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덕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웅진닷컴, 2001.




삶이 많이 바뀌었다. 운동, 사회개혁 등이 언제나 내 삶의 화두였고, 또 그러했기에 삶의 긴장을 늘 의식하며 살았다. 근데 요즘은 많이 느슨해졌다. 성숙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해보지만 그건 솔직하지 못한 변명이다.

물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화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변화가 진정한 성숙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가? 글쎄, 자신이 없다. 나름의 모색은 한다. 사상적으로도 그렇다. 몇 년 전부터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언제가 치열하게 이 사상을 연구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 연구는 삶과 괴리되어선 안 된다. 아직은 막연하다. 그러나 자연스레 그 흐름으로 간다.

그건 내가 하고 있은 요가 수련과도 그리고 생태적 삶과도 연결되는 사상이다. 그래서 이 방면의 책을 구해 두고 있다. 그 중 이번에 읽은 책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시 일찍부터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했을 땐 이미 절판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예스24가 아닌 다른 서점에서 재고를 발견했다. 주저 없이 구입했다. 그리곤 읽은 것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이유 때문에 이 책은 나를 끈다. 글쓴 이덕일, 그도 나를 잡아 끄는 요인이다. 그를 보면 항상 부럽다. 엄청난 다작이다. 게다가 그는 굳이 학벌이나 대학에 연연하지 않는다. 빵빵한 실력 그것으로 한국역사학계를 주름잡는다. 물론 기성의 학계에서야 외면하겠지만 대중서로서 그 만큼 영향력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분야도 넓다. 고대사에서 항일시대까지, 그의 발걸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니 부러울 수밖에. 나 역시 기성 학계를 불신한다. 그리고 대중성을 지향하면서 향토사 작업을 해 왔다. 그러나 제주지역은 너무 좁다. 그래서 제한적이다. 물론 그것이 나의 연구를 막을 핑계는 못 된다. 다만 내가 의기소침하기 쉬운 악조건일 뿐, 일을 그만 둘 필연적 요소는 아니다. 언제 내가 남의 눈 때문에 공부하고 안 했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해야 한다는 당위까지 있어서 하는 일이다. 다만 게으르고 능력이 한계가 많아서 그럴 뿐이다. 게다가 밥벌이까지 같이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적다는 게 문제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느낌이 참 좋다. 저자 이덕일에 대한 부러움이야 이 정도에서 접고, 아니 한 마디 하고 갈 건 있다. 그가 아무리 대학 강단에서 소외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세상이 원망스럽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이 걷지 말아야 할 길을 걷고 있는 건 문제다. 그는 줄기차게 조선일보에 글을 써댄다. 물론 그의 상품 가치를 알고 있는 조선일보가 그를 끌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건 존경받을 지식인의 모습은 아니다. 지식 장사꾼인 건 맞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타산지석....

먼저, 이회영. 항일운동 공부할 때 조금은 알았던 인물이다. 경북의 대 부호였는데, 모든 재산을 팔고 그것을 가지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물, 그래서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보여줬던 인물, 그리고 그 후손 중에 이종찬이가 있다는 정도. 그게 내가 지금까지 그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다. 그가 아나키스트였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고, 또한 나에게 있어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나 역시 요즘은 아나키즘에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근데 그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항일운동을 하면서 나중엔, 먹을 것이 없어서 집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는 대목을 읽을 땐 참, 가슴이 많이 아팠다. 우린 어느 정도 생활이 될 땐 이상적 삶을 고민하다가도 막상 경제적 궁핍이 다가오면 지극히 현실적인 자세로 돌아서지 않는가. 항산이라야 항심이라는 맹자의 말씀을 핑계 대면서.

근데 그는 달랐다. 그런 어려운 생활도 이겨냈을 뿐 아니라 67세 경찰서 취조실에서 고문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항일운동의 끈을 놓아보지 않았다. 요즘처럼 내가 이리저리 삶의 방향을 기웃거리는 처지에선 그런 그의 일관된 삶을 보며 머리를 절로 숙인다.

아나키즘, 사람들은 이 사상을 잘 모른다. 좌우 대립이 심했던 우리 역사에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그 사상이 쉽게 서 있긴 힘들었다. 남과 북 모두에게서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남과 북의 약점을 모두 보완할 수 있는 사상임을 말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철저히 반대한다. 경제적으로는 분명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 실현을 위해선 당의 주도하는 공산주의적 해결방식엔 반대한다. 철저한 자유, 자치, 연대의 기치만이 이것을 보장할 것이라는 논리다. 예전에 프루동이 <빈곤의 철학>을 썼을 때 맑스가 이를 비판하며 <철학의 빈곤>을 썼고, 그것을 대충 본 나로서는 맑스가 옳다고 여겼다. 당이 있어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을 엎어버리고 우리의 권력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 소위 386이 적지 않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저으기 실망스럽다. 근데 그건 비단 그들의 인품 때문이 아니다. 권력이라는 것 자체의 속성 때문이다.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같은 사람들이 이미 스탈린 독재를 예언했던 것 역시 마찬 가지다. 그들에게 무슨 예언적 기질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공산주의 이론에 있는 당 주도, 그 자체에 이미 그런 함정이 있음을 빨리 알아차렸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저자 이덕일은 "만약 그 열정에 휩싸였던 80년대의 주도적 사상이 맑스 레닌주의나 김일성주의가 아니라 아나키즘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실현 가능성이야 적은 이야기겠지만 그 마음엔 공감한다.

아나키즘은 '그 누구로부터도 억압당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사상이다. 그런데 1902년 당시 도쿄대학생이던 게무리야마 센이치로가 그걸 '무정부주의'로 번역한 이래, 많은 오해 속에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 대책 없는 파괴적 뉘앙스 때문에 사실 동북아 아나키즘 운동이 많은 제약을 받아왔던 게 사실이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렇다. 자본제적 착취에 철저히 반대한다. 그러나 그 반대를 위해 강력한 당이나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대일 뿐이다. 상호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크로포트킨의 사상이다. 그랬기에 이회영이, 신채호가 이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 동안 이런 내용은 너무도 알려져 오지 않았다.

이 책에서 다가오던 또 하나의 테마는 지사들의 삶이다. 물론 당시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지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과감히 내던졌겠지만, 그래도 그런 삶이 희화화되는 요즘 세태 속에선 다시 내 마음을 긴장케 한다. 단순한 명분이나 정당성,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절실한 삶의 자세에서 나온 자기 희생, 이런 것은 요즘처럼 경박한 세태일수록 더욱 강조되어야 할 대목이다.

이광수가 신채호를 평했다는 대목, "단재는 언제나 칼날 같은 의지와 절개로 뭉쳐진 사람으로 시인적 여유조차 아니 가진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신채호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재산인 입고 있는 옷마저도 혁명 동지의 자녀들에게 벗어줬음을 언급하며, 신채호는 시인적 여유는 없었을지언정 혁명가의 여유는 넘쳐 흘렀다고 썼다. 적절한 지적이다.

상해를 점령했던 일제가 반전의 사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상당한 유혹을 제시하며 반전운동을 요구하자. 상해 아나키스트 책임자였던 정화암은 "전쟁이 싫으면 일본놈들이 보따리 싸들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그만 아니오. 반전운동이 우리 이념에 맞으니 하긴 해야지요. 그러나 반전운동은 중국에 있는 우리가 아닌 일본에 있는 일본 아나키스트들이 해야 합니다"라고 아주 정확히 답변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어정쩡한 타협을 요구하는 주변 사람들을 떠올린다. 죄를 지은 사람을 탓하지 않고, 그 놈의 실체는 그대로 기정사실화한 채, 피해자의 변신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한미 FTA협상도 마찬가지다. 도둑은 미국이다. 그들에게 우린 항의해야 하지 우리 농민에게 변신하라고 요구할 게 아니다.
또한 중동의 테러범을 비난할 게 아니라 그런 테러를 유발하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책을 닫으면서 어정쩡한 양비론을 다시금 경계한다.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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