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어느 존속살해범의 편지'에 수록된 '『생트뵈브에 반박하여』서문'(1909)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의미심장한 글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봤거나 관심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 전율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완독한 독자의 경우 감동의 물결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아래 옮긴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생트뵈브에 반박하여'는, 역자해설에 설명이 나오는데, 프루스트가 시도한 비평서로서 생트뵈브는 그와 동시대에 활약한 평론가라고 한다. 프루스트는 그 책을 완성하지는 못 했지만 이 서문을 통해 결과적으로 다가올 미래에 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미리 예고하고 있다. 

Marcel Proust - Richard Lindner - WikiArt.org

내가 여러 해 여름을 보냈던 어느 시골집이 있다. 간혹 나는 그때의 여름을 떠올려보았지만, 그러한 기억은 결코 그 여름들과 같지 않다. 그 시간들은 내게 영원히 죽은 것으로 남을 확률이 컸다. 그것의 부활은 다른 많은 부활과 마찬가지로 아주 사소한 우연에 기인했다. 어느 날 저녁, 추위에 꽁꽁 얼어 귀가한 나는 여전히 몸을 떨면서 내 방으로 올라와 램프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이 든 요리사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따뜻한 차를 한 잔 권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녀는 살짝 데운 얇은 빵도 몇 조각 함께 가져왔다. 따뜻한 빵을 차에 찍어 한 입 베어 문 순간, 입천장에 차의 향과 함께 부드러워진 빵의 감촉, 제라늄과 오렌지나무 향, 놀라운 빛과 행복감이 느껴지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해하지 못할 이것이 멈출까 봐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토록 놀라운 현상의 원인이 차에 적신 빵의 맛이라고 믿은 채 그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내 기억의 틀을 형성하던 벽이 흔들리더니 이내 무너지며 마침내 앞서 언급했던 시골집에서의 여름날들, 그곳에서의 아침과 함께 행복 가득했던 시간들이 줄줄이 의식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기억이 났다. 나는 매일 옷을 갈아입은 다음 잠에서 깨어난 할아버지가 차를 마시던 방으로 내려가곤 했다. 할아버지는 비스킷 하나를 차에 적셔 내게 먹으라고 주셨다. 이런 여름날들이 다 지나간 후 차에 적셔 부드러워진 비스킷의 감촉은 죽은—지성의 관점에서 죽은—시간들이 몸을 숨긴 안식처가 되었고, 그 겨울날 저녁, 추위에 떨며 집에 들어왔을 때 요리사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기묘한 우연에 의해 내게 차를 권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 『생트뵈브에 반박하여』

러스킨 번역가라는 후광도 잠시, 프루스트는 마흔이 넘을 때까지 이렇다 할 특별한 작품을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한다. 그는 자전적 요소들로 가득한 『장 상퇴유』라는 소설에 4년을 할애하지만 결국 결말을 맺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남겨둔다.

소설에 이어 이번에는 평론이라는 장르에 도전하는데, 『생트뵈브에 반박하여』라는 비평서를 시도하나 이 또한 미완성으로 살아생전 출간되지 못한다. 프루스트는 이미 생트뵈브 식의 전기적 비평과는 반대되는 생각, 즉 한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작가의 인품이나 개성, 사회적 매너와 평판이 아니며 오로지 작품만이 유일하다는 믿음은 확고했으나, 그의 이론을 전개할 수단으로서 ‘비평서’라는 형태는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비평서가 문학적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번째와 마지막 에피소드가 이미 담겨 있는 서문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중략) 여전히 작가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작가를 통해 작품을 설명하려 한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생트뵈브, 그리고 청년 시절 프루스트의 멘토이기도 했으나 이후 문체에 대한 무지와 둔감함을 증언한 아나톨 프랑스(특히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프랑스는 프루스트의 개인적인 부탁을 받고 그의 데뷔작이자 자비로 출간한 호화 양장판인 『기쁨과 나날』에 서문을 작성해준 바도 있다! )에게는 등을 돌린다. -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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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루스트의 아나톨 프랑스 ft. 보들레르
    from 에그몬트 서곡 2023-08-02 09:55 
    프루스트의 '존속살해범의 편지: 그리고 그 밖의 짧은 글들'에 수록된 '폴 모랑의 『연한 새순』 서문'(1920)로부터, 그가 멘토라 부른 아나톨 프랑스의 문체론을 반박하는 대목의 일부를 옮긴다. 아나톨 프랑스(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커먼즈)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3p4343a (아나톨 프랑스) 보들레르(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커먼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