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
쯔루다 시즈카 지음, 손성애 옮김 / 모색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쯔루다 시즈카, <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 모색, 2004.



방학이 확실히 좋다. 그 동안 허겁지겁 달리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많이 쉬고, 잘 먹고 그래서인가 건강도 많이 회복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한 건강 이상으로 내 삶이 많이 방만해져 있음을 느낀다.
세상이 온통 마몬(물신)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나 역시 그 물결에 쓸리고 말 것이다. 며칠 전 <한겨레>에 실린 도법 스님 인터뷰 기사가 인상에 남는다. 오랫 동안의 탁발 순례를 하고 나서 우리 사회를 보니, 온통 '전도미망'에 빠져 있더라는 말을 하셨다. 앞과 뒤과 거꾸로 선 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미망, 스님은 이 현상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질타하셨다. 그러면서도 연기론에 입각해 그 미망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자책하셨다. 우리시대의 큰 스님이시다.

그래도 스님 같은 분이 계시기에 나 역시 다시 추스린다. 요즘 부쩍 비채식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 건강을 이유로, 상황을 이유로, 생선류에 손을 많이 댔다. 물론 육식이야 여전히 멀리 했지만, 바닷고기는 상황을 핑계로 많이도 먹었다. 확실히 탁해졌다. 맑은 기운이 줄어들었다. 삶 자체가 흐릿해졌다. 다시 정돈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잡은 책이 <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을 정돈하고 싶었다.

베지테리안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 혹은 채식주의자와는 다르다. "1842년 베지테리안이라는 말은 라틴어 uesere(-에 생명을 주다)를 어원으로 해서 그것이 vegetus(활발한, 힘센)이 되고, vegetalis-vegetal(성장하다)로 변해서 만들어졌다. 베지테리안에 담긴 본 뜻은 인간의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우리들 마음의 건강과 동.식물에 대한 사랑과 공존으로, 나아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지구 차원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식생활에서 육식-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 식문화-을 거부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베지테리안이다."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차별과 불평등과 굶주림을 조장하는 식문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이 베지테리안이다.

이 책에 의하면 베지테리안과 페미니스트, 아나키스트, 생태주의자 들간에는 상호 관련성이 많다고 한다. 느낌만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게 중에는 전혀 다른 성향을 보인 사람도 적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이 들 중 하나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다른 이념에도 친숙해질 것 같다. 나 역시 위의 네가지 사상을 공유하려고 한다.

반면 육식은 필연적으로 폭력, 전쟁, 탐욕으로 연결된다. 원시시대 사냥을 위주로 하던 남성이 이후 가부장 폭력으로 권력화한 것부터가 그렇다. 실제 육식을 즐겨하는 사람들의 성격이 훨씬 거칠다. 미국 애들 보면 그대로 보인다.
물론 서구사회가 요즘은 베지테리안이 생활하기에 더 좋긴 하다. 다양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사회라 그렇다. 그리고 서구인들의 채식이 반드시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온 게 아니다. 그들도 나름의 전통이 있었다.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부터 아주 길게 그 맥이 이어져 있다. 실제 영국만 해도 전체 인구의 10% 가량이 베지테리안이라고 한다.

일본이나 한국은 근대 사회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어쩔 수 없는 베지테리안이었다. 그러나 서구화의 영향으로 강한 것은 서구, 서구는 육식, 이런 논리에 따라 열심히 고기를 섬겼다. 이제 돌아갈 때도 되었다.

책에는 유명한 베지테리안들의 일화가 많다. 톨스토이, 그는 고기를 '시체'라고 불렀다. 동생들이 고기를 좋아하자 하루는 식탁 다리에 살아있는 가금류를 묶어 놓고, 식탁 위에는 칼을 놓아 두었다고 한다. 직접 잡아서 먹으라는 의도였다. 이 방법은 아주 직접적인 것이다.

실제 우리는 '고기'와 '시체'를 너무도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한 가지다. "예전에 이 고기에 생명이 머물렀지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다. 우리들 눈 앞에서 팔리고 있는 고기는 이미 조리된 제품에 불과할 뿐, 동물의 육체를 보여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목장이 아닌 공장 한구석에는 사육장에 수용할 수 있는 최대수의 동물을 넣어 기른다. 단기간에 살을 찌우는 약품을 첨가한 인공 사료를 먹이고 컨베이어벨트에 태워 눈깜짝할 사이에 대량의 진공팩으로 상품 포장이 완성된다."

일본의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이 직접 닭을 잡아 요리를 하고 먹는 방식의 교육을 했다고 한다. 교육 후 학생들의 소감문 중에는 "왜 사람을 죽이면 형무소에 가고, 닭을 죽이면 왜 형무소에 가지 않는 것일까"라는 내용도 있었다. 왜 그럴까?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당연한 이치를 왜 어른들은 못깨닫는 것일까? 직접 닭을 죽여 보면 훤히 들어오는 이치인데.

그건 자신이 직접 도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도축하는 것을 보았거나(이것만으로도 베지테리안이 되어야 할 계기는 충분하지만), 혹은 그것마저 가려진 채, 시체가 아닌 고기라는 음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불살생. 이건 직접 내 손으로 죽이지 않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간접 살상에 동참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다. '자기 손으로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것과 타인이 하는 것을 보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베지테리안이라고 해서 무조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경우에 따라서 먹긴 한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먹지는 않는다. 생명을 존중하고 때문에 기도를 하고 꼭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그들이 평소 육식을 금하는 것은 고기가 불결하기 때문이 아니다. 고기는 신성하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즉 연민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지, 고기가 더럽다는 생각, 불결하다 등의 생각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즉 내가 고기를 먹은 만큼 그 고기의 생명은 내 안에서 살아 숨쉬게 되고 나 역시 죽어 또 다른 생물의 식량이 된다. 그러면서 나 역시 죽지 않고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생명을 존중하며, 내가 다른 생물의 에너지로 전환되면서, 그렇게 생태계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러기에 당연히 베지테리안이 육식을 할 때는 반드시 동물에 대한 감사와 영혼의 윤회를 기도하는 의식을 치른다. 버팔로를 신으로 모시며 사냥을 했던 인디언과 심심풀이로 총질을 해댔던 백인과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채식을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육식을 할 경우 한 사람이 먹을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양의 사료가 필요하다. 그 사료를 키우는 토지면적은 10인의 식량을 키우는 면적과 똑 같다. 즉 채식을 하면 같은 면적에서 10명이 먹을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도, 빈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채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환경운동가들, 생태운동가들은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베지테리안이 되어야 한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세계는 만들어진다. 계속 톨스토이의 이야기. 그는 "인류의 협동과 연대를 향한 영혼의 동경을 사랑이라 부르고 이 사랑을 삶의 법칙으로 삼은 자세를 가리켜 무저항주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이은 사람이 바로 간디라고 한다.

그 간디의 이야기. "평화로의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이매진>이라는 노래를 부른 존 레논, 이 역시 베지테리안이다. 아나키스트이기도 하고. "천국도 지옥도 국경도 없고, 죽이는 일도 죽는 일도 종교도 없고, 소유도 탐욕도 굶주림도 없이 사람들이 평화롭게 형제자매의 인연으로 이어진 하나의 세계" 그가 꿈꾼 세계이다.

힘이 들어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직접 노동을 하고, 그렇게 말이다. 귀족 톨스토이도 노동을 했다. 밭을 갈았다. 글도 쓰고. "글을 쓰는 창작과 밭을 가는 농경은 매우 유사한 일이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작물을 키우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창작이든 농경이든 수확을 거두는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이다. 펜을 쟁기로, 쟁기를 펜으로 구사하며 살아간 사람들은 세상에 무수히 많다. 톨스토이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나도 그 중 하나가 되고 싶다. 빠른 시간 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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