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노자를 만날 시간 - 숨 고르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석한남 지음 / 가디언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낮고 부드러움이 높고 강함 보다 위대하다.

 

어렵고, 이해 안 가는 해설은 더는 그만!

노자가 말하듯 물 흐르듯이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노자읽기.

 

노자에 대한 상당한 좋은 책을 만났다. 읽는 순간 저자가 노자에 대한 자부심 가득한 말을 하며 자신의 필력을 써내려 가고 있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한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IMF 구제 금융을 통해 위기(명퇴)를 절감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한문 공부를 즐기면서 노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고문헌 연구가이다. 그리고 독학으로 한문과 고서화를 공부하여 약 3만 자 정도의 고문 문장을 외우고 있으며 초서로 쓰인 옛 편지 천여 편을 탈초(脫草번역(飜譯)했고, 사서(四書)와 노장(老莊)에 능한 분이다. 그래서 머리글을 보면 "저는 이 책의 한문 풀이만큼은 오류가 없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저자에 대한 프로필을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 책이 생각보다 노자가 가진 생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 노자 사상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도덕경에는 각 장에 제목이 달려 도움을 주는 것도 있었지만 그러다 보면 제목에 맞추어 본문을 읽게 되고 한 가지 관점으로 보게 되어 노자의 생각이 좁아지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제목을 달지 않음으로 독자가 직접 의미를 불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노자 주석의 주류는 단연 하상공(河上公)과 왕필(王弼)이라는 사람의 것이 최고다. 왕필은 조조의 둘쨰 아들인 위문제 조비의 재위 기간에 태어났는데 안타깝게도 서기 249, 사마의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을 때 쫓겨나서 그해 가을, 24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그는 10살 때부터 노자를 좋아해 18세에 주석을 썻으며, 24세에는 주역 주석서를 완성한 불세출의 천재이다. 심지어 그 젊은 나이에 노자의 사상이 주역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밝혀내기까지 했다. 저자 또한 '왕필본'을 통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즉 하상공본을 제외하고 왕필본을 포함한 해설서 대부분은 구태여 각장의 제목을 붙이지 않는데 그것은 하상공본의 소제목을 통해서 오히려 왜 이 제목을 붙였는지 한참을 고민하게 어지럽게 한다는 것이다.

 

 

제목이 원래 없다면 노자가 바라는 바는 그것을 읽는 독자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이해되도록 하여 각자의 깊이에 따라 도덕경을 바라보게 한 것으로 본다.

 

 

도덕경은 도()와 덕() 관한 노자의 독특한 주장이 담겨 있는 책이다. BC 3세기경 제후들의 맹목적인 패권 다툼으로 백성들이 전쟁과 노역, 세금 등에 시달리고 있을 때 노자는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제후들이 실천해야 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제시하며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분의 말처럼 공자가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인 여러 규범(예와 인)으로 세상을 다스리려 한 반면, 노자는 모든 것을 자연의 이치에 따라 무위자연의 태도로 다스릴 것을 제안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통치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책이 아닌 하루하루의 삶을 고단하게 살아가면서 삶이 주는 의미와 지표가 무엇인지 깊이 찾는 자들에게 삶의 '놓음'을 알려주는 형언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위로가 담긴 지혜서이다.

 

 

그렇다. 노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우주의 큰 도를 배우는 것이며 그래서 우주의 큰 도에 우리의 작은 문제를 비춰보아 삶의 여여如如를 가르쳐주고 있는 책이다. 특히 노자가 가르치는 바는 말로 가르치고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화두처럼 말을 꺼내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우리 스스로 바른 진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때 중국 후한의 유학자 중장통(179-220)<낙지론>에 따라 읽으면 된다.

 

安神閨房 思老氏之玄虛

(안신규방 사노씨지현허)


안방에서 정신을 평안히 하고

노자의 현허(심오한 비움)을 생각한다.

 

한 마디로 저자는 노자의 책을 읽을 때 편안 마음으로 읽기를 추천한다. 책을 읽다보면 느껴지는 바가 있는데 책 소개에서 언급되듯이 '어렵고 이해 안 가는 해설이 아닌 물 흐르듯이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노자읽기가 가능해진다. 그동안 많은 노자 해석서들이 너무 어렵고 복잡한 풀이와 정확하지 않은 한문 해설과 부족한 배경 설명으로 해설에 많은 오점이 있었다. 그래서 좋은 문장 몇개 말고는 그냥 읽다가 넘기는 수준인데 이 책은 그런 안타까움에 있는 분들을 위해 저자가 상당히 노력을 하였다. 특히 한자 음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풀이했으며, 그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 가능한 부분에는 풍부하고 자세한 배경 설명을 실어 노자를 이해하도록 했다.

 

 

물론 저자는 여러 판본을 참고해 비교한 노력의 흔적이 보이며 저자가 곁들인 얘기들은 노자의 사상을 더욱 깊이 있게 하여 읽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마주하게 될 것으로 본다. 아쉬운 점이라면 책 표지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고전적인 풍미를 주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나오면 젊은 층에 더 다가가는 책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한 문장

 

사람마다 문장이 주는 의미가 다른데 독자인 나에게 특별히 마음에 다가오는 강한 문장은 이러하다. 물론 도덕경 3장의 노자가 주는 가르침 또한 뛰어나다. 그러나 요이금 때 한 노인의 시가 일단 마음을 두드려주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日出而作日入而息 일출이작일입이식

 

耕田而食鑿井而飮 경전이식착정이음

 

何有於我哉 제력하유어아재

 

 

해 뜨면 일하고 해지면 쉬네.

농사지어서 먹고 우물 파서 마시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노자의 무위지치가 바로 이러하다. 노자는 이런 세상을 꿈꾸었다.

 

도덕경 3장의 원본을 그러면 보자.

 

 

不尙賢 불상현, 使民不爭 사민부쟁

 

不貴難得之貨 불귀난득지화, 使民不爲盜 사민불위도

 

不見可欲 불견가욕, 使民心不亂 사민심불란

 

뛰어난 인재를 치켜세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을 다투지 않게 하고,

 

얻기 힘든 재물을 귀하에 여기지 않아서 백서들이 도둑질하지 않도록 하며,

 

탐낼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하라.

 

 

是以聖人之治 시인성인지치, 虛其心 허기심

 

實其腹 실기복, 弱其志 약기지, 强其骨 강기골

 

使民無知無欲 사민무지무욕, 使夫智者不敢爲也 사부지지불감위야

 

爲無爲則無不治 위무위칙무불치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은 비우게 하고, 배는 든든하게 하며 의지는 유연하게 하고, 몸은 강건하게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삿된 지식과 욕망을 버리게 하고, 영리하다는 자들이 헛된 행위를 함부로 못 하게 한다. 무위의 원칙으로 행하니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p39

 

爲學日益, 爲道日損(위학일익, 위도일손)

 

학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이며 도는 날로 덜어내는 일이다.

 

損之又損 以至於無爲(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덜어내고 또 덜아내면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무위에 이르게 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도덕경 48)

 

 

知者不言 言者不知 지자불언 언자부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 도덕경 56)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천하난사 필작어이 천하대사 필작어세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하고, 천하의 큰 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한다.

 

(도덕경 63)

 

 

我有三寶, 持而保之 아유삼보 지이보지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일왈자 이왈검 삼왈불감위천하선

 

[...]

 

夫慈以戰則勝 以守則固 부자이전즉승 이수즉고

 

나에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지니고 보존한다.

 

첫때는 자애로움이고, 둘떄는 검약이며, 셋째는 감히 천하 사람들의 앞에 나서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릇 자애로움으로 싸우면 이기게 되고, 자애로움으로 지키면 공고해진다. (도덕경 67)

 

 

善爲士者 不武 선위사자 불무

 

善戰者 不怒 선전자 불노

 

善勝敵者 不與 선승적자 불여

 

善用人者 爲之下 선용인자 위지하

 

훌륭한 장수는 무력을 쓰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화를 내지 않으며

 

적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맞서 싸우려 들지 않고, 사람을 잘 쓰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춘다.

 

(도덕경 68)

 

 

信言不美 美言不信 신언불미 미언불신

 

善者不辨 辯者不善 신자불변 변자불신

 

知者不博 博者不知 지자불박 박자부지

 

[...]

 

天地道 利而不害 천지도 리이불해

 

聖人之道 爲而不爭 성인지도 위이부생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으며,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

 

선한 사람은 말재주가 없고, 말주변이 없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지혜로운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다.

 

[...]

 

하늘의 도는 만물을 이롭게만 할 뿐 해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투지 않는다." (도덕경 81)

 

노자에 대해 어느 분이 말하기를 '노자는 사상이나 철학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찾는 지침서다.'라고 하듯 인간이 참되게 살고자 하며 마음을 초연하게 살고자 하며 순박하게 살고자 하면 누구든 노자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노자를 통해 랄프 왈도 에머슨이 보이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보인다면 이 책이 주는 묘미가 무엇임을 알 것이다.

 

 

우리 시대의 최고 고전으로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특히 독자의 눈에 맞추어 풀어주는 저자의 솜씨가 대단하니 이 책 한 권을 놓고, 휴가를 준비하면 어떨까?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책을 펼쳐라!

 

노자는 이미 당신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

 

 

행복을 바라는 노자의 지혜는

 

2,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_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신뢰 -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현대지성 클래식 36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라는 이 이름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지성적 혜택과 축복을 받은 존재라 생각된다. 그의 글을 읽자마자 예민한 내적 지성이 꿈틀 되었고, 영민한 마음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미국 초절(월)주의 시인이자 사상가이다.(19세기에 미국의 사상가들이 주장한 이상주의적 관념론에 의한 사상개혁운동의 입장. 초절주의는 진리를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 내재되어있음을 인식하고 이성보다는 인간의 감성과 직관에 호소하며, 인간과 자연의 도처에 신이 편재함을 믿고, 이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직관을 존중하는 사상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철학자이며 사상가와 저자 중에 '에픽테토스, 세네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아우렐리우스, 파스칼, 노자, 쇠렌 키르케고르, 그리고 톨스토이와 헤르만 헤세'가 있는데 그 중에 단연 뛰어난 존재인 에머슨의 글을 좋아한다. 톨스토이는 에머슨의 글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글에는 '본성 안에서 끌어 올린 내적 지식'이 남들과 다르게 표현되어 진다.

에머슨은 영국 비평가이자 역사가인 토머스 칼라일과 친구가 되는데 그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서로가 자석처럼 끌리듯 평생 지속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칼라일의 글 또한 읽으면서 매우 좋았는데 고수는 고수를 안다는 말처럼 그 둘은 기꺼운 친구로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갑자기 칼라일을 말한 이유는 이러하다. 그건 프리드리히 니체가 『우상들의 황혼』에서 두 사람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에머슨은 칼라일보다 훨씬 더 계몽되고 폭넓고 유연하고, 또 더욱 심오하다."

실제 책을 읽어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 버락 오바마, 니체, 간디, 마이클 잭슨에게 영감을 준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의 사상적 뿌리가 여기에 있으며,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사상적 근거 또한 에머슨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알게 된 것인데 소로가 에머슨의 제자이자 사상적 동지였다는 것이 새삼 놀라우면서 수긍되어지는 이유는 소로우의 냄새가 에머슨에게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머슨의 글은 어떤 사람의 추천을 떠나 "자기 생각을 믿는 사람"에게나 "내적 확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끌릴 수 밖에 없는 책인 것을 말하고 싶다."

이 책에는 미국의 개척·독립정신의 초석이 된 에머슨의 에세이 3편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당연히 좋지만 저자의 꼼꼼한 해제를 꼭 먼저 읽고 만나기를 원한다. 에머슨이란 사람의 생애를 통해 그의 삶의 가치관이 어떻게 사상적 표현으로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더불어 저작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작품에 대한 해설을 곁들이면 에머슨의 가르침이 더욱더 마음에 각인이 되어질 것이다.

저자의 생애를 거론하는 것은 이 책을 설명하는데 매우 적절하다 생각된다. 왜냐하면 에머슨이라는 사람(사상)이 여기에서 탄생(출발)되어지기 때문이다. 에머슨은 14세에 하버드대학교를 입학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23세에 아버지가 근무했던 유니테리언 교회의 목회자가 된다. 그러나 목회를 해나가면서 기존의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아무 못마땅하게 여기며 거부를 한다. 1832년에 에머슨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볼 때 더 이상 기존의 예배 형식을 따를 수 없다고 선언을 했다.

그 이유를 든다면 "그리스도가 그런 일반적이고 규칙적인 의식 준수를 가르쳤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참된 신앙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어느 요일엔 어떤 음식을 먹고, 어느 요일엔 교회에 가서 어떤 기도를 드리는가 함을 아는 데 있지 않다.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좋은 삶을 영위하며, 자기가 남에게 기대하는 것을 이웃에 베푸는 데 있다."

톨스토이만 그러한가? 이런 점은 헤르만 헤세에게서도 발견된다. 그의 부친이나 외가쪽은 다 목회자이며 선교사다. 그는 신앙에 대해 많이 방황하며 규칙적인 것과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살아갔다. 어쩌면 우리는 용기가 없어 기존의 신앙 체계 안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저자는 이때부터 「자기 신뢰」에서 말하는 “자기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생활 방식을 찾아 나갔는데 그 결과로 나온 에세이가 바로 『자기 신뢰』였다. 이 원고가 왜 중요한가 할때 이 사상은 실제적인 고뇌와 깊은 사유 끝에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신뢰』는 이렇게 에머슨의 여러 에세이 중에서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자기 신뢰는 초월주의의 핵심 교리이기도 한데 에세이 책 머리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Ne te quaesiveris extra

당신 자신을 자기 이외의 곳에서 찾지 말라

천재란 무엇인가 할 때 단순히 아이큐가 좋은 자가 아닌 '자기 생각을 믿는 사람'이라는 그의 정의는 분명 옳은 생각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는데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방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또한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의 말에 그대로 순응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자기 방식대로 밀고 나가야 함을' 강조한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한다. "나의 충동 때문에 내가 악마의 자식이 된다면, 나는 악마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말 속에 니체의 뻔뻔함이나 오만함이 보이는 것은 무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대목에서 니체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니체의 글을 읽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는 분명 에머슨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 대목에서 말이다.

그러나 에머슨의 이 과격한 말은 자기 신뢰가 그만큼 중요한 것임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는 또 말한다. "내 본성에서 나오는 법을 제외하고, 그 어떤 법도 신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옳은 것은 자기 기질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작년에 읽은 책 가운데 "잠들기 전 철학 한 줄(이화수 저)"이라는 책에 보면 내가 좋아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글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감동을 받고 서평에 기록해 두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자신의 의견에

별가치를 두지 않는 다는 사실은

참 의아한 일이다.

진정 인간이 온전하게 세상을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준에 부합된 형태가 아닌 '내 자신만의 오롯한 삶'임을 분명히 정의를 내리게 된다. 앙리 베르그송의 말이다. 자기 신뢰에 대해 그 또한 동일한 목소리를 낸다. "모든 철학자에겐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자기 자신과 스피노자다."

그렇다. 우린 자신의 철학적 사고 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비중을 두며 내 철학을 의심하고 있다. 자꾸만 눈치를 보며 내 삶을 의심하며 산다. SNS는 그런면에서 인간에겐 독이다.

어쩌면 에메슨은 자기 신뢰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이 쓴 글에서도 벗어나 독자적인 삶을 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제자인 월든의 저자 소로는 그만의 삶을 살면서 「월든」이라는 대작을 문명인에게 선사해 주었다.

이 책에는 에머슨의 에세이 3편이 실려 있다. 「자기신뢰」「운명」「개혁하는 인간」이 그것이다.

단연 으뜸은 「자기신뢰」이다. 저자의 꼼꼼한 해제와 함께 읽어보면 분명 가장 묵직한 가르침을 얻어 또 하나의 에머슨이 탄생되리라 본다. 개인적으로 나머지 에세이는 즉「운명」이나 「개혁하는 인간」은 자기신뢰에 대한 부연적 에세이로 여겨진다. 해제 끝부분에 언급하듯이 각각의 에세이는 원래 소제목이 없었으나 가독성과 독자의 편의를 위해 옮긴이가 임시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즉 세 편의 에세이는 일관된 주제로 그 흐름을 이어간다. 아무리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 운명에 맞서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알고 자기 생각을 펼치는 존재가 되라고 한다. 또한 개혁하는 인간이란 다름 아닌 용서에 바탕을 둔 사랑과 자기 신뢰를 바탕으로 용감하게 기존의 관습에 순응하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앞으로 나가라고 말한다.

그렇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고 했다면, 에머슨은 “너 자신을 믿으라”(Trust Thyself)라고 역설함으로써 현대적 정신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고 있다.

이 말은 진실이다. 즉 "모세와 플라톤 그리고 밀턴 같은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찬양받을 수 있있던 것은, 그들은 책과 전통을 무시하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말했기 때문이다."

시인과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삶의 지침을 따르기 앞서 우리 자신의 마음에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진정 배우며 우리가 가진 직관을 믿어보면 어떨까?

독자인 나는 헤르만 헤세에게서 다시금 「자기신뢰」에 대한 강력한 가르침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헤세의 글을 적으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고, 그 길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며, 오솔길을 찾아가는 암시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찾고, 그러한 자신 속에서 더욱 견고해져서 어디를 가든지 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

“나는 시를 짓기 위해 설교를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 또한 다른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부수적인 것이다. 개개인에게 진정한 천직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것 한 가지뿐이다.”

헤르민 헤세

이 책의 한 문장

인간 내부에 깃든 힘은 본래 새롭다. 그 새로움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하는데, 직접 뭔가를 해보아야만 비로소 자기 능력을 알게 된다. p15

_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든 숲속의 생활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안정효 옮김 / 수문출판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번역판으로 보는 즐거움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답게 나답게
안셀름 그륀.안드레아 라슨 지음, 안미라 옮김 / 챕터하우스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안셀름 그륀이라는 신부는 알고 있는 분이다.(물론 책으로서 말이다) 수도사로서 풍기는 모습과 간간이 쓴 짧은 글은 깊은 메시지가 담긴 글이었다. 그래서 책을 사다보니 그분의 책이 세 권이나 된다. "삶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내 나이 마흔"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 책을 읽으면서 딱히 마음에 깊이 다가오거나 책 전체는 읽지 못했다.

책 읽기에 있어 마음에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는 메시지가 아니면 읽다가 멈추어 버리고 다른 책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읽어도 심심한 책이 있다. 너무 단조롭거나 익히 아는 것을 나열하거나, 어렵게 쓴 책은 읽다가 중단이 된다. 물론 어렵게 썼다고 해서 그 글이 어렵다는 것은 아니다.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좋은 책은 선빵이 있다. 그리고 읽어 가면서도 메시지를 주며 계속해서 알고 싶은 책이 있는 것이다.

이번 안셀름 그린 신부의 책은 후자쪽이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심심한 책이 아닌 무척 깊이가 있고, 참으로 영성 사색가 다운 혜안과 관조적인 삶을 산 흔적들이 보인다. 무엇보다 이번책은 인간학의 뿌리가 되는 심리학적 관점을 가지고 신앙이 무엇인지, 세상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통찰력 있게 글을 써내려 간다. 수도원에서의 고요한 묵상의 시간이 없었다면 이런 깊이 있는 글은 결코 써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 책을 읽으며 그를 일컫는 수식어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최고 영성가’이자 ‘유럽인의 멘토’라 불리며 또한 ‘독일의 성자’, ‘사제를 치유하는 사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지역과 종교를 뛰어넘어 수많은 독자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 작가라는 칭호가 이 책 한 권을 통해 전적으로 수긍하는 바이다. 그만큼 이 책은 전에 읽었던 책과는 다르게 써진 삶에 관한 깊이가 남다른 책이다.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특징이라면 노신부 안셀름 그륀과 조카 안드레아 라슨이 독일과 미국에서 편지로 주고받은 대화 형식의 글들을 엮은 책이다. 조카가 질문을 하며 거기에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 책은 엮여져 있는데 조카가 가진 혜안이나 질문 또한 수준이 높다. 조카 또한 작가인데 세 아이의 엄마로서 살아가는 그녀는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 봐도 될 것이다. 즉 조카는 현실적 영성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실제 삶이주는 힘겨움과 역경을 고스란히 살아가면서 단지 신앙으로 무마시키며 현실을 외면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삼촌 그륀은 현실의 삶을 모르는 수도사로서 그가 가진 조언들이 탁상공론처럼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현실을 전혀 모르는 사변적인 말로만 들릴 수가 있다. 그런데 조카 라슨과의 대화 속에서 그가 풀어내는 현대인들의 (다양한 문제와 고민에 관한)궁금증에 대한 답변은 매우 현실성 있게 들리고 설득력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이번 책에는 마음에 다가오는 글귀가 많아 여러번 줄을 쳐가며 마음에 담고 있다.

두 저자는 저 하늘의 얘기를 하고 있지 않다. 바로 땅의 얘기, 현실의 얘기를 하며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만나게 한다. "외로움, 풍요로운 삶, 조화로운 삶, 성공, 명예욕, 돈, 소유, 노동, 몰아와 자기 발견,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 감사함과 의미 찾기, 철학적 질문과 성서적 답변, 인생길 가운데 마지막에 남는 것들" 등등의 얘기를 가져와 제목처럼 온전히 나답게 너답게 살게해 준다.

도대체 성공이란 무엇인가 하며 질문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안셀름 그륀이 심리학자 융을 인용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른 이들이 말한 부분과는 다르게 정말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가 한 말이다.

성공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무엇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가다.

[...] 반대로 명예욕이 전혀 없는 사람은 삶의 동력도 없는 사람이다. 융은 사람은 인생의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명예욕이 있어야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생의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냥 존재하는 법, 진 정성 있는 존재가 되는 법, 내면에 집중하는 법, 그리고 외적인 부에 집착하는 대신 영혼의 풍요로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융은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성공적인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외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하느님이 자신에게 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p86-88

누구나 성공적인 인생을 바란다.그러나 그 성공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젊은이들이 처음부터 명예욕이 없이 산다면 그는 실패하는 인생이 될 것임을 말하고 긍정적인 명예욕을 인생 중반까지 가지기를 추천한다. 정말 현실성 있는 조언이다. 젊은이가 처음부터 도인이 되고, 내면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삶도 좋겠지만, 인생은 중반까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향해 달릴 필요는 있다고 본다. 왜냐면 주위에 급하게 영성가?가 되었는데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처럼 뒤늦게 세상 맛을 알아 영적 속물이 된 사람을 보았다.

이 책에서 안셀름 그륀은 현실적 문제에 대해 심리학적 관점과 영성적 관점에서 매우 예리하게 현실적으로 답해주는 특징을 보여 준다. 그가 쓴 다른 책과 다르게 심도 있게 철학적인 접근도 보이면서 수긍하게 만들어 주는 기묘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곱씹는 책으로 한 번씩 사색의 도구로서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주는 조언과 조카 라슨이 질문하며 펼쳐지는 대화는 인생과 종교 속에 갈등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해주고 있다. 진짜 나답게 너답게 살기를 원한다면 이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들어와 보기를 바란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은 다른 사람도 함께 읽고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수도자로서의 톨스토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어쩌면 우리 시대 에녹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카가 가진 여성적 섬세함의 질문은 훨씬 이 책을 가치있게 만들었음을 말해주고 싶다. 질문이 심오해서 그런가? 답변도 심오하며 탁월하다.

그렇다. 이 책은 그전에 읽었던 책과는 다르다. 소중한 자신을 발견하기 원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자들에게 분명 이 책은 길잡이가 되고 숨통이 되리라 믿는다.

이 책의 한 문장

나는 내면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균형을 찾게 된다. [...] 중요한 것은 흔들렸다 하더라도 다시 고요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 무엇으로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p82

융은 꿈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융의 이론에 따르면 영혼의 지혜는 우리 인간이 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영혼의 지혜는 우리가 고개를 들어 우리보다 더 큰 존재를 올려다볼 때 우리 영혼이 평온해지며 우리가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p200-201

어느 시대이건 모든 철학자들이 제기했던 인간의 근본적 문제는 '우리는 왜 존재하며, 왜 중요한가? 우리는 왜 사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신경정신과 교수 빅터 프랭클은 오늘날 사람들은 (프로이트 시절처럼) 욕구나 억압 때문에 병이 들기보다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병이 든다고 했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건강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 듯하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돈을 많이 벌거나 성공한 것만으로 충족되지는 않는다.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인간을 넘어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가진 비밀에 접근하게 된다. 우리가 찾는 삶의 의미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 의미를 토대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게 된다. [...] 종교는 겉으로는 우리 삶이 완전히 망가진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신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 그 결과 우리는 감사와 신뢰를 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며, 플라톤도 이 사실을 가설로 제시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가능한 많이 가지고 누리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행복은 나 자신과 조화를 이룬 사람, 나보다 큰 존재 안에서 안정감을 찾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종교를 통해 인간은 신에게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신과 신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종교를 갖게 되면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해낼 필요가 없다. 어느 경우에는 받는 입장이어도 된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나는 사랑받는 존재이며, 유일무이하며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p208-210

너답게 나답게,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이야기하는 책!

_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윤휴(尹鑴) 라는 인물은 처음 듣는 이름임에는 틀림 없다. 왜냐하면 제목이 시사하듯 그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깊이가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흔히 듣는 이름은 아님은 확실하다. 물론 책에는 송시열과 노론 기득권 세력에 대해 말해주고, 숙종이란 이름과 류성룡이라는 익히 귀에 익은 인물에 대해선 들어 보았다.

 

그러나 윤휴라는 존재는 마치 "여주에 사는 그(윤휴)의 후손이 윤휴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는 말처럼 윤휴는 나에게도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크게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나에게 소중하게 다가온 책이며 '윤휴'라는 인물을 통해 시대 역사를 새롭게 보는 안목과 미래를 보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핵심 문장이 너무 마음에 든다. 내가 뽑은 핵심 문장이기에 공감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문장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즉 윤휴라는 인물은 과히 '주자'보다 더 뛰어난 존재이며 사대주의 사상에 머물러 있는 기득권(정적 세력) 세력에게 가히 큰 핵폰탄을 날린 위대한 인물로 보인다.

 

윤휴는 주자를 반대하고 거슬러서 장구를 마음대로 고쳤으며, 심지어 중용(中庸)(주자의) 주석을 고친 것이 많았다. 항상 말하기를 "자사(子思 중용의 저자) 의 뜻을 주자 혼자만 알고 어찌 나는 모른다는 말인가"라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의 반적이다. -숙종실록 31017

 

그렇다. "세상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가 이 책의 핵심이며, 이 책의 한 문장이다.

 

우리 사회를 보자. 우리 사회는 남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역사학계의 주류다. 이들이 과거에는 일제 식민 사관만 추종하더니 이제는 중국 동북공정까지 추종하는 것으로 악화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은 그 상부 기관을 일본 내각이나 중국 국무원으로 바꾸면 명실이 상부할 형태를 계속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백호 윤휴가 항변하던 "세상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의 목소리가 절실히 우리 시대에 되살아 나야할 시점임을 이 책은 주장하고 있다.

 

윤휴가 사약을 받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하려고 금부도사 홍수태에게 필묵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악한놈이 있나. 그는 윤휴에게 한 마디의 말도 허용치 않았다. 한때 그의 정적들은 그를 당대 최고의 선비로 추앙했었다. 그런데 이 선비의 지목은 놀랍게도 역이 아니었다. 은 커녕 임금과 백성을 너무도 사랑했고, 평생 일관되게 도를 추고했다. 즉 그의 길에 주자는 상대적 가치를 지닐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었다. 내용은 이러하다.

 

그의 길에 북벌대의가 있었다. 그 순간 말로만 북벌을 외처던 세력에게 그는 정적이 되었다. 그의 길에 백성들의 민폐 해소가 있었고, 신분재 해체가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으며 그는 적이 되었다. 이 시대는 주자가 절대적 가치로 군림하기 시작하던 시대라고 한다.

 

윤휴가 죽은 후 조선은 침묵과 위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으며, 그런 침묵과 위선은 무려 330여 년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저자는 말해 준다.

 

윤휴는 그 당시 유럽세계에서 벌어졌던 '마녀사냥'을 당한 것이다. 종교나 사상이 그 나라의 전통이 되고, 교리가 되면 그것은 권력을 덧입고 무시무시한 ''이 된다. 윤휴가 사약을 마시기 직전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며 유언 아닌 유언이 된 말이 있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유언이며, 당시 서인들의 행패가 얼마나 악하고 치사한지를 보게 되는 대목이다.

 

왜 주류 세력들은 새로운 사고와 사상을 마치 이단보듯 제물로 삼고 정치적, 사상적 숙청을 감행하는 것인가? 마치 주자를 절대적인 도그마로 삼고, 조금이라고 벗어나면 죽는 줄 아는 그들의 모습들이 애처롭기도 하다. 최근에 자산어보라는 영화를 보았다. 18012, 서슬퍼런 국청(鞠廳)에 삼형제가 잡혀왔는데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인물도 포함되었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삼형제는 당시 신유박해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두 형제는 신()을 버리고 목숨을 구한다.하지만 한 형제(정약종)는 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받아 들였다. 왜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건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가 당시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천주교는 그야말로 사교(邪敎)였다. 사교라는 말을 찾아보니 "부정(不淨)하고 요사(妖邪)스러운 종교.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라고 하였다. 당연히 이런 사교는 죽음으로 없애 버렸다.

 

이와같이 윤휴 또한 당시 지배체제에 위협이 되어 제거된 것이다.

 

윤휴의 죄는 세 가지였는데 첫째,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주자의 학설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 죄이다. 둘째 서인 당파의 당론이었던 북벌 불가에 저항하며 조선을 동아시아의 맹주로 만드는 부국강병을 도모한 죄이다. 셋째 사대부 계급의 특권을 타파하고 반상과 남녀의 차별을 넘어선 세상을 실현하려 한 죄이다.

 

그가 생각한 세상은 어쩌면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인줄 모르지만 가히 이것이 죽일만큼 죄가 되었는지 의문과 함께 화가 난다. 물론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가운데 4대 성인에 들어가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또한 당시 지배체제가 가진 생각 이상의 그림을 그렸기에 그는 독배를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어이없게도 윤휴는 죽어야 했고 그 이름은 조선 최대의 금기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송시열과 노론 기득권 세력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과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한 지 340여 년이 지난 지금, 역사가 이덕일에 의하여 무려 10여 년에 걸친 열정적인 연구와 치밀하고도 섬세한 고증으로 금기시되었던 윤휴의 삶과 사상을 오롯이 되살려주고 있는 책이다.

 

그러면 "지금 왜 윤휴를 말하는가?"이다. 그건 윤휴는 조선 개혁에 대한 웅장하고도 장대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휴에게 조선은 소변통(小變通), 즉 작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운 대변통(大變通)이 필요한 나라였음을 말해주고자 했다. 그는 평민을 위한 무과인 만인과와 서얼 허통 등을 통해 인재를 길러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북벌을 추진했는데, 이러한 사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윤휴가 주자의 해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소신으로 학문 세계를 수립한 굉장히 자유로운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보자.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각자 진영 논리에만 집착하고 있다. 이들이 정말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그저 당론에 입각하여 자기 밥벌이로 생각하며, 그저 훈장처럼 국회의원이라는 금뺏지를 달고 있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유럽의 정치인들과는 너무나 다르니 기가막힐 따름이다. 정말 울나라 정치인들은 일하지 않고도 잘 먹고 살며, 혜택만 해도 어마어마하고, 누려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정작 일은 않고 만날 서로 잡아 먹으려는데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있다.

 

언젠가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 Jose Alberto Mujica 대통령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고, 국민에게 존경을 넘어 사랑받는 대통령이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아래와 같다.

 

"28년 된 낡은 자동차를 끌며 월급의 90%를 기부하는 대통령"

"많은 말을 하지만 결코 국민을 속이지 않는 대통령"

"노숙자에게 대통령궁을 내주는 대통령"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지만 '철학자'로 불리는 대통령"

"강대국 정상들 앞에서 거침없이 쓴 소리를 하는 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현자'라고 칭송받은 대통령"

 

유럽의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국회의사당으로 가보자. '라스무스 노어퀴스트' 의원이란 여성이 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자전거로 출근한다. 30분을 달려 도착한 국회의사당 주차장은 의원과 국회직원들이 타고 온 자전거로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특히 라스무스 의원은 좁은 사무실에서 하루 평균 12시간 일한다. 비서 1명이 국회의원 2명을 보조하며, 국회출석을 안하거나 법안 발의를 안하면 급여는 없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덴마크 정치인이 검소하고, 부패가 없으며,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스웨덴 국회의원 힐레비 라르손 의원으로 가보자. 그는 지난 4년간 제출한 법안만 638개에 달힌다. 정책 보좌관 1명이 의원 4명을 보조하는 시스템이지만, 그는 이틀에 한 개씩 법안을 제출했다. 본회의 상임위는 빠진 날이 없다고 한다.

 

"의원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위원들이 투표해서 의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합니다."(프레드릭 룬드 사멜리 사회복지상임위원장) 스웨덴의 국회 의원 관리 시스템은 매우 엄격하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빠진 시간 만큼 수당을 주지 않고, 의사 발언권을 박탈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그들을 한 마디로 '특권층'으로 보지 않는가? 유럽 정치인은 특권 의식이 없는데 아직도 수준 낮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특권의식이 풍부하다 못해 넘친다.

 

"운전기사가 모는 전용 고급 승용차를 타고 출근해 45평 넓이의 쾌적한 사무실에서 일합니다. 9명의 보좌진(보좌관 2, 비서관 2, 비서 3, 인턴 2)을 두고, 국회가 개점휴업해도 꼬박꼬박 세비를 타가죠. 국회의원 세비는 연 14천만원에 달하죠."

 

무언가는 잘못된 것인 줄을 국민들이 통감하며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윤휴'라는 이름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이름이며 그의 생각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참된 사상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할 그랜드 디자인은 무엇인가? 금기어가 되어버린 조선 개혁가의 삶과 사상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음을 이 책은 분명히 말한다.

 

반상의 차이를 넘어 남녀의 차별까지

 

윤휴의 멋진면은 여기서 또 부각된다. 최근 자산어보 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정약용과 다르게 주인공인 맏형 정약전은 하늘과 땅의 구분, 임금과 신하의 구분, 양반과 천민의 구분 같은 경계를 지워내는 것을 정치적 이상향으로 삼았다.(약용은 그런 신분질서 및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사회개혁을 주장)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이상(理想) 이었다. 그리고 영화에는 '군포'에 대해 다루는 장면이 리얼하게 나온다. 군포란 '조선 시대에, 병역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으로 받아들이던 베'를 말한다.

 

당시는 죽은 사람과 간난아이까지 군포를 부과하여 백성들의 삶을 거의 옥죄다 못해 죽도록 했다.

 

윤휴는 벼슬을 하지 않은 백두(白頭)의 신분으로 백성들의 질고를 몸소 함께 겪은 순간이 있는데 그때 이런 장면을 몸소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과 간난아이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군적수포제 대신 양반 사대부들이 군역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호포법과 구산제를 주장하게 된다. 또한 성현의 말씀을 배움에 있어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여기고 여성들에게도 학문을 가르쳤다. 당시 관점으로는 놀라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이때가 어느 때인가? 성리학이 남존여비의 이론적 무기로 변해가던 조선 후기이다. 그런데 이때 여성들에게도 경전을 가르친 것이다. 경전은 이러하니 효경(孝經)시경(詩經)주남(周南), 소남(召南)등이었다. 책의 내용이 좋아 그대로 가져오면 "조선 초 권근(權近)시경주석서인 시천견록(詩淺見錄)의 첫 머리에서 주남은 규문(閨門: 여성의 거처)의 일로부터 시작해 천하의 일에 통달하는 것이요, 소남은 천하의 일로부터 말미암아 규문의 일에 근본을 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남, 소남은 여성들에게 삼종지도(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 여자는 어려서 어버이께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는 도리)를 강요하는 책이 아니라 가정사와 천하의 일이 하나임을 말해주는 책이었다." 실로 윤휴는 반상의 차이를 넘어 남녀의 차별까지 넘어서는 위대한 일을 벌인 것이다.

 

진정 그는 앞서나간 인물이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구현한 존재이다. 그런 인물을 매우 잘 평가한 분이 있으니 김성애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이다. 그는 윤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백호 윤휴(白湖 尹鑴)17세기의 천재적인 산림학자(山林學者),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였다. 특히 주자 성리학이 교조적 권위를 누렸던 조선후기에 경학(經學)에서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수립하였고, 이로 인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되어 정치적, 사상적 숙청을 당했다는 면에서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백호의 사상은 항상 이단으로 취급되었고, 조선 말까지 신원이 회복되지 못하여 문집조차 출간되지 못하였다. 백호에 대한 평가도 당색에 따라 달랐는데, 노론계는 끝까지 정인홍(鄭仁弘)이나 이이첨(李爾瞻)과 같은 소인이자 주자학의 적인 이단으로 취급했지만, 남인들은 '백호는 덕을 이룬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이요, 정암은 덕을 이루지 못한 백호이다'라고 평가하여 윤휴를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 조광조에 비의할 정도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윤휴, 분명 일반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일 것이다. 1617년에 태어나 1680년에 사망한 유학자이자 경세가인 그는 성장기에 전란을 겪었기에 특별한 스승이 없었다. 이 때문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채 학문 세계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그를 주자라는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세계을 보게 하는 길이 되었다. 비록 송시열 등 서인 세력에 의해 그는 죽어 없어졌지만 그가 가진 생각의 이념들은 독자인 나에게 설레임을 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새롭게 가지게 한다.

 

그리고 북벌론에 대한 그의 의견 앞에 사대부들이 취한 모습을 보면 오늘 날의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얼마 전 서울 시장 선거가 있었다. 여당의 완패이다. 그러면 야당 인물이 선뜻 좋은가? 말하진 않겠다. 그런데 말이다. 윤휴와 같은 인물이 현재 존재해도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수준은 아닌지 묻고 싶다. 국민들이여 왜 새로운 인물, 바르고 올곧고 깨끗한 인물을 못 찾는가? 혹시 내 실리에 손해가 될까봐 그러진 않는가? 나라를 위한 인물 보다 자기 실리에 유익되지 않기에 윤휴 같은 인물을 외면하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당색깔(진영논리)과 명예와 업적을 위해서만 일하는 정치인들이여 왜 당신들은 윤휴를 죽였는가? 이 책을 읽고 이런 물음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시대가 따라주지 못한 조선후기의 최고 학자이자 문신인 그가 그리운것은 나만 그러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