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 그리고 분단체제 뛰어넘기 새사연 신서 1
김문주.김병권.박세길.손석춘.정명수.정희용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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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성 의심되는 ‘새로운 상상력’

김문주 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시대의 창, 2006.



시간이 많이 지났다. 김문주라는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소식을 들은 게. 솔직히 좀 의아했다. 나를 만나서 뭘 할라고. 그의 경력 또한 특이했다. 그 시대, 같은 삶을 살았다. 물론 그는 나보다 선배였고 열렬하게 살았던 사람이라 한다. 그러고 시대가 바뀌어 그는 한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이렇게 어쩌면 더욱 진보가 필요해진 시점에 새로운 깃발을 올린 사람.
물론 그 혼자만이 아니다. 대표는 손석춘이다. 한겨레 칼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칼럼니스트. 그의 문체를 많이 배우고자 했다. 짧고 강단진 그의 문체. 도치법의 적절한 사용으로 힘을 주는 그의 글. 내가 많이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가담했다. 이 책의 구성에. 아니 그 이전에 이 책을 나오게 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그리고 그 연구원을 만든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 그런 사람들이 모인 그룹이다.
그런 만큼 기대가 컸다. 그런데, 내가 타락해버린 것인지, 그 분들이 현실감을 잃은 것인지 너무도 막연한 이야기를 신나게 해대는 것 같다. 물론 죄송스런 표현이다.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해댈 언사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읽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비전에 대해선 쉽게 공감하지 못하겠다. 심하게 말하면 꿈꾸는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젠 완전히 현실 속에 포섭당해 버린 것일지도 몰라.
그래도 그 취지에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면서도 바짝 가까이 다가가질 못하겠다. 그랬기에 올 1월의 만남 무산도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만나봐야 내가 그 분들께 드릴 내용이 없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것을 오늘 다시 꺼냈다. 언제부터인가 제주도에서도 민간 싱크 탱크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서다. 이석문 선배였다.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은. 그러나 나는 지극히 회의적인 답변을 보냈다. 물론 일이 추진된다면 미력하나만 돕겠다.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설혹 그런 연구소를 만든다 해도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고 힘 빼는 이야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준비해 보고 싶어 이 책을 잡았던 것이다. 중앙의 경험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읽어 본 결과는, 이거 쉬운 일 아니다. 자칫하면 뜬 구름 잡다가 허망하게 끝날 수 있겠다 싶었다. 점점 아득해 진다. 가슴만 시커멓게 답답해 온다. 정녕 진보의 길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로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이분들의 주장을 아주 간략히 줄이면 이렇다. 자본, 주주 중심의 경제가 아니라 ‘노동중심 국민경제’, 분단을 이겨낼 ‘통일민족경제’, 그리고 대의제를 넘어서 ‘직접민주주의’.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노동중심 국민경제. 자본주의다. 착각하면 안 된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 중에서도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다. 종업원주주제도 못하는 마당에 노동중심 경제라. 함께 꿈을 꾸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정도 나름 아니겠나. 저자들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 역전을 말하고 있다. 정말 꿈같은 얘기다.
통일민족경제 역시 그렇다. 물론 이 부분은 자본을 설득하면서 왜곡되게라도 시도해 볼 만하다. 이분들이 말하는 목표에 초점을 둔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남한 혹은 미국자본에 득이 좀 되더라도 한반도에 긴장을 걷어낼 수단이 된다면 이분들이 말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도 통일민족경제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것조차도 어렵다.
직접민주주의. 어쩌면 이걸 가장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고 또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불안하다. 직접민주주의가 되어도 백성들의 자본지향, 금전지향 심성이 다른 가치들을 압도하는데, 조중동이 시퍼렇게 살아 눈뜨고 민의를 왜곡하는데, 직접민주주의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이분들을 도울 수는 있어도 함께 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분들의 열정에 경의와 존경을 표한다. 특히 손석춘의 살아있는 글빨에는 여전히 감동한다.
“새로운 사회의 새 싹을 아름드리나무로 키우는 일,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과 그 아름다운 숙제를 함께 풀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충분히 공감한다. 나 역시 새로운 사회의 새 싹을 아름드리나무로 키우고 싶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숙제를 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미래는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더욱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인가. 몇 년 전부터 주목하는 간디의 삶과 사상이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욕망의 조절, 자발적 가난, 소비의 최소화, 아나키 공동체, 오히려 나는 이 쪽에서 ‘새로운 사회’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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