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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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의 소로가 그런 사람이었어?

박홍규,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필맥, 2008.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비단 영화 속의 그 인간만도 아니고 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물론 잘 나가는 인간들이야 여전히 앞만 보고 가느라 정신없을 터이니 귀환희망족(?) 부류에서 빼드려야겠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돌아가는 데 있어서 지침이 될 선생을 찾았다. 나 역시 열심히 찾아 다녔다. 몸은 빼고 머리로만. 그렇게 대리 만족만 했다. 그래도 그게 하나의 큰 경향이었다. 특히 웰빙이니 귀농이니 마음 수련이니 하는 단어가 강아지 입에 물린 핸드폰 마냥 낯설지 않을 만큼 생태주의가 상업화된 2008년 대한민국에선 더욱더. 그래서 10년 전쯤부터 니어링이니 타샤 튜터 같은 사람들을 많이 찾았다. 소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싶었다. 아니 소로가 원조처럼 보였다. 니어링 부부나 타샤 투터보다 앞선 세대에 ‘월든’ 숲 속에서 생활했던 사람이니.
그래서 소로를 환경보호론자, 동식물연구가, 박물학자, 시인, 금욕주의자 등으로 묘사하기도 했단다. 근데 내가 좋아하는 이단자 박홍규가 이런 시각을 완전히 비틀며 소로에 대한 평전을 냈단다. 호기심. 나는 박홍규의 그 올바른 비틀기를 좋아하니까 당연히 읽어야지. 그래 놓고 책을 사긴 했는데 처박아 두었다. 몸이 안 따라줘서 그랬다.
방학을 하니까 그래도 여유가 생겨 이 책을 들었다. 역시 박홍규. 물론 오버 하는 느낌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소로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다가 온다.
박홍규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그동안 소로가 한국에는 너무 일면적으로 알려져 왔다는 것. <월든>만 많이 소개되고 <시민저항>은 별로 소개되지 않은 관계로 ‘자연’만 알려지고 그의 ‘저항’ 특히 폭력적 저항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려져도 그렇게 ‘생태주의 운동’과 ‘근원적 민주주의’적인 면만 주목을 받았을 뿐, 그의 반체제적 성향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로는 禪僧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한마디로 정의하면 ‘제멋대로 살기의 달인’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규정이다. 과격한 규정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것이 결코 헛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확실히 우린 지금까지 소로를 잘못 본 것 같다. 웰빙이니 자연이니 하는 시대 조류에 맞게 그를 요리해서 먹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는 성자이기는 커녕 반역자이고 성인이 아니라 무법자라는 것이다.
이러면 거부감이 드는가. 아니다. 나는 이런 규정이 좋다. 나의 성격 결함? 설마. 소로가 그때 그렇게 살았던 것은 당시 미국 사회가 완전히 ‘돈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 그 속의 이웃들은 ‘돈에 미쳐 싸우는 짐승’ 같았기 때문에 소로가 그렇게 그 틀을 벗어나 제멋대로 살았던 것이다. ‘돈에 미쳐’라는 대목은 2008년 한국사회를 닮았다. 그러니 땡기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세태에 소로는 미리부터 경고했다.
“생계를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인간만큼 치명적인 실패자는 없다”고. 맞는 말이다. 예전에 공선옥의 글에서 읽은 ‘생존 이상의 부에 연연해하지 말 것’과 상통한다. 예전엔 말로만 이해했는데 요즘은 제법 몸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살아질 것 같다.
그런 소로이건만 사람들은 그를 전원생활의 모범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고급 승용차에 골프채를 싣고 다니면서 경치 좋은 변두리에 별장 지어 놓고 사는 사람들까지 ‘소로’를 입에 올리고 있으니 박홍규가 열 받을 만도 했겠다.
책 마무리에서 그가 강조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고급 아파트, 고급 승용차, 골프, 별장, 성형수술, 고급 브랜드, 사치스러운 관광여행, 상업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중을 현혹하는 저급한 공연물 등 모든 천박한 사치와 허영 그리고 퇴폐를 당장 거부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등지고 시골이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다. 다만 그런 것들 가운데 일부를 갖고 가서 안락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은 위선이며 해악을 초래한다. 이 책의 결론은 간단하다. 모든 물질문명을 거부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물질문명의 지배를 받게 되지 않을 정도로는 그것을 거부해야 인간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유다. 돈이 많아야 자유가 아니라 그 돈을 추구하는 미친 풍토에서 벗어날 때 자유다. 그렇게 해서 다가간 자연이 진짜 자연이다. 이익을 만들어 내는 데에 활용하는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그건 인간이 저지른 야만에 이용되는 대상일 뿐이다.
아나키스트 박홍규. 예전에 그의 책에서 자유, 자연, 자치의 기치를 읽었다. 이번 소로 평전에서도 그 가치관이 녹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로를 왜곡했다. 은둔 성자처럼.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게 아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예전에 <월든>을 읽으며 의문스럽긴 했다. 그가 월든 숲에서 지낸 기간이 불과 2년이다. 그 2년 생활로 삶을 마친 게 아니다. 다시 도시에 와서 살았다. 근데 이 대목에서 황당한 건 그가 월든 생활로 영양실조에 걸렸고, 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얼마 뒤에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대목이다. 그렇게도 사람들이 칭송하는 월든 숲에서의 생활이 남긴 게 그런 것이었나. 암튼 2년 만에 그 숲 생활을 정리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무슨 은둔 성자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세상 더럽다고 생각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주러 잠시 숲 생활을 했을 뿐인 것 같다. 왜곡 과장하지 말지어다.
또한 내가 놀란 것은 <존 브라운 대장을 위한 변호>에 나온다는 그의 폭력저항에 대한 동의 부분이다. 흔히 간디도 이 소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소로가 폭력저항까지 옹호했다니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하긴 사람은 변한다. 처음엔 비폭력 저항을 내세우다가도 어떤 극한 상황에 대한 체험으로 그렇게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 그의 저항 방법은 불복종이다. 인두세 납부 거부였다.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 즉 정부가 그런 못된 짓을 하는 데 도움이 되게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쁜 곳에 쓰일 게 뻔한데도 세금을 내는 것은 어쩌면 공범이 된다는 논리다. 그러니 납세 거부. 참 마음에 든다. 나도 지금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못한다.
실제 그로 인해 투옥되기까지도 했다. 물론 친척이 세금을 대납하는 바람에 감옥 체험은 이틀 만에 끝났다고 하니 좀 싱겁긴 했다. 그런 그가 어떤 계기로 폭력저항에도 긍정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암튼 전반적으로 그는 그 사회의 이단아였음은 분명하다. 당시 기득권자들은 그를 심한 꼴통으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도 울림이 큰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박홍규가 비틀어 본 것 말고, 예전부터 소로를 논하던 관점도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발적 빈곤’을 주장한 점.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일을 적게 하는 정부’라는 주장.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는 말.
그렇다고 단순히 사회개혁운동가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는 제도의 완성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 즉 새로운 인간상의 창조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와 자유가 인간의 선량함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끝내는 승리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반은 공감하고 반은 부정하고 싶다. 제도 개선만으로 안 되는 것은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상 창조의 방법에 대해서는 일단 구체적이지 않으므로 보류 입장을 취하겠다.
그럼에도 그의 좌충우돌은 상당히 선구적인 작업이었음을 인정한다. 본받고 싶지만 나는 용기가 없어 그러지 못한다. 부럽다.
솔직히 이런 사람을 보면 요즘 나는 일단 그의 결혼 유무와 자식이 있나 없나부터 따지고 본다. 역시나. 그는 미혼이었다. 홀몸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이단아 짓기 가능했지 싶다.
그렇다고 그가 결혼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퇴짜를 맞은 경험도 있다. 암튼 이런 사람을 보면 그의 처지와 나의 처지가 다름을 일단 설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알갱이는 챙기고 싶다.
“생계 이상의 돈벌이에 연연하지 말고 자유인이 될 것. 그것은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을 것. 그 자연 역시 돈벌이와 관련 없이 자연 그대로의 자연일 것.” 그것을 방해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싸울 것. 하지만 그 싸움도 단순히 제도 개선이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
나도 숲에 들어가 살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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