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의 장편소설 '워싱턴 스퀘어'의 영화화를 다룬 논문을 찾아 읽었는데 원작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많아 일부 옮긴다. 논문 저자 유희석 교수는 창비판 '한 여인의 초상' 공동역자로서 을유판 '워싱턴 스퀘어' 역자 유명숙 교수와 함께 번역했다.
[『워싱턴 스퀘어』가 ‘말없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면, 진정한 주인공은 캐서린이다.
아버지에 대한 의무와 타운쎈드를 향한 사랑 중 어느 하나를 선뜻 선택하지 못하는 그녀의 고통스런 망설임과 기다림이야말로 ‘가정의 서사시’(domestic epic)를 방불하는 ─ 남성작가의 어떤 모험소설에도 못지 않은 ─ 울림이 있으며, 실제로 벌어진 파국도 추호의 감상주의를 허용치 않는다.
무엇보다 제임스가 ‘비대중적인 미국작가’로서 멜로드라마 형식을 끌어 들이면서 그것을 창의적으로 변형∙활용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감정의 과잉을 부추김으로써 독자의 현실인식을 마비시키는 의미의 멜로드라마 자체를 해체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베네트(Elizabeth Bennet)부터 에마 우드하우스(Emma Woodhouse), 패니 프라이스(Fanny Price), 앤 엘리엇(Anne Eliot), 엘리노(Elinor)와 매리앤(Marianne) 등에 이르는 오스틴 소설세계의 각기 다른 개성인 여주인공들이 상대 남자들과의 이지적∙정서적 교감을 통해 (자기)교육과 배움의 길에 들어선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제임스의 캐서린 슬로퍼가 그런 길과는 다르다는 데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가령『분별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 1811)에서 진정한 사랑은 일생에 단 한번뿐이라고 믿는 매리앤이나 ‘돈과 사랑’을 저울질하는 세상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엘리노의 ‘교육 과정’을 따라가면서 자기성찰에 근본을 둔 남녀의 상생적 결합을 제시한 오스틴의 성취도 1790~1810년대에 이르는 영국 역사의 ─ 프랑스혁명의 과격한 일탈이 역사적 반면교사가 되어준 ─ 극히 제한된 특정 시공간에서 기적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터다. 요컨대 두 처녀가 우여곡절 끝에‘올바른 배필’을 만나고 자신의 기우뚱한 기질을 바로잡으면서 결혼에 이르는 도정이 헨리 제임스의 작품에서는 철저하게 차단된 것이다.
우선 여주인공부터 순진과 경험의 도식이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 가부장적 남성이라는 범주로만 슬로퍼(아버지)를 환원하는 것도 마찬가지 애로가 있다. 반면 멜로물에 어울리는 유형인 모리스(구혼남)가 캐서린에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럽을 두루 돌아본 그가 캐서린에 눈독 들이는 것을 단지 돈 때문이라고 단정해도 곤란하다. 무엇보다 캐서린은 유럽의 사교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무구의 인물인데, 적어도 그 점을 알아봤다는 점에서(특히 작품 초반의) 타운쎈드 역시 나름의 ‘눈’을 가지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제임스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이를테면 지문을 전혀 남기지 않으면서 오스틴과 발자끄의 작품을 훔친 것을 인정하면서도, 캐서린을 그리는 데서 발휘되는 제임스 특유의 애매함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 그가 19세기 미국 남성백인작가들, 특히 호손의 적자임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헤스터(:주홍글자의 헤스터 프린)를 급진적 개인주의자에서 여성공동체의 보수적 대모로 변모시킨 호손의 고뇌가 남북전쟁의 전운에서 싹텄다면, 전후 미합중국을 주도한 북부의 정신적 이념이 슬로퍼와 모리스가 (비중은 다르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변하는 남성중심주의에 반영된다. 두 남성의 실체를 깨달은 캐서린의 운명은 결과적으로 제임스 동시대 및 이후 여성작가들이 그려낸 여성주인공들의 삶의 궤도에 근접한다. 19세기 미국문학에서 가장 여성적인 남성작가가 헨리 제임스라는 세간의 평가가 빈말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174072 인문논총 제54집(2005) 유희석
PD-US, https://en.wikipedia.org/w/index.php?curid=8268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