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대담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평소 글감들을 머릿속에 서랍이 잔뜩 달린 캐비닛이 있어 글을 쓸 때 꺼내 쓴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두 권의 책 모두 저에겐 최애의 책이었지요.
살면서 뭐가 진정한 원인이었는지 잘 모를 허무를 대할때마다 하루키의 소설은 삶의 한없는 허무 속에 직접 들어가게 해주었습니다. 그래 허무는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기에 '힘내자' 라는 식으로 극복하려고 하거나, 회피할 대상은 아니다.라는 걸..
그냥 이야기 안에서 때로 포근한 위로를 받으며 함께 가야 하는 대상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가 새롭고 신비하게 다가올 때 "단편은 참 아름답다"를 느낄 수 있겠지요.
아래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의 대담집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무라카미 : 소설을 쓰면서 필요한 때 필요한 기억의 서랍이 알아서 탁 열려줘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서랍이 아무리 많아도...소설을 쓰다 말고 일일이 열어보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 저기 있다, 하고 그때 그때 서랍들이 자동으로 속속 열려주지 않으면 실제로는 쓸모가 없어요
가와카미 에미코 : 자동으로 열린다고 했는데 그건 훈련이나 노력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 부분일까요?
무라카미 : 그렇다기보다 쓰는 중에 점점 요령을 터득해가는 거죠. 전업작가로 살다보면 항상 그런 것을 자연히 의식하고, 어디에 뭐가 들었는지 감으로 알게 됩니다. 이게 중요해요, 경험을 쌓고 여러 기억을 효과적으로, 거의 자동으로 즉각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하죠
-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중에서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입니다.
1.반딧불이
'중앙공론'에서 청탁받아 쓴 소설
결국 이 글은 4년 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반딧불이>를 쓸 때만 해도 설마 이 이야기가 나중에 점점 뻗어나가 대장편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 214쪽
2.헛간을 태우다(영화 '버닝'의 원작)
알다시피 포크너의 단편 제목이지만, 당시 나는 그다지 포크너의 열성팬이 아니었기에 <헛간을 태우다>라는 작품을 읽은 적도 없었고, 이것이 포크너의 단편제목이라는 것조차 몰랐다.(중략..)
포크너가 '헛간을 태우다'라는 말로 표현한, 하늘까지 불길을 뻗치는 장려한 배덕감이 여기서는 남들 몰래 헛간을 태워 없애는 조용한 음산함에 그친다. 마음 한구석에서 가만히 타오르다 무너져 버리는 그런 헛간이다. - 215쪽
<윌리엄포크너 "헛간, 불태우다">
3.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친구와 함께 그의 여자친구 문병을 가는 설정은 <노르웨이의 숲> 회상 장면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기억한다. - 216쪽
4.춤추는 난쟁이
나의 공장 사랑은 더욱 깊어져 나중에 <해뜨는 나라의 공장>이라는 공장 탐방기까지 내게 되었다.
유감스럽게 코끼리 공장은 없었지만. - 217쪽
* 나의 생각 : <댄스댄스댄스>를 쓰게 된 모티브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5.세 가지의 독일 환상
지금 다시 읽어보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세계의 끝- 파트와 통하는
분위기가 엿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217쪽
6.비오는 날의 여자 #241, #242
특별한 줄거리는 없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이따금 무작정 그런 글이 써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면 할말은 없지만. - 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