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생활사 2 조선시대 생활사 2
한국고문서학회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시대 삶과 죽음의 의례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생활사2>, 역사비평사, 2000.



생활사에 대한 주목이 이미 오래되었다. 이 책의 1편을 읽은 지도 제법 되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배운 것은 많았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2편 역시 그러하다. 이번엔 특히 죽음과 관련된 의례를 관심 있게 읽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다.
생활사를 연구하는 고문서로 많이 읽히는 텍스트가 무엇인지도 엿봤다. 나는 읽어본 적이 없는 책이다. 오희문의 <쇄비록>, 유희춘의 <미암일기>, 이문건의 <묵재일기>, <양아록> 등이다. 이 중에 특히 이 책엔 이문건의 <묵재일기>가 많이 활용되었다. 처음 듣는 사람인데, 최근 언론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문건의 무모 묘소에 세워진 비갈인데, 그 비 옆에 한글로 비석의 훼손을 금하는 문구를 새겨 놓은 게 보도되었다.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이라는 것이다. 1535년 무렵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런 이문건을 나만 몰랐던 것 같다. 실력과 기회가 되지 않기에.
먼저 3년 상 이야길 보자.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는 날까지 상을 치르는 것으로 만으로 따지면 2년이다. 근데 대상 이후 다시 담제 즉 상복을 벗는 의식까지 하고 탈상하므로 실제는 만 26개월이 된다. 3년 상의 근거는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비로소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생존할 수 있다는 논리에 있다.
상례 절차에서 습이라는 게 있다. 흔희 염습이라고 한꺼번에 부르는데 사실은 다르다. 습은 기존에 부모가 입었던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행위다. 소렴은 그 시신을 다시 싸는 행위다. 첫째 날 습하고 둘째 날 소렴한다. 물론 지금은 간소화되어 한꺼번에 한다. 이때까지 시신의 얼굴은 덮지 않고 전신을 묶지도 않는다. 혹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셋째 날에 대렴을 한다. 시신을 묶고 얼굴을 가린 이후에 입관하는 절차다. 입관 후에 빈을 설치한다. 빈소라는 말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빈소를 차리기 전 즉 입관 전까지는 빈소가 아니라 영좌만 마련된다.
성복은 부계 8촌까지다. 매장 후 봉분을 마련하면 우제를 지낸다. 우(虞)는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초우, 재우, 삼우로 세 번 지낸다. 우제 후에는 졸곡제를 한다. 곡을 끝내는 것이다. 그 후 13개월째가 되면 소상, 25개월째가 되면 대상, 27개월째가 되면 담제를 지낸다. 담제 이후가 탈상이다.
사극에 간혹 나오는 시묘 살이, 근데 이건 <경국대전>에도 <주자가례>에도 없다. 근데도 한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묘 곁에서 여막을 짓고 그를 추모했던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몽주가 3년 여막 살이 한 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근데 시묘 살이 중에도 외출할 건 다했다. 오히려 저작과 공부의 시간이기도 했다. 다만 육식 금기 등은 있었던 모양이다.
제사도 우리는 흔히 4대 봉사를 말한다. 그러나 <경국대전>엔 3대 봉사다. 이것을 이황의 제자들이 중국 <주자가례>를 내세우며 4대 봉사로 바꿨다는 것이다. 국법 <경국대전>은 6품 이상 3대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인은 부모만 지내게 되어 있다.
근데 조선초기에는 자녀 구분 없이 윤회 봉사였다. 율곡 이이가 외가인 신씨 집안의 제사를 받들었다는 것이 잘 안 알려져 있는데, 이는 대표적인 예이겠다. 물론 조선 후기였다면 외손이 봉사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신씨 집에 양자를 들여 해결했을 것이다. 노비의 경우엔 35일 째 혹은 49일 째 무당을 부러 재를 지낸 경우가 보인다.
결혼에서도 전기와 후기가 다르다. 전기엔 양반집 여성도 3번이나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민의 경우는 성이 문란할 정도로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18세기가 되면 열녀 문화가 강화된다. 열녀로 보고 되는 숫자가 급증하여 신중하게 심사할 필요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18세기가 그런 시대임을 알고 도내에 널려있는 열녀비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엔 ‘재가녀 자손 금고법’ 즉 재가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관직에도 나갈 수 없는 제도가 있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앞길 막길 좋아했겠는가. 지독한 장치가 있어서 여성의 재혼은 통제했다.
고문서를 통해 당시 물가 동향 등 경제 문제를 보는 시도가 참신했다. 다만 나는 그 글을 읽어도 잘 들어오지가 않았다. 경제는 확실히 어렵다. 근데 양반들이 관청의 재화를 마음껏 가져다 쓰는 대목에선 많이 놀랐다. 지방관이 그 지역에 있는 양반에게 수시로 관청의 재화를 선물했던 것이다. 필요한 경우 요청하면 계속 내주는 것 같았다. 때로는 유배 온 사람에게까지 관청의 물건을 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과 사의 구분이 없는 관행이 그 때 있었던 모양이다.
세시풍속에서 입춘 때 나무소를 만드는 풍속이 관북지방에도 있었다고 한다. 제주도의 입춘굿에 등장하는 ‘낭쉐’는 제주도만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동국세시기>에 나와 있다. 영등도 그렇다. 영남지방 풍속에 영등이 등장한다. 역시 <동국세시기>에 근거한다. 역시 그 책에 따르면 제주도에선 매년 8월 보름에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좌우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날 그네도 뛰고, 닭잡기 놀이도 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