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3. 30. 수

열 번째 질문 :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10-1. 자신의 성격에 스타일을 부여하라>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도 했지만 ˝자기를 극복하라˝라고도 하였다. ‘그대 자신‘과 ‘자기‘는 서로 다른 말이다.
‘그대 자신‘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이 아니라 ‘자신의 성격과 소질 등을 승화시킨 참된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고, ‘자기‘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에 영합하려는 거짓된 자신을 말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이 되려면 거짓된 자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사람‘이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하면서 자신을 일정한 방향으로 길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을 니체는 초인 내지 고귀한 자라고 일컬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나 자신이 겪은 고통과 고난까지도 자기발전의 계기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니체는 아름다움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0-2. 본능이 건강한 사람이 되는 법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신체를 엄격하게 단련하고 훈육해야 우리의 영혼이 강해지고 힘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신체를 완전히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본능까지 건강하고 기품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런 건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경쾌하고 가벼우며 필연적이고 자유롭게 건강한 행동을 하게 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동은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에서 필연적으로 경쾌하게 따라 나오는 행동이다.

10-3. 보고, 생각하고, 쓰는 법을 배워라

니체는 고귀한 인간이 되는 데 누군가와 교유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고귀한 인간이 되려면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 그리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보는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반응을 자제하면서 결정을 유예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생각하고 쓰는 법은 사물들이 갖는 섬세한 뉘앙스를 느끼면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우려면 단순히 지식만 쌓는게 아니라 그 당시의 상황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 챕터는 어쩌면 지금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한다. sns의 발전으로 인해 나 자신이 남들에게 노출되기 쉽고 남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접하기 쉬워지면서 그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나같은 경우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양의 정보 속에서 우리는 점점 판단력을 잃어가기도 한다.
이것에 대해서 혼자 생각했던 것이 있는데 이번 챕터를 읽으며 생각이 많이 났다.

한때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 스스로 생각했을 때 나는 너무 특색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감도 지금보다 더 없었었고. 예전에는 마냥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비슷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따라한 나‘일 뿐이었고,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어색할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은 나름 빨리 버렸었다. 그 후에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내 성격은 어떨까‘ 등등의 생각을 많이 해왔다. 예전에는 생각하다가도 말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있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이 많이 나아지긴 했다. 그리고 전에는 특색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오히려 지금은 그 특색이 없는 것을 단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어느 환경에서나 녹아들 수 있는 것으로 조금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색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전에는 마냥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걸 요즘은 그대로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이 점은 뿌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말하는 건강한 사람이 되기에는 아주 많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나는 몸을 단련하는 것을 매우매무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장을 읽으며 솔직히 많이 찔렸다. ‘마냥 힘들다고 눕지 말아라‘ 라는 구절이 있었는데(물리적이든 상징적 의미이든) 너무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힘들면 10분만, 10분만 하다가 몇시간 훌쩍 지나가버리는 내 모습이 많이 스쳐지나갔다.... 읽으면서 아 맞아맞아 하고 공감은 갔지만 너무 찔리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나는 어느정도 믿는다. 예전에 내가 재밌게 하던 운동인 스피닝 생각이 났다. 물론 그때 귀찮기도 했고 좀 늦장 부리기도 했지만 꾸준히 가면서 몸에 살이 빠지기도 했고 운동 후 샤워하면서 개운해진 것을 생각하면 건강한 본능을 가지기 위해 신체를 단련한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아마 니체는 그런 단순한 것을 넘어서서 신체를 단련하면서 하는 정신적 수행이나 올바른 생활습관들이 따라오면서 건강한 본능이 생긴다는 뜻 같긴 하지만 말이다.

세번째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요즘 시대의 인터넷이 생각났다. 정말 인터넷이 또다른 하나의 세계라고 할 정도로 아주 방대해졌다. 그에 따라 커뮤니티나 기사나 동영상이나 우리가 정보를 얻기 위해 다가갈 수 있는 경로는 너무너무 많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유독 극단적인 사상가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서 인터넷을 할 때에는 정말 주의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래서 요즘에는 니체가 말한대로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제하면서 결정을 내리려고는 한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지만... 난 내가 예전에 했던 잘못된 판단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어쩌면 우리가 자주 얘기했던 ‘무엇인가를 배울때 한 가지 사상에 집착하지 않고 중용을 지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려면 오히려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중요하고 선택된 품행을 엄격하게 견지하는 것, ‘자신을 되는대로 방치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키는 것, 이것들만으로 중요하고 선택된 인물이 되기에 완전히 충분하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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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질문 :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9-1. 나만의 개성을 만드는 법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태어날 때 자신의 의지가 아닌 우주적인 의지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타고난 성격대로 행동한다.
니체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세계는 무수한 개별적인 힘에의 의지들로 이루어져 있되, 그 힘에의 의지들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니체는 우리의 타고난 성격과 소질에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9-2. 남의 시선에 사로잡힌 노예가 될 것인가

니체는 그리스도교와 더불어 플라톤 이래의 이원론적인 철학은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철저히 부정하는 금욕주의자로 만들려 노력했다고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고 인간을 획일화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고대 시대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어떠한 틀에 사람들을 맞추기를 원한다. 이 현상에 대해 니체는 우리가 사람들의 다양함을 이해하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성격과 적성 그리고 환경 등을 잘 고려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9-3. 권태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신호

니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우리 내면에는 우리를 고양시키고 강화시키려는 힘에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으니 그것에서 비롯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철학에 집중하고 싶었던 니체는 35세의 나이에 일으킨 병을 자신 속의 참된 자아가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잘못된 삶에 대해서 보인 건강한 반응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그때마다의 삶의 단계에 안주하지 말고 힘에의 의지가 명하는 대로 그 단계를 미련 없이 명량하게 뛰어 넘어야 한다.


이번 챕터를 읽기 전에 조금 두근거렸다. 나는 ˝나다운 것˝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만의 개성, 생각, 가치관 등을 가지고 있고그런 다양성을 좋아하기 때문이다.(그것이 니체나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나의 자유의지인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이 있기에 세상이 재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챕터에서 ˝나답게 사는 것˝을 어떻게 알려줄까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챕터 중에서 니체의 말이 구체적이지 않고 어떻게 보면 교과서적인 답인 ˝너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였다. 솔직히 조금 실망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준이 있고, 성과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나답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와닿기도 했다. 그리고 저 말이 솔직히 정답이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솔직하게 마주한 뒤에는 그것을 실천하는 용기, 자신감. 알고 있는데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권태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신호˝라는 말이 와닿았다. 사실 난 변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편하고 익숙한 걸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싫냐고 물어본다면 아니지만, 가끔은 너무 정체되어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허무감도 솔직히 들지만 무엇인가에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이러는 것도 있다. 근데 저 챕터의 제목이 조금 나를 저격해서 하는 말로 들려서 혼자 찔렸다. 어쩌면 내가 ˝도전˝이라는 단어를 너무 활동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렇기에 도전이라는 것에 대해 부담감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도 할 수 있는 소소한 도전 같은 것들이 있을까 예전에 해본 걸로는 아침 일찍 일어나보기였다. 남들이 듣기에는 저게 뭐야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꽤나 큰 도전이었다. 솔직히 계속 잘 지키지는 않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다고 몸소 느끼니 그래도 이따끔씩 일찍 일어나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 너무 소소할 수도 있지만 이걸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혹시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나다운 말은 뭔가요?
참고로 나는 ‘무던함‘이다. 그냥 저냥 어디에서도 튀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어디에도 어울릴 수 있고 적응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다.

‘사나이가 되어라! 그리하여 나를 따르지 말고 너 자신을 따르라! 너 자신을!‘ 우리의 삶도 우리 스스로에 대해 권리를 지녀야 마땅하다! 우리도 또한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순진무구한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성장하고 꽃을 피워야 한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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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3. 17. 목요일
여덟번째 질문 :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8-1. 죽음, 나를 성숙시키는 최고의 기회
자살은 흔히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니체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자살은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대의 승리일 수 있고,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의 긍정일 수 있다고 본다. 니체가 말하는 ‘품위 있는 자살‘은 다음과 같다.

˝더 이상 긍지를 갖고 살 수 없을 때 당당하게 죽는 것.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자식들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명료한 의식을 갖고 기뻐하면서 적시에 이루어지는 죽음, 그리하여 떠나는 자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 가능한 죽음, 또한 생전에 성취한 것과 원했던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삶에 대한 총 결산이 가능한 죽음.˝

니체는 인간에게는 자신을 고양시키고 강화하시키고 싶은 충동이 있는 존재로 여겼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가장 큰 저항감을 느끼는 대상이지만 이를 냉철한 의식을 가지고
받아들일 때 자신의 힘이 고양됨을 느낀다. 오히려 죽음이 피해야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숙과 강화를 위한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8-2. 연민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보통 우리 주위에서 보는 자살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삶이 비참해서 죽음을 마지막 탈출구로 여기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패배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패배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자살한 사람들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니체는 연민을 비판했다. 어떤 사람을 연민하는 것은 그 사람을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그 사람을
나약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연민을 받는 사람이 느끼고 있을 무력감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8-3. 자유롭고 자각적인 죽음을 택하라
따라서 니체는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병든 인간과 건강한
인간의 구별을 했는데 이의 기준은 죽음에 임한 사람들에게 회개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의연하게 맞을 것, 자신의 정신력을 최고도로 고양시킬 것을 요구한다.
삶에 대한 원한 때문에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삶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병약한 인간들이었기에 자유로운 자살이 아니라 자포자기에 의한 자살이다.

솔직히 초반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계속 읽어 보니 정말 흔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죽음을 택한다는 것이 마냥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죽음이 두려운 이유에 대해 저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죽게 되는 이유는 보통 병(육체적, 정신적)이죠. 이러한 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오고(우리가 원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더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을 앗아간다. 어쩌면 누릴 수 있었던 좋은 것들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자살은 오히려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겼기에, 이제 더 이상은 누릴 행복이 없다고 생각해서 혹은 누릴 수 있는 행복마저 더 이상 누리지 않겠다고 본인이 ‘선택‘했기 때문에 슬픈 죽음이 아닐 것이다.

계속해서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만 나는 이 챕터를 읽으며 오히려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니체가 말하는 죽음이 슬프지 않은 이유는 삶을 충분히 살아왔기에, 삶에서 자신을 고양시키고 발전시켰기에(충실하게 살아갔기에) 죽음이라는 마지막 문턱도 자신을 고양시키는 계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계기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살아있을 적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자유로운 죽음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난 솔직히 아직 젊어서 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이따끔씩 주위 사람들의 죽음은 언제나 슬펐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별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 주위 사람이 자유로운 죽음을 택해도 그럴까? 솔직히 궁금하긴 하다. 죽음이란 것 자체는 슬프지 않다. 남은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 혹시나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슬픈 것 같다. 그런데 니체의 말대로 자신의 죽음을 택한다면 저 이유가 줄어들 것 같긴 하다. 나도 나중에 저런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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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닝 2022-03-20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네...죽음이 성숙과 강화를 위한 계기가 된다니...읽으면서 든 니체가 말하는 죽음은 뭐랄까 환희에 찬 죽음 느낌이다. 최대의 저항에 맞서는 순간이니 얼마나 짜릿하겠어. 근데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자칫 죽음의 무게를 가볍게 여길 수도 있겠네. 순간 댓글 쓰면서 죽음에 가슴이 뛰어버렸거든! 놀랐어...중도를 지키자...이래서 니체가 위험한 거구나
그래서 난 예슈리의 해석이 되게 멋진 해석이라 생각해. 역설적으로 삶을 더 충실히 살아가게 하는 메시지라니. 죽음이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가져오고 더 삶을 충실히 사는 데 집중하면 좋겠당
잘 읽었어🤓
 

2022. 03. 11. 금

일곱번째 질문 : ˝왜 인생이 자꾸만 허무하게 느껴질까?˝

7-1. 과학적 지식은 생존에 필요한 정보에 불과하다.

현대 사회에서 진화론은 인간의 존재 의의를 넘어서 윤리, 정서 등을 설명하는
기초적 이론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사실 진화론은 이 세계는 아무 의미나 목적도 없이
인간에게 생존과 종족보존을 위한 온갖 노고를 강요하는 곳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진화론을 진지하게 믿게 된다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7-2. 예술을 통해 삶은 충만해진다.

니체는 과학이 제시하는 것은 세계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라고 보았다.
과학은 사물들 사이의 외적인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사물들을 고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활동은 단순히 물리화학적 작용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시키려는 욕망에 따라 규정된다고 니체는 보았다.
인간의 삶에 충만함을 부여할 수 있는 건 예술 뿐이라고 보았다. 니체는 예술가가 건강한 힘으로 충일해 있는 상태를 ‘도취‘라고 일컬었다.
니체는 도취에 대해 여러 정의를 내렸고, 도취에서 본질적인 것은 힘 내지 생명력의 상승관 충만의 느낌으로 보았다.
예술을 하는 자는 이에서 비롯되고, 예술을 경험하는 자는 이런 느낌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느낌에 빠질 때 우리는 사물들을 아름답다고 여기게 된다.

7-3. 인생을 예술로 만들어라

니체는 인간이 그때마다의 힘의 상태에 따라 사물과 세계를 달리 보게 된다고 생각했다. 병약한 인간은 사물과 세계를 빈약하고 추하게, 건강한 인간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물과 세계를 보는 시각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들이지만
이 사물들은 우리의 힘을 반영하기 때문에 사물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사실, 사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자신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오직 인간만이 아름답다‘라고 여기며, 이것이 미학의 제1의 진리로 보았다.
니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우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기쁨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니체는 비극을 삶에 대한 환멸과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주장에 반대했다. 비극적인 영웅은 고난과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힘 때문에
오히려 고난과 고통을 찾아다니고 그런 것들에도 굴하지 않고 생을 흔쾌하게 긍정하는 자이다. 따라서 니체는 비극적 예술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가공한 것(무서운 것, 두려운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 두려움이 없는 고귀한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종교가 오늘날 과학의 공격에 의해 무력해졌다고 본 니체는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는 아니어도 삶의 예술가는 될 수 있다고 한다. 삶의 예술가는 매 순간 도취라는 고양된 기분 속에서 삶과 세계를 아름답고 충만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니체는 생을 긍정할 수 있는 길을 궁극적으로 예술에서 발견하고 있다.

‘예술‘. 뭔가 예술이란 단어는 고급지고, 마치 평범한 사람들은 즐기기 힘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요즘에는 대중들을 위한 예술도 많고 예술에 대한 장벽이 예전보다 낮아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급예술과 같이 마치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이번 챕터에서 말하는 예술도 그런 예술이라고 생각했고 예술을 꼭 해야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읽어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가 느끼기에 니체는 예술을 사람의 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고 보았고 예술을 통해서 힘이 충만해진 사람들이 세계를 긍정적으로, 아름답게 바라보기를
바랐던 것 같다. 지금까지 책을 읽으며 니체는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고양이라는 주장을 숱하게 해왔다. 전 챕터들에서는 좀 비판적이고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차가운 태도로 보였지만 이번 챕터에서만큼은 인간 예찬의 느낌을 받았다. 특히, 사람 본인의 힘이 충만하기에 사물에 빗대어 보아 결국 우리가 사물에게 느끼는 아름다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아름다움˝이라는 결론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무엇인가를 아름답게 보아서 기쁜 감정을 넘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말인 것 같다.
또한, 이번 챕터를 읽으며 과연 예술이라는 건 무엇일까? 정말 고급지게, 누군가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만이 예술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고급지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 자신이 힘을 충만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이 역시도 과해서는 안되고 세계를 왜곡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남의 시선을 신경 써서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을 즐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번 챕터는 상대적으로 가볍당 전 챕터에서 너무 어려운 주제였어서 힘들었지?? 이번에는 가볍게 즐겨줭♡_♡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 P164

따라서 예술에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즐기는 것은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입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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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챕터에서는 신념을 과하게 믿으면 자신이 믿는 것의 관점에서만 보게 되어 정말 세계의 진리를 알 수 없고
오히려 사고 방식을 편협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신념이 확고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오히려 강단 있고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삶을 지탱할 수 없기에 신념에 기대어 지탱하는, 나약한 인간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삶에 위안을 주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져야 한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독단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값싼 위안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면서 세계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이렇게 자유로운 정신이 될 때에만 인간은 다양한 이념들을 자기발전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 챕터는 어제 읽었던 종교 챕터를 떠오르게 한다. 저도 니체가 말한 것처럼 ˝독단적이고, 과한˝ 신념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나는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과하면 없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건 신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줄기를 삼는 신념은 괜찮지만 내 인생 모든 것을 결정지을 독단적인 신념은 딱히 옳지 않다.
제 생각보다 니체가 말하는 인생의 진리는 오히려 더 참혹하고 차가울 수 있겠다. 책을 한 챕터, 한 챕터 씩 읽어보니 내 마음의 위안을 위해 읽은 책에서
무엇인가 뼈를 맞는 것 같다.

이 챕터에서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보았는데, 사실 저는 굉장히 호불호와 제가 생각하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벗어나면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어떤 신념에 과도하게 믿는 것은 지양하면서, 자유로운 정신을 갖을 됨됨이는 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불편함도 받아드려야 더한 진리를 얻을 수 있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와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아닌, 그냥 수긍을 하고 회피하는 경향이 크거든요.
물론, 딱히 갈등을 일으킬 필요도 없지만 이 또한 자유로운 정신을 갖기 위한 방법인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저는 어떤 이념에 매우 몰두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밑바닥이 되거나 큰 줄기가 되는 신념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유불급‘과 ‘하늘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다‘ 입니다.
하진님의 이러한 신념이 궁금합니다. 또한, 앞서 제가 말한 것처럼 자신과 가치관이 매우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니체는 "사람들은 어떤 주장이나 확신의 합당한 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광신자들이 그러한 주장이나 확신을 위해서 자신을 거리낌 없이
바치는 등의 몸짓에 의해서 더 크게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합니다.(p.146)

-어떤 독단적인 확신에 의존할 때 우리는 확고한 삶의 의미와 방향을 갖게 되고 이와 함께
살아갈 힘을 얻지만, 그 대가로 다양한 확신들을 자유롭게 비교할 수 있는 사고의 폭과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테는 모든 종류의 독단적 확신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는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p. 148)

-다시 말해, 사람들이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p.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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