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의 표제작이자 첫 수록작인 ‘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의 마지막 대목을 옮긴다. 역자해설도 일부 가져왔다. 편지를 보낸 적 있는 지인이 존속 - 아래 나오지만 모친을 살해한다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1887 (퍼블릭도메인, 위키미디어커먼즈) 사진은 Paul Nadar가 찍었다.
Paul Nadar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Paul_Nadar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그녀의 마지막 날, 혹은 그보다 훨씬 전에 아들에게 이런 비난의 말을 하지 못할 무조건적으로 선한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근원적으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근심을 안김으로써, 걱정으로 가득한 애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매일매일 그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나이 들게 하고, 결국은 그들을 살해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에게 일어난 다음과 같은 변화를 볼 수 있다면, 즉 고통으로 가득한 애정에 의해 몸은 서서히 파괴되었고, 두 눈은 생기를 잃었으며, 영원히 새까맣고 무성할 것만 같았던 머리가 어느새 힘을 잃은 채 하얗게 변해 있고, 동맥은 경화되었고, 신장은 꽉 막혔으며, 심장은 갑갑해지고, 남아 있는 날들 앞에서 용기는 사라지고, 무거운 걸음은 더 느려지고, 한때는 무엇도 꺾을 수 없을 것만 같던 희망 덕분에 그렇게나 근거 없이 자유롭게 차오르던 정신이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희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슬픔과 그토록 잘 어울렸던 타고났다고 믿은 경쾌함은 이제 영원히 고갈되었다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공상으로 가득한 삶을 산 많은 자들이 돈키호테의 경우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에 너무 늦게 찾아오는 명석함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앙리 반 블라랭베르주가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의 삶이 저지른 끔찍함 앞에서 경악하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기 위해 권총에 몸을 내던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토록 고통스러운 깨달음(사람들이 그 경지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가정하에)은 삶이 약속하는 듯한 즐거움이 첫 번째 광선을 내비치자마자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과연 어떤 즐거움이, 어떤 삶의 이유가, 어떤 삶이 그와 같은 깨달음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그 깨달음과 그 즐거움 중에게 무엇이 진실이며 ‘진리’인가?
1차 발표 : 1907년 《피가로》2차 발표 : 1919년 『모작과 잡록』 - 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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