 유럽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비엔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이 해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임 황제로 18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해 장장 68년 동안 통치하게 되는데 19세기 중반에 그가 바로 비엔나의 도시풍경을 완전히 바꾸게 한 장본인이다.
당시 파리에서는 오스망 남작이 옛 파리 시가지를 대대적으로 손질해 직선대로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프란츠 요제프 1세도 비엔나를 새롭게 개조하기 위해 1857년 11월 20일 기존의 도시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로를 만드는 대대적인 도시계획안에 서명했다.
그는 1848년에 있었던 시민폭동을 진압할 때 도시성벽이 장애물이 되었던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환대로가 있으면 도시가 더 정돈되고 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을 더욱 발하게 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도시성벽이 완전히 철거되고 1865년에 마침내 링슈트라세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자 비엔나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 후 링슈트라세 도로변에는 헌정 성당, 대학, 시청, 궁정극장, 국회의사당,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국립 오페라극장, 미술 아카데미 등 많은 공공건축물뿐 아니라 비엔나의 귀족층과 산업혁명 이후 탄생한 돈 많은 중산층 계급을 위한 개인 건물들도 주변에 세워졌다.
이 건축물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취향에 맞게 모두 고대 그리스, 로마,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옛 양식들을 교과서처럼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링슈트라세는 한마디로 역사주의 건축의 전시장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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