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라틴어 문장 하나쯤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티나 씨.야마자키 마리 지음, 박수남 옮김 / 윌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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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을 만난다는 건 인생의 큰 안내자를 만나는 거와 같다. 인생 문장이란 말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 특히 지적인 거인들은 명문장을 만들어 내어 읽는 이들을 탄복하게 만든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세네카, 에픽테토스, 에머슨, 니체, 쇼펜하우어, 헤세, 정약용, 채근담 등등 수많은 이들은 마치 명문 제조기처럼 명언들을 쏟아 낸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니체의 말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를 붙들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었다. 에머슨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만난 문장이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이와 같이 명문장을 만날 때는 희열을 느끼며, 큰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라틴어 문장은 한 번씩 여러 책에서, 또는 TV를 통해 인용되기도 하는데 마침 『당신에게 라틴어 문장 하나쯤 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이 출간되어 관심이 갔다. Carpe Diem카르페 디엠은 너무나 많이 알려진 문장이다. "오늘을 즐겨라"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루를 따서 거두라"이다. 즉 매일매일 열매를 따서 거두듯 순간을 최대한 즐기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앞날을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라는 말이다. 금세 사라질 인생을 우리 모두가 살고 있으니 즐김을 미루지 말고 지금 누리는 것이 지혜롭다.

사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라틴어를 나도 모르게 쓰고 있고 알고 있다. 그 중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의 라틴어인 "Omnia viae quae ad Romam duxerunt"가 있다. 이게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는지 오늘 정확히 알게 되었다. 또한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인 "Dilige et fae quod vis."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 또한 라틴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특히《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즉 "감시인은 누가 감시할 것인가?"라는 라틴어 격언을 보면서 라틴어의 새로운 맛을 보게 된다. 이 격언은 사회 질서와 치안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들이 권력을 남용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다. 그런데 이 말의 탄생에는 의외의 진실이 있다. 바로 ‘불륜에 대한 문구’였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풍자 시인 유베날리스가 쓴 시에 나오는 구절로, 바람피우는 아내를 어떻게 바람 못 피우게 할지 고민하는 글에서 나왔다. 즉 아무리 지키는 사람을 세운들 아내는 그 사람마저 유혹할 것이라는 말이다. 불륜에 대한 문구가 새롭게 재밌게 들려진다.

그런데 이 말은 결국 사람이란 존재를 믿어서는 아니된다는 말로 들리게 된다. 어떤 사람을 믿었는데 결국 그 사람마저 엉뚱한 마음으로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윤리를 담은 종교나 민간 신앙 같은 게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아들이 어릴 때 "나쁜 짓을 하면 바다 괴물이 나타나서 바다로 끌고 간다"라고 말했는데, 이 얘기를 들은 아들은 문밖에 괴물이 나타날까 봐 겁이 나서 매일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처럼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 있듯이 하늘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지키는 진정한 감시자가 아닐까?

그런면에서 성경을 보면 이런 명문장이 나온다. 구약성경인 전도서 12:1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인 히브리서 9:27절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또한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과 함께 삶을 감시하는 자가 존재함을 가르쳐 준다.

이어서 또 하나의 멋진 문장을 만났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활동한 극작가 플라우투스는 "우리 인간은 가지고 있던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서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tum denique homines nostra intellegimus bona, quom quae in potestate habuimus ea amismus》

정치와 관련하여 말해보면, 새로운 통치자로 바뀌고 나면 전임자가 얼마나 관대했는지 알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인간은 모두 후회를 한다. 좀 더 찾아뵙고 효도할걸 하면서 말이다. 학창 시절에 좀 더 열심히 공부해둘 걸 하는 그런 후회 또한 누구나 가진다. 인간은 잃음을 통해 깨달음의 확장을 이룬다. 그래서 잃음은 결핍이 아니라, 더 깊은 내가 되는 통로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일이나 정체성을 잃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마주하며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래서 《multa docet Fames라는 명문장이 만들어졌다. 즉 "배고픔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참으로 멋진 라틴어 문장을 만나서 마음껏 문장을 씹고, 음미하며, 머리에 그리며,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다. 이 책은 서양 문명의 깊은 뿌리가 된 역사적으로 위대한 철학자에게 영향을 준 무수한 라틴어 문장 65가지가 실려 있다. 과거에 쓰여진 라틴어 격언을 보면서 인간의 생각과 삶이 어느 시대든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생각과 고민으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문명이 크게 발전했다지만 인생에 대한 삶의 아픔과 시련, 고난들은 인간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다. 이때에 이런 라틴어 문장 하나쯤 알고 가는 것은 삶에 큰 도움이 된다.

키케로가 말한 라틴어 문장으로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historia vitae magistra》 이 말은 "역사는 인생의 스승이다"는 뜻이다. 인간이 살아온 삶의 궤적들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안겨준다. 그런데 말이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이 역사를 통해 배운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다."고 말했다. 헤겔 역시 "경험과 역사가 가르치는 것은 국민과 정부는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거나, 역사에서 끌어낸 원칙에 따라 결코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는 말을 했다. 인간의 무지함이기보다는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그러한 것에 쉽게 동요되는 존재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이 책의 나오는 오래된 문장은 어떤 이에게 통찰력과 위안을 충분하게 안겨준다.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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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심리학 카페 - 11주년 특별 개정판, 흔들리는 삶의 중심을 되찾는 29가지 마음 수업
모드 르안 지음, 김미정 옮김 / 클랩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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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언론이 주목한 전설의 ‘심리학 카페(Cafe-Psy)’

*** 파리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심리학자 1위

*** 10년간 지속된 한국 독자의 리뷰 “나를 울린 인생 책”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울어 본 적 있나요?”

연약한 마음을 마주할 때, 비로소 단단해지는 삶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책이다. 얼마나 좋은 책이기에 독자 리뷰부터 시작해서 특히 ‘파리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심리학자’라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한국 독자에게 무려 10년간 "나를 울린 인생 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니 그 책이 궁금함은 당연한 것이다.

책의 표지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린 시절을 지나 스물세 살에 첫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과 사별하고 깊은 우울증을 겪었다. 엉망이 된 삶 속에서 문득 과거의 아픔 때문에 자신의 현재를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10년간 정신 분석 치료를 받으며 마음을 회복해 갔다. 과거의 자신처럼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사람들, 자신의 상처를 모른 체하며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들을 두고 볼 수 없어 1977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에콜 파리지엔 드 게슈탈트(ecole parisienne de Gestalt)에서 게슈탈트 심리 치료를 공부하며 심리 치료사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에서 철학적인 담론을 나누는 ‘철학 카페’가 유행하는 데 반해 내면의 이야기를 나눌 곳은 많지 않다는 걸 깨달은 르안은 한잔하러 가듯 편안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공간인 ‘심리학 카페(Caf?-Psy)’를 만들었다. 매주 목요일 7시가 되면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바스티유의 한 지하 카페에 모여 일, 사랑, 인간관계에 관한 온갖 고민을 주고받았고 18년간 총 916번에 걸쳐 5만 명이 넘는 사람이 다녀간 특별한 치유 공간으로 기록되었으며, 이곳에서 나눈 이야기 중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것을 충분히 각색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파리의 심리학 카페》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책이 주는 묘미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맛집이라도 자신에게는 맛집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책은 모든 이가 좋아하며, 고전의 반열에 올라 놓아도 고개를 끄덕이는 책이 있다. 과연 광고 마케팅일까? 아니면 그 책이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만지는 책일까?

일단 북디자인과 편집 구성이 좋다. 카피해 놓은 글들 또한 독자에게 상당히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일단 읽어 보았다. 그런데 말이다. 책이 술술 읽힌다. 그리고 책에 웬만하면 줄을 잘 안친다. 특별하게 이 책은 내 인생의 책이라는 것에만 정성껏 줄을 치고 표시를 한다. 그런데 저자의 글 하나하나가 독자인 나에게 인생의 이치를 깨우치도록 인도해 주며, 인간 존재의 심연을 건들어 고통을 마주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응석받이에서 언제든지 일어나도록 격려하며 따뜻한 채근으로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첫 번째 카페에서 만난 한 사람을 통해 저자의 결심은 이러하다.

저는 그때 결심했어요. 힘든 줄도 모르고 정신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심리학 카페가 자신을 돌아보는 장소가 되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고요.

p.16

세상에는 생각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힘들게 살고 있다가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누구에게나 위로와 힘을 주고 깨우침을 주며 과거의 고통에서 해방하도록 돕는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그런 고통의 저변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왔기에 심리학 카페를 찾은 사람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실제적인 아픔의 공감대를 형성해 주고 있어, 일종의 기댈 큰 언덕과 같은 존재로서 위안자가 되고 있다.

첫 모임 4명을 시작으로 시작하여 18년간 총 5만 명의 사람이 이 심리학 카페에 다녀갔다고 하는데 얼마나 위안이 되었으면 사람들이 끝없이 이곳을 찾았을까? 그래서 영국 〈인디펜던트〉, 프랑스 〈리베라시옹〉 등 세계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곳에서 나눈 이야기 중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것을 충분히 각색하여 엮은 최초의 책이다. '인생의 쓴맛'이 있는 사람들은 꼭 들려보면 좋은 맛집임을 분명 알게 된다. 그래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는 책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분명 이 책은 "잃어버린 나를 되찾게 해주는 책이었다." 저자가 말하듯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애정과 위로가 있어야 하고’, ‘나를 이해하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살 만해진다’는 것을 몸소 깨달으며, 마흔이 넘은 나이에 심리학을 공부하여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는 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

나만 홀로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p.19

고통의 동질성은 생각보다 위로가 크다. 즉 누구에게나 고통은 일어나며, 그 고통을 나눌 때는 항상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런 나눔 속에서 오히려 위안을 얻고, 그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나도 얼마든지 살아낼 자신이 있다는 작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불행은 남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삶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큰 사건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행한 일을 겪는 과정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그 불행 또한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결국 잘 대처하며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p.27, 31

저자는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 고통 속에 갇혔었다. "저는 너무도 화가 나 신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거리를 활보하는 모든 사람이 미웠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미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충분히 해 주지 못했으면서... 작은 일에 토라지고 투정만 부렸던 제가 싫어서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술만 마시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렇게 1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씩 커나가며 엄마라고 그래도 말을 할 정도가 되었을 때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다. 다행히도 일찍 깨달았다.

"저는 문득 과거의 불행을 곱씹느라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와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야 할 소중한 시간을, 저는 세상을 증오하는데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나와 아이 인생의 걸림돌로 만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였습니다. 내가 불러들인 불행이 내 아이의 가장 빛나야 할 시절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어요. 그건 먼저 간 남편도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술을 끊고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굴레를 벗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선택한 거지요" p. 30

그렇다. 진정한 불행은 불행한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 좋은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에 있다. 불운한 일을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행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의 선택인 것이다. 무엇보다 과거의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를 해야함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거의 상처는 끊임없이 되살아나 현재의 나를 괴롭히며, 주변 가족들도 괴롭히게 된다.

또한 여기서 다 알지만 또 배우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는 거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면 되고, 흔들리겠지만 그럴 땐 내가 나를 칭찬해 주면 된다고 가르쳐 준다. 셀프 칭찬을 통해 다른 사람을 통한 인정 중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앞으로는 비난을 받든, 칭찬을 받든, 누가 뭐라 말하건

나는 내 생각에 따르겠다. _ 라 퐁텐 『우화』

그런데 오히려 칭찬이 나를 억눌렀습니다. 강한 나를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공부가 힘들어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법도 잊고 살았습니다.

p. 164,170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안에 있는 옳지 않는 감정을 처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특히 ‘어려운 전문 용어 없이도 심리학적 통찰을 건네고 우리도 몰랐던 내면의 아픔을 해소하게 해 주는 책’이라는 평가가 정확하다.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은 이 책은 사람들이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면의 불안과 우울, 상실의 아픔, 가까운 이에게 받은 상처, 번아웃에 관한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용기와 바른 마음 자세를 가지게 한다. 이 책은 위로가 각박해진 시대에 ‘자기 돌봄’의 시작점이 되어 줄 책이다. 심리학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게해주는 쉬우면서도 명쾌한 이 책으로 당신의 삶도 상담을 받으면 좋겠다.

"살면서 한 번쯤

마음 놓고 울 시간이

필요하다"


*심리학자 모드 르안의 5가지 조언

1. 나조차 모르는 내면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위해, 살면서 한 번쯤은 마음 놓고 울어 볼 것.

2. 누구도 나를 상처 주게 두지 말 것. 설령 그 사람이 부모일지라도.

3. 사랑이 떠나가도 나는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질 것.

4.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소통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 것.

5. 긴 인생 앞에서, 어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기둥을 세울 것.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을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들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p. 32

우리의 마음은 무쇠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도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 나조차 내 감정을 무시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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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예수의 13번째 제자 - 니체가 가장 만족한 저서 『안티크리스트』 거꾸로 읽기
김진 지음 / 스타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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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김진이라는 분은 TV 매체를 통해서 접한적이 있다. 기독교인 가운데서 리버럴한 분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렇기에 그가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 흔히 알고 있는 정통 기독교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분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니체에 대해 기존 기독교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려고 이 책을 썼다. 기존의 기독교는 니체를 강하게 비판한다. 즉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 니체는 흔히 허무주의, 염세주의, 무신론과 함께 언급된다. 따라서 니체는 기독교에서 금기시해 온 인물이다. 그러나 이어령 박사도 언급했다고는 하는데 니체에 관해 잘못 알려진 오해가 많기에 니체를 제대로 알면 오히려 이 세상에 무신론자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이것은 이어령 교수의 섣부른 생각이었지 않나하는 아쉬움이다. 그렇다. 니체를 좋게 생각하는 자들은 "니체가 비판한 건 예수가 아닌 제도화된 기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인 저작들과 그가 내뱉은 말과 글들은 오히려 반기독교적이며 안티크리스트임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자인 내가 왜 이 부분부터 말하느냐 하면, 나 또한 저자와 이어령 교수와 다를 바 없이 니체는 잘못된 기독교와 잘못 알려진 하나님에 대해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이지 실제적 신은 오히려 더 니체를 통해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저작들과 그에 관한 책을 쓴 다른 저자를 통해서 볼 때 니체는 단단히 자신이 믿고 따랐던 그 신을 철저히 죽였고, 조롱하였다. 물론 니체를 통해 그릇되고 오용되며, 실제 성경에서 전해진 진리와 멀어진 타락한 기독교를 향해 망치질을 하면서 기독교의 자성과 개혁을 이루게 하는데 일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전개해 나간 모든 저작들을 보면 과연 그러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어떤 분이 그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을 소개해 본다.

"니체는 모든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모든 종교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자율적 스트롱맨(Übermensch, Overman)의 등장을 예고했다. 그는 영원한 세계와 절대적 가치를 부정했다. 그에게는 저 세상과 저 세상의 신이 들어설 여지가 한 톨도 없었다. 그에게는 스트롱맨을 갈구하는 자기 자신만 있었고 따를 신도, 기댈 신앙심도 없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의 삶만이 그에게 중요할 뿐이었다. 그는 스트롱맨으로 살고자 했으나 결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신이라는 우상, 종교라는 우상에 자기 철학적 망치를 휘두르는 데 성공하는 듯했으나 질병과 죽음이라는 운명의 반격에 일찌감치 무너졌다. 그는 10년간 정신병동에서 조울증, 만성적 편두통, 정신발작, 과대망상, 자살충동에 시달리다가 쓸쓸히 죽어갔다. 목사 할아버지, 목사 딸 할머니, 목사 아버지, 목사 딸 어머니의 가정에서 그는 어떤 어려움을 겪었던 것일까. 가짜 신과 왜곡된 신, 가짜 종교와 왜곡된 종교를 깨부수는 데서 더 나아가 진짜 신, 진짜 종교를 발견할 수는 없었을까?"


정말 니체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독자인 나는 니체가 기독교의 많은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한 부분은 맞다고 일부는 인정은 하지만 오히려 비신앙적인 자들에게 쾌재를 부르게 한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더 많은 안티크리스트를 많이 만들어내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저자는 니체가 실제적 예수를 가져오게 했으며 또한 "니체는 기독교의 독(毒)이 아니라 오히려 해독제이며 복(福)이라"고 하니 한 번 제대로 그것을 살펴 보고자 한다. 과연 니체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표현될 정도의 인물이 맞는가?

이 책의 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안티크리스트』를 그대로 따랐다. 『안티크리스트』처럼 서문부터 62개로 나누어진 주제에 따라 기술했다. 1부에서는 니체의 하나님, 예수에 대한 이해와 『안티크리스트』에 대한 안내를 담았다. 여기서 저자는 이 책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를 지적하며 대변인처럼 말한다. 2부에서는 『안티크리스트』의 말과 형식, 그리고 그 배움을 토대로 새롭게 창조하며 62개의 주제를 서술한다. ‘니체의 그릇’에 저자의 신학적 사상을 담았다. 3부에서는 니체가 기독교 혹은 교회, 진리, 성직자, 그리고 신 없는 세상에서 삶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선별하여 담았다. 여기서 독자들은 그의 신, 예수, 복음에 관한 생각과 기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견하도록 한다. 물론 얼마나 니체의 대변자로서 잘 변호해 줄지를 약간은 비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신약성경을 읽을 때는 손 장갑을 끼는 편이 좋다.

그렇게나 불결한 것을 가까이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 p22

신약성경에 대한 니체의 혹독한 비판이다. 지금 니체는 그 성경을 읽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성경 그 자체를 "더러운 책"이라고 조롱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니체의 주장을 "잘못된 기독교에 대한 도끼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니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것이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에 깊이 뿌리내린 자들이 제대로 비판하거나 옹호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전통 기독교의 수준이 지적 능력의 한계, 혹은 참 예수 신앙이 없기 때문에 비판도 옹호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뭔 뜬금없는 작태인지 모르겠다. 앞뒤 논리도 없는 맥락으로 그저 니체를 찬양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사실 그들은 니체를 미워할 자격조차 없다. 오히려 그의 인간적 고뇌와 불행했던 삶에 깊은 연민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뜬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p.22-23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니체의 외침은 니체의 사상은 잘 몰라도 어디선가 들어 알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니체의 이 외침을 잘못 정의되고 가르쳐진 하나님을 죽이고, 실제적 하나님은 살려낸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이 외침은 기독교가 자성해서 들어야 될 말이라고 한다. 물론 그가 외친 이면에는 서구 사회에서의 잘못된 기독교 하나님을 비판함으로 맹목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힌 신자들을 구출하는데 도움은 주었다. 즉 우상화되고 굳어버린 생명력 없는 기독교를 비판한 점은 좋다. 그러나 그가 말한 신의 죽음은 성경 안에서 전해진 실제적 하나님을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결코 오염된 신을 죽었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와 과학의 부상과 더불어 인간 중심의 세계관은 이성을 통해 신을 충분히 밀어내기에 좋은 시기였다. 이런 문명사적 전환은 이제 더 이상 신을 믿을 수 없게 된 시대로 나아갔다. 여기에 니체가 크게 사상적 전화를 주어 인간은 신 없이도 스스로 법을 만들고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위버멘쉬(초인)"의 삶이 도래했음을 강력히 말한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성경과 기독교 전통이 가르쳐온 모든 진리와 거기서 나오는 도덕과 복종과 희생은 "노예의 도덕"이니 결코 따를 필요가 없고, 이젠 더 진실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한다. 저자는 여기에 관해 "니체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위선과 타락을 꿰뜷어 본 자이며, 오히려 더 진실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독자가 계속 말하는 거지만 잘못 전해진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비판은 좋지만 니체가 원한 것은 성경 자체 모두를 거부하고, 자기 존재 방식의 삶을 신 없이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순결하게 전해진 진리나 실제적 하나님을 죽이고 삭제하는 방식으로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그를 옹호하는 발언은 니체가 얼마나 망언을 하는 수준까지 갔는지를 알고 그를 옹호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하였고, 그리스도 위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추종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은 글을 쓴 시대나 나중에도 아무도 이해를 못하는 글이라 하며 도덕과 선의 기준을 자신으로 삼는다.

그렇다. 니체가 파괴 시키려고 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며, 기독교가 범한 죄를 속죄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말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도 버렸다"는 말처럼 실제적인 하나님을 버리는데까지 간 것은 그의 큰 오만일 것이다.

저자는 계속 니체를 옹호하며 변호하는 쪽으로 책을 서술해 나간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언급하기를 "이 위대한 사상가이자 기독교 증오자인 니체가 기독교를 간질병에 걸린 종교라 말하고, 세계 문명의 독이라 말하고, 영원한 오점이라 말하고, 흠험한 사도라 말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신앙에 한 점, 한 티의 손산도 끼치도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가 오염시킨 하나님을 미워함으로 참 하나님을 찾게 하는 '가치의 전도를 시도한 니체는 예수의 복음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이어야 하는지, 교회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하며 니체를 앞서가는 자, 길을 밝히는 자, 오히려 예수 복음의 위대한 전도자인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라고 계속 끼어 넣기 하는데, 이런 저자의 외침은 상당히 불편한 점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독교가 심하게 망치로 얻어 맞아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망치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멋진 가구가 되기도 하고, 폐물과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독과 해독제를 주었다. 독이라 한다면 무신론자들에게는 더 악랄하게 기독교를 넘어 성경을 혹독하게 비판하도록 하였으며, 해독제라 한다면 자성적 기독교인들에게는 니체를 통해 참된 기독교를 찾도록 도와 주었다. 그러나 어중간한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이 있는데 즉 교회라는 곳을 오고 가지만 성경이 가르친 신에게서 해방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어서 그 신에게 의존하고 사는 것을 나약함이라 치부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자를 향해서는 그 자신이 도덕이며 윤리적 기준이라 하여 자기 존재적 신을 믿고 따르게 한다. 결국 성경을 믿는 자는 무지한 신화를 믿는 자이기에 니체는 기존의 안티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버멘쉬의 길을 열어주었다. 즉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자아상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기존의 도덕과 사회적 관습, 종교적 가르침은 자신의 기준에서 선택 사항이 되었고,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시대를 가져 오게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도한 자로 서 있다. 신에게서 해방을 원하는 자들에게 니체는 메시야가 되었고, 실제 니체는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자신이 진리임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저자 자신이 니체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가 쓴 책(반 그리스도)에서는 사실 불교와 함께 두 종교 모두를 ‘퇴폐적’(데카당트) 종교로 규정하는 입장이다.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본능과 삶의 에너지를 억압하고, 약자와 고통받는 자를 미화하며,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저편 세계(천국, 이데아 등)만을 강조하는 도덕 체계로 보면서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결국 신 없는 삶의 세계를 열어주는 길목이 되었다.

그러므로 독자는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설득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읽었다. 더군다나 저자 자신은 이 책을 쓰면서 '생각 있는 극소수의 기독교인'을 위한 책이라고 하며, 아마 기독교인 중 대다수는 이 글을 이해할 수도 없고, 혹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며 이해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지하다고 보는데 상당히 오만한 입장이지 않나 생각된다. 니체는 기존 사회나 종교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 자라는 것은 동의한다. 그는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면서 자정적 요소를 기독교와 사회에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 자정적 요소들이 지나치다 못해 절대 진리를 부정함으로 긍정적인 신 이해를 다 망가뜨렸다. 현대인들은 니체의 다원주의·상대주의가 오늘날 시대정신에 맞다고 떠받들고 있지만 백금산 목사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니체는 가장 호전적이고 가장 강력한 기독교의 적대적 원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체의 기독교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그의 말년의 모습과 그가 쓴 책들은 깊은 신앙적 이해에서 볼 때는 자연스럽게 거부가 된다. 따라서 저자의 논점은 이해가 가지만 니체의 기독교를 향한 그 관심과 증오는 결코 한때 예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증오였고, 진리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므로 니체는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가 아닌 끝까지 예수를 이해 못하고 목메달아 죽은 가롯유다가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 의견이니 저자는 너무 과민한 반응이나 욕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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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김정은
김금숙 지음 / 이숲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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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카페에 소개되어 설마하고 검색 했는데 책이 버젓이 있다니 놀랍다 못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ㅠㅠ 북한 추종자 책은 알라딘에서 내려라 그리고 북한을 그렇게 추종하면 그쪽에 가서 살아라. 김정은이가 얼마나 잘해줄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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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의 서양 철학사 - 더 크고 온전한 지혜를 향한 철학의 모든 길
탁석산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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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단어는 언제가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되었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깊음을 그 누구보다 고민한 흔적을 가진자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철학의 정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으로, 존재, 지식, 가치, 정신, 언어 등을 다루는 학문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에서 유래했으며,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철학은 본질적으로 반성적 인식이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철학이란 이론적 영역 안에서의 진리의 인식, 실천적 인식 안에서의 가치의 인식이란 말로 정의가 된다. 일단 철학이란 "왜?"라는 질문을 통해 존재, 앎, 윤리 등을 탐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은 존재하는가?", "삶에 목적이 있을까?", "무엇이 옳고 그른가?"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한 계속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허덕이는 가운데 본 도서인 『탁석산의 서양 철학사』를 보며,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특별히 이 책을 선택하여 읽게 된 이유라면 이 책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이 홀로 걸어온 길이 아닌, 신학·과학·신비주의와의 얽힘과 대립, 공존 속에서 형성해 온 거대한 지적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철학은 신비주의, 연금술, 마술 등과 오랜 세월 함께해 왔다. 그러므로 저자는 서양 철학의 역사를 온전히 살피려면, 계몽주의 이후 유폐된 오컬트의 영역까지 두루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영화나, TV, 유튜브를 보면 오컬트에 관한 부분이 많이 다루어진다. 물질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숨겨진 지식",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악마" 등과 같은 것을 인간은 호기심 가득 탐구하는 본능이 있다. 저자는 그런 본능을 끌어 올리며 독특한 시선으로 본 책을 서술해 나간다. 이런 책의 종류가 누군가를 통해서는 나와 주었으면 했는데 이제야 나왔고, 그는 읽는이로 하여금 신선함을 느끼도록 해준다.

일단 이 책은 창의성은 없다고 밝힌다. 저자는 철학사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목적을 가지고 책을 만들었다. 그래서 기본에 충실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어려운 주제별 분석이 아니라 철학자 위주로 소개한다. 물론 그는 좋은 자료를 참고하여서 책을 써내려 갔다.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이 쓴 철학사가 전문 철학으로 훈련 받은 자가 읽는 책이 아닌 철학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 편한 구도로 책을 만들었다. 따라서 〈철학 입문서〉이자 〈철학사 맥락 읽기〉 안내서다.

소설 읽듯 편하게 읽으며

여러분의 철학을 시작해 보세요

탁석산

책의 구성은 고대 이후 현대까지 서양 철학 2500년사의 사상의 흐름을 살핀다. 그리고 철학과 이성, 신비 사이에서 길을 물으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시 말해 철학의 이성, 신학의 사색, 과학의 권위, 신비주의/에소테리시즘의 사유를 그 학문들 사이의 관계성 안에서 담아 올리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독자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그건 철학사는 이성을 무기로 온갖 사유와 맞서 싸운 철학자들의 모험기인데, 그 모험기에서 자기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를 바라고 있다. 나라는 자아와 가치관은 그 누구의 관념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사는 자가 아니다. 많은 철학적 사유를 결국 내 것으로 만들어 살아야 한 사람의 철학 인생이 나오는 것이다. 신은 다양한 사고를 가진 자들을 환영한다. 물론 그것이 사물과 자연과 인간에게 해(害)되는 생각이라면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철학은 인류애를 가진 철학이어야 하며, 거기에 신이라는 독특한 신비 사상이 들어갈 때 인간은 신과의 합일이라는 것 속에서 조화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책을 보면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이성과 신비의 공생과 공존'이 있었음을 가르쳐 준다. 서양 철학의 출발점은 이성과 신비의 경계였다. 그러나 고대 철학자들은 철학과 신비주의의 경계를 허물었다. 특히 플라톤은 철학자이지만, 그의 사상은 이후 신플라톤주의, 기독교 신학, 근대 오컬트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중세 시대에 철학과 신학이 결합한 시기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 대표적인 기독교 인물 중에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 체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참고했고, 또한 이교의 신비 전통은 가톨릭 체계 안으로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당시 신비주의는 교회 내에서 진지한 검토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중세에 철학은 신학 및 신비주의와 〈공생〉과 〈공존〉의 구도를 띠며, 인간 존재의 근원과 신의 본질을 해석하는 공동의 질문에 응답해 나아간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거치며 철학은 신학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 시기 철학자들은 인간 중심의 사유로 회귀하면서 인간의 능력, 이성, 주체성에 주목했다. 특히 데카르트는 철학의 출발점을 회의에 두며, 외부 세계보다 내면의 사유 주체에서 출발하는 철학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한편 이 시기에는 철학과 오컬트의 〈분리〉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 계몽주의는 에소테리시즘을 미신으로 규정하며 학문 밖으로 밀어냈고, 야콥 브루커는 철학사를 〈이성의 역사〉로 재정의하며 에소테리시즘(신비주의 철학)과 종교를 배격하려 했다. 그리고 철학은 실존과 해체의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쇼펜하우어 같은 경우는 이성 대신 의지를 강조하였고, 니체는 이성과 윤리의 기원을 의심하였다. 결국 계몽주의 이후의 철학은 이성의 승리를 선언하는 동시에, 이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성찰로 전환되어 갔으며, 그리고 이것은 자기반성으로 전개되며 인간과 세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성찰의 장이 되었고, 이는 현대 철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현대 철학으로 와서는 또 다시 공존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즉 철학, 신비주의, 종교, 과학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재구성되어 새로운 융합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어느 것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더 깊이 알기 위해 지금의 철학자들과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있다.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직관과 통찰, 계시와 신비적 현상을 통해 오히려 과학과 이성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책은 쉽게 써졌지만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란 것이 결코 역사적으로 오컬트(숨겨진 지식)와 분리되지 않고 신비주의 영역을 빙빙 돌아 다녔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된 것이다. 숨겨진 것이 나타난 것보다 아무래도 매력이 있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더 큰 세계, 더 온전한 지혜로 나아가려면 이런 책 하나는 읽어주는 것이 맞다.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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