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링, 천국을 바라보다 - 시즌 3 엘링(Elling) 3
잉바르 암비에른센 지음, 한희진 옮김 / 푸른숲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엘링을 큰 거부감없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캐릭터가 과장되지 않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괴상하고 기괴한 정신병자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에 한 사람쯤 있을 것 같은, 통제되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완벽주의자 같은 이미지가 그와의 만남을 그렇게 꺼리지 않고 그럭저럭, 아니 적당히 즐길 수도 있게 해 주었다. 엘링과 키엘-피를 나눈 형제-엘 브라더스의 좌충우동 동거기라고 해도 좋겠다. 엘링이 화자이고, 키엘은 엘링에 의해 설명되어지므로 상대적으로 대사도 적고 관찰되어지고 어쩔 수 없이 엘링의 관점으로만 보여지는 것이 좀 안타깝기는 하지만 뭐, 키엘은 어차피 보여지는 것이나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므로 큰 불만은 없다. 아마 키엘은 지능이 좀 모자라나 보다. 특수 학교에 보내졌다고 하고 엘링의 지적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그리고 엄마에 대한 지독한 증오를 품고 있다. 엄마가 알콜중독이었다는 말이 가끔 나오고, 아마 학대 내지는 방치를 당했을 것 같다. 성욕과 식욕이 어마어마한 것을 보면 프로이트가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어릴 적에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해서 유아기에 고착되었다 어쨌다... 엘링은 그에 반해 일반 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를 못했다는 말은 없다. 오히려 굉장히 똑똑하고 지적이고 나름대로(!) 논리적이었던 것 같다. 문제는 사회성이 지독히도 떨어진다는 것. 그래서인지 엄마와의 관계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다. 단편적으로 분열증이나 우울증, 결벽증, 편집증 등이 간간이 보인다. (자세한 건 의사들이 더 잘 알겠지.) 하여간 너무나 다른 두 남자가 또 묘하게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 서로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어서인지. 그러면서 둘이 똑같은 것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두려운 것. 그래서 둘만의 공동 주택에서 은둔생활을 즐긴다. 프랑크의 끝없는 잔소리와 간섭이 없다면 그냥,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들을 관리하는 프랑크에 내몰려 수퍼를 가고 레스토랑을 가고 극장을 가고, 그러다 그들의 삶 속에 뛰어든 레이둔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알폰소라는 노인을 만나고...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자기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마, 자기들의 행동이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절대로 레이둔과 알폰소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문제 투성이지만, 그들-엘링과 키엘은 조금씩 세상과의 소통을 감행한다.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프랑크나 군도 그들을 끊임없이 세상으로 떠밀어 주는 건강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들은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엘링과 동등한 자리에 있나기 보다는 권위를 가지고 군림(엘링의 입장에서는 더더욱)했기 때문에 엘링이 사랑받고 이해받는다고 느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엘링이나 키엘이 애착을 가지고 사랑하게 되는 대상은 자기들보다 더욱 약하다고 생각되는 것들-고양이 두마리와 레이둔, 알폰소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요양소 신세까지 진 엘링이나 키엘보다도 더 약해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약한 사람에게는 더 약한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엘링의 끝없는 망상들이 모두 헛되게 보이지 않는 것은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횟수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상실이나 분노, 오해로 인해 지새운 밤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엘링이 비정상이 되는 것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하고 그 횟수가 너무 잦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망상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지.  건망증은 사람의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고 한다. 지나간 상처나 분노나 실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건강한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그 과거를,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곱씹고 왜곡하고 스스로 더 큰 상처를 입힌다. 정상과 이상은 일직선 위에 나란히 존재한다. 그 말이 사실이다. 그래서 슬펐다. 엘링을 웃으면서 읽지만 끝내 슬퍼지는 것은 그래서이다. 한낱 정신병자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어디서나 만나는 나, 너, 그의 모습이기 때문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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