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심리학 카페 - 11주년 특별 개정판, 흔들리는 삶의 중심을 되찾는 29가지 마음 수업
모드 르안 지음, 김미정 옮김 / 클랩북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세계 언론이 주목한 전설의 ‘심리학 카페(Cafe-Psy)’

*** 파리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심리학자 1위

*** 10년간 지속된 한국 독자의 리뷰 “나를 울린 인생 책”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울어 본 적 있나요?”

연약한 마음을 마주할 때, 비로소 단단해지는 삶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책이다. 얼마나 좋은 책이기에 독자 리뷰부터 시작해서 특히 ‘파리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심리학자’라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한국 독자에게 무려 10년간 "나를 울린 인생 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니 그 책이 궁금함은 당연한 것이다.

책의 표지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린 시절을 지나 스물세 살에 첫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과 사별하고 깊은 우울증을 겪었다. 엉망이 된 삶 속에서 문득 과거의 아픔 때문에 자신의 현재를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10년간 정신 분석 치료를 받으며 마음을 회복해 갔다. 과거의 자신처럼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사람들, 자신의 상처를 모른 체하며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들을 두고 볼 수 없어 1977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에콜 파리지엔 드 게슈탈트(ecole parisienne de Gestalt)에서 게슈탈트 심리 치료를 공부하며 심리 치료사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에서 철학적인 담론을 나누는 ‘철학 카페’가 유행하는 데 반해 내면의 이야기를 나눌 곳은 많지 않다는 걸 깨달은 르안은 한잔하러 가듯 편안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공간인 ‘심리학 카페(Caf?-Psy)’를 만들었다. 매주 목요일 7시가 되면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바스티유의 한 지하 카페에 모여 일, 사랑, 인간관계에 관한 온갖 고민을 주고받았고 18년간 총 916번에 걸쳐 5만 명이 넘는 사람이 다녀간 특별한 치유 공간으로 기록되었으며, 이곳에서 나눈 이야기 중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것을 충분히 각색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파리의 심리학 카페》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책이 주는 묘미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맛집이라도 자신에게는 맛집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책은 모든 이가 좋아하며, 고전의 반열에 올라 놓아도 고개를 끄덕이는 책이 있다. 과연 광고 마케팅일까? 아니면 그 책이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만지는 책일까?

일단 북디자인과 편집 구성이 좋다. 카피해 놓은 글들 또한 독자에게 상당히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일단 읽어 보았다. 그런데 말이다. 책이 술술 읽힌다. 그리고 책에 웬만하면 줄을 잘 안친다. 특별하게 이 책은 내 인생의 책이라는 것에만 정성껏 줄을 치고 표시를 한다. 그런데 저자의 글 하나하나가 독자인 나에게 인생의 이치를 깨우치도록 인도해 주며, 인간 존재의 심연을 건들어 고통을 마주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응석받이에서 언제든지 일어나도록 격려하며 따뜻한 채근으로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첫 번째 카페에서 만난 한 사람을 통해 저자의 결심은 이러하다.

저는 그때 결심했어요. 힘든 줄도 모르고 정신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심리학 카페가 자신을 돌아보는 장소가 되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고요.

p.16

세상에는 생각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힘들게 살고 있다가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누구에게나 위로와 힘을 주고 깨우침을 주며 과거의 고통에서 해방하도록 돕는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그런 고통의 저변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왔기에 심리학 카페를 찾은 사람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실제적인 아픔의 공감대를 형성해 주고 있어, 일종의 기댈 큰 언덕과 같은 존재로서 위안자가 되고 있다.

첫 모임 4명을 시작으로 시작하여 18년간 총 5만 명의 사람이 이 심리학 카페에 다녀갔다고 하는데 얼마나 위안이 되었으면 사람들이 끝없이 이곳을 찾았을까? 그래서 영국 〈인디펜던트〉, 프랑스 〈리베라시옹〉 등 세계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곳에서 나눈 이야기 중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것을 충분히 각색하여 엮은 최초의 책이다. '인생의 쓴맛'이 있는 사람들은 꼭 들려보면 좋은 맛집임을 분명 알게 된다. 그래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는 책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분명 이 책은 "잃어버린 나를 되찾게 해주는 책이었다." 저자가 말하듯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애정과 위로가 있어야 하고’, ‘나를 이해하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살 만해진다’는 것을 몸소 깨달으며, 마흔이 넘은 나이에 심리학을 공부하여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는 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

나만 홀로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p.19

고통의 동질성은 생각보다 위로가 크다. 즉 누구에게나 고통은 일어나며, 그 고통을 나눌 때는 항상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런 나눔 속에서 오히려 위안을 얻고, 그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나도 얼마든지 살아낼 자신이 있다는 작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불행은 남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삶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큰 사건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행한 일을 겪는 과정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그 불행 또한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결국 잘 대처하며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p.27, 31

저자는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 고통 속에 갇혔었다. "저는 너무도 화가 나 신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거리를 활보하는 모든 사람이 미웠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미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충분히 해 주지 못했으면서... 작은 일에 토라지고 투정만 부렸던 제가 싫어서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술만 마시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렇게 1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씩 커나가며 엄마라고 그래도 말을 할 정도가 되었을 때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다. 다행히도 일찍 깨달았다.

"저는 문득 과거의 불행을 곱씹느라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와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야 할 소중한 시간을, 저는 세상을 증오하는데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나와 아이 인생의 걸림돌로 만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였습니다. 내가 불러들인 불행이 내 아이의 가장 빛나야 할 시절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어요. 그건 먼저 간 남편도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술을 끊고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굴레를 벗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선택한 거지요" p. 30

그렇다. 진정한 불행은 불행한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 좋은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에 있다. 불운한 일을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행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의 선택인 것이다. 무엇보다 과거의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를 해야함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거의 상처는 끊임없이 되살아나 현재의 나를 괴롭히며, 주변 가족들도 괴롭히게 된다.

또한 여기서 다 알지만 또 배우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는 거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면 되고, 흔들리겠지만 그럴 땐 내가 나를 칭찬해 주면 된다고 가르쳐 준다. 셀프 칭찬을 통해 다른 사람을 통한 인정 중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앞으로는 비난을 받든, 칭찬을 받든, 누가 뭐라 말하건

나는 내 생각에 따르겠다. _ 라 퐁텐 『우화』

그런데 오히려 칭찬이 나를 억눌렀습니다. 강한 나를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공부가 힘들어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법도 잊고 살았습니다.

p. 164,170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안에 있는 옳지 않는 감정을 처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특히 ‘어려운 전문 용어 없이도 심리학적 통찰을 건네고 우리도 몰랐던 내면의 아픔을 해소하게 해 주는 책’이라는 평가가 정확하다.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은 이 책은 사람들이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면의 불안과 우울, 상실의 아픔, 가까운 이에게 받은 상처, 번아웃에 관한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용기와 바른 마음 자세를 가지게 한다. 이 책은 위로가 각박해진 시대에 ‘자기 돌봄’의 시작점이 되어 줄 책이다. 심리학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게해주는 쉬우면서도 명쾌한 이 책으로 당신의 삶도 상담을 받으면 좋겠다.

"살면서 한 번쯤

마음 놓고 울 시간이

필요하다"


*심리학자 모드 르안의 5가지 조언

1. 나조차 모르는 내면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위해, 살면서 한 번쯤은 마음 놓고 울어 볼 것.

2. 누구도 나를 상처 주게 두지 말 것. 설령 그 사람이 부모일지라도.

3. 사랑이 떠나가도 나는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질 것.

4.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소통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 것.

5. 긴 인생 앞에서, 어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기둥을 세울 것.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을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들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p. 32

우리의 마음은 무쇠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도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 나조차 내 감정을 무시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p. 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 예수의 13번째 제자 - 니체가 가장 만족한 저서 『안티크리스트』 거꾸로 읽기
김진 지음 / 스타북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저자 김진이라는 분은 TV 매체를 통해서 접한적이 있다. 기독교인 가운데서 리버럴한 분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렇기에 그가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 흔히 알고 있는 정통 기독교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분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니체에 대해 기존 기독교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려고 이 책을 썼다. 기존의 기독교는 니체를 강하게 비판한다. 즉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 니체는 흔히 허무주의, 염세주의, 무신론과 함께 언급된다. 따라서 니체는 기독교에서 금기시해 온 인물이다. 그러나 이어령 박사도 언급했다고는 하는데 니체에 관해 잘못 알려진 오해가 많기에 니체를 제대로 알면 오히려 이 세상에 무신론자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이것은 이어령 교수의 섣부른 생각이었지 않나하는 아쉬움이다. 그렇다. 니체를 좋게 생각하는 자들은 "니체가 비판한 건 예수가 아닌 제도화된 기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인 저작들과 그가 내뱉은 말과 글들은 오히려 반기독교적이며 안티크리스트임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자인 내가 왜 이 부분부터 말하느냐 하면, 나 또한 저자와 이어령 교수와 다를 바 없이 니체는 잘못된 기독교와 잘못 알려진 하나님에 대해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이지 실제적 신은 오히려 더 니체를 통해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저작들과 그에 관한 책을 쓴 다른 저자를 통해서 볼 때 니체는 단단히 자신이 믿고 따랐던 그 신을 철저히 죽였고, 조롱하였다. 물론 니체를 통해 그릇되고 오용되며, 실제 성경에서 전해진 진리와 멀어진 타락한 기독교를 향해 망치질을 하면서 기독교의 자성과 개혁을 이루게 하는데 일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전개해 나간 모든 저작들을 보면 과연 그러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어떤 분이 그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을 소개해 본다.

"니체는 모든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모든 종교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자율적 스트롱맨(Übermensch, Overman)의 등장을 예고했다. 그는 영원한 세계와 절대적 가치를 부정했다. 그에게는 저 세상과 저 세상의 신이 들어설 여지가 한 톨도 없었다. 그에게는 스트롱맨을 갈구하는 자기 자신만 있었고 따를 신도, 기댈 신앙심도 없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의 삶만이 그에게 중요할 뿐이었다. 그는 스트롱맨으로 살고자 했으나 결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신이라는 우상, 종교라는 우상에 자기 철학적 망치를 휘두르는 데 성공하는 듯했으나 질병과 죽음이라는 운명의 반격에 일찌감치 무너졌다. 그는 10년간 정신병동에서 조울증, 만성적 편두통, 정신발작, 과대망상, 자살충동에 시달리다가 쓸쓸히 죽어갔다. 목사 할아버지, 목사 딸 할머니, 목사 아버지, 목사 딸 어머니의 가정에서 그는 어떤 어려움을 겪었던 것일까. 가짜 신과 왜곡된 신, 가짜 종교와 왜곡된 종교를 깨부수는 데서 더 나아가 진짜 신, 진짜 종교를 발견할 수는 없었을까?"


정말 니체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독자인 나는 니체가 기독교의 많은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한 부분은 맞다고 일부는 인정은 하지만 오히려 비신앙적인 자들에게 쾌재를 부르게 한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더 많은 안티크리스트를 많이 만들어내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저자는 니체가 실제적 예수를 가져오게 했으며 또한 "니체는 기독교의 독(毒)이 아니라 오히려 해독제이며 복(福)이라"고 하니 한 번 제대로 그것을 살펴 보고자 한다. 과연 니체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표현될 정도의 인물이 맞는가?

이 책의 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안티크리스트』를 그대로 따랐다. 『안티크리스트』처럼 서문부터 62개로 나누어진 주제에 따라 기술했다. 1부에서는 니체의 하나님, 예수에 대한 이해와 『안티크리스트』에 대한 안내를 담았다. 여기서 저자는 이 책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를 지적하며 대변인처럼 말한다. 2부에서는 『안티크리스트』의 말과 형식, 그리고 그 배움을 토대로 새롭게 창조하며 62개의 주제를 서술한다. ‘니체의 그릇’에 저자의 신학적 사상을 담았다. 3부에서는 니체가 기독교 혹은 교회, 진리, 성직자, 그리고 신 없는 세상에서 삶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선별하여 담았다. 여기서 독자들은 그의 신, 예수, 복음에 관한 생각과 기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견하도록 한다. 물론 얼마나 니체의 대변자로서 잘 변호해 줄지를 약간은 비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신약성경을 읽을 때는 손 장갑을 끼는 편이 좋다.

그렇게나 불결한 것을 가까이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 p22

신약성경에 대한 니체의 혹독한 비판이다. 지금 니체는 그 성경을 읽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성경 그 자체를 "더러운 책"이라고 조롱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니체의 주장을 "잘못된 기독교에 대한 도끼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니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것이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에 깊이 뿌리내린 자들이 제대로 비판하거나 옹호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전통 기독교의 수준이 지적 능력의 한계, 혹은 참 예수 신앙이 없기 때문에 비판도 옹호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뭔 뜬금없는 작태인지 모르겠다. 앞뒤 논리도 없는 맥락으로 그저 니체를 찬양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사실 그들은 니체를 미워할 자격조차 없다. 오히려 그의 인간적 고뇌와 불행했던 삶에 깊은 연민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뜬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p.22-23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니체의 외침은 니체의 사상은 잘 몰라도 어디선가 들어 알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니체의 이 외침을 잘못 정의되고 가르쳐진 하나님을 죽이고, 실제적 하나님은 살려낸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이 외침은 기독교가 자성해서 들어야 될 말이라고 한다. 물론 그가 외친 이면에는 서구 사회에서의 잘못된 기독교 하나님을 비판함으로 맹목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힌 신자들을 구출하는데 도움은 주었다. 즉 우상화되고 굳어버린 생명력 없는 기독교를 비판한 점은 좋다. 그러나 그가 말한 신의 죽음은 성경 안에서 전해진 실제적 하나님을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결코 오염된 신을 죽었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와 과학의 부상과 더불어 인간 중심의 세계관은 이성을 통해 신을 충분히 밀어내기에 좋은 시기였다. 이런 문명사적 전환은 이제 더 이상 신을 믿을 수 없게 된 시대로 나아갔다. 여기에 니체가 크게 사상적 전화를 주어 인간은 신 없이도 스스로 법을 만들고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위버멘쉬(초인)"의 삶이 도래했음을 강력히 말한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성경과 기독교 전통이 가르쳐온 모든 진리와 거기서 나오는 도덕과 복종과 희생은 "노예의 도덕"이니 결코 따를 필요가 없고, 이젠 더 진실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한다. 저자는 여기에 관해 "니체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위선과 타락을 꿰뜷어 본 자이며, 오히려 더 진실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독자가 계속 말하는 거지만 잘못 전해진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비판은 좋지만 니체가 원한 것은 성경 자체 모두를 거부하고, 자기 존재 방식의 삶을 신 없이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순결하게 전해진 진리나 실제적 하나님을 죽이고 삭제하는 방식으로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그를 옹호하는 발언은 니체가 얼마나 망언을 하는 수준까지 갔는지를 알고 그를 옹호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하였고, 그리스도 위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추종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은 글을 쓴 시대나 나중에도 아무도 이해를 못하는 글이라 하며 도덕과 선의 기준을 자신으로 삼는다.

그렇다. 니체가 파괴 시키려고 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며, 기독교가 범한 죄를 속죄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말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도 버렸다"는 말처럼 실제적인 하나님을 버리는데까지 간 것은 그의 큰 오만일 것이다.

저자는 계속 니체를 옹호하며 변호하는 쪽으로 책을 서술해 나간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언급하기를 "이 위대한 사상가이자 기독교 증오자인 니체가 기독교를 간질병에 걸린 종교라 말하고, 세계 문명의 독이라 말하고, 영원한 오점이라 말하고, 흠험한 사도라 말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신앙에 한 점, 한 티의 손산도 끼치도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가 오염시킨 하나님을 미워함으로 참 하나님을 찾게 하는 '가치의 전도를 시도한 니체는 예수의 복음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이어야 하는지, 교회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하며 니체를 앞서가는 자, 길을 밝히는 자, 오히려 예수 복음의 위대한 전도자인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라고 계속 끼어 넣기 하는데, 이런 저자의 외침은 상당히 불편한 점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독교가 심하게 망치로 얻어 맞아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망치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멋진 가구가 되기도 하고, 폐물과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독과 해독제를 주었다. 독이라 한다면 무신론자들에게는 더 악랄하게 기독교를 넘어 성경을 혹독하게 비판하도록 하였으며, 해독제라 한다면 자성적 기독교인들에게는 니체를 통해 참된 기독교를 찾도록 도와 주었다. 그러나 어중간한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이 있는데 즉 교회라는 곳을 오고 가지만 성경이 가르친 신에게서 해방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어서 그 신에게 의존하고 사는 것을 나약함이라 치부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자를 향해서는 그 자신이 도덕이며 윤리적 기준이라 하여 자기 존재적 신을 믿고 따르게 한다. 결국 성경을 믿는 자는 무지한 신화를 믿는 자이기에 니체는 기존의 안티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버멘쉬의 길을 열어주었다. 즉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자아상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기존의 도덕과 사회적 관습, 종교적 가르침은 자신의 기준에서 선택 사항이 되었고,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시대를 가져 오게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도한 자로 서 있다. 신에게서 해방을 원하는 자들에게 니체는 메시야가 되었고, 실제 니체는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자신이 진리임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저자 자신이 니체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가 쓴 책(반 그리스도)에서는 사실 불교와 함께 두 종교 모두를 ‘퇴폐적’(데카당트) 종교로 규정하는 입장이다.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본능과 삶의 에너지를 억압하고, 약자와 고통받는 자를 미화하며,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저편 세계(천국, 이데아 등)만을 강조하는 도덕 체계로 보면서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결국 신 없는 삶의 세계를 열어주는 길목이 되었다.

그러므로 독자는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설득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읽었다. 더군다나 저자 자신은 이 책을 쓰면서 '생각 있는 극소수의 기독교인'을 위한 책이라고 하며, 아마 기독교인 중 대다수는 이 글을 이해할 수도 없고, 혹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며 이해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지하다고 보는데 상당히 오만한 입장이지 않나 생각된다. 니체는 기존 사회나 종교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 자라는 것은 동의한다. 그는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면서 자정적 요소를 기독교와 사회에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 자정적 요소들이 지나치다 못해 절대 진리를 부정함으로 긍정적인 신 이해를 다 망가뜨렸다. 현대인들은 니체의 다원주의·상대주의가 오늘날 시대정신에 맞다고 떠받들고 있지만 백금산 목사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니체는 가장 호전적이고 가장 강력한 기독교의 적대적 원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체의 기독교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그의 말년의 모습과 그가 쓴 책들은 깊은 신앙적 이해에서 볼 때는 자연스럽게 거부가 된다. 따라서 저자의 논점은 이해가 가지만 니체의 기독교를 향한 그 관심과 증오는 결코 한때 예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증오였고, 진리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므로 니체는 예수의 열세 번째 제자가 아닌 끝까지 예수를 이해 못하고 목메달아 죽은 가롯유다가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 의견이니 저자는 너무 과민한 반응이나 욕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친구 김정은
김금숙 지음 / 이숲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카페에 소개되어 설마하고 검색 했는데 책이 버젓이 있다니 놀랍다 못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ㅠㅠ 북한 추종자 책은 알라딘에서 내려라 그리고 북한을 그렇게 추종하면 그쪽에 가서 살아라. 김정은이가 얼마나 잘해줄까 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탁석산의 서양 철학사 - 더 크고 온전한 지혜를 향한 철학의 모든 길
탁석산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이라는 단어는 언제가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되었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깊음을 그 누구보다 고민한 흔적을 가진자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철학의 정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으로, 존재, 지식, 가치, 정신, 언어 등을 다루는 학문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에서 유래했으며,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철학은 본질적으로 반성적 인식이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철학이란 이론적 영역 안에서의 진리의 인식, 실천적 인식 안에서의 가치의 인식이란 말로 정의가 된다. 일단 철학이란 "왜?"라는 질문을 통해 존재, 앎, 윤리 등을 탐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은 존재하는가?", "삶에 목적이 있을까?", "무엇이 옳고 그른가?"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한 계속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허덕이는 가운데 본 도서인 『탁석산의 서양 철학사』를 보며,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특별히 이 책을 선택하여 읽게 된 이유라면 이 책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이 홀로 걸어온 길이 아닌, 신학·과학·신비주의와의 얽힘과 대립, 공존 속에서 형성해 온 거대한 지적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철학은 신비주의, 연금술, 마술 등과 오랜 세월 함께해 왔다. 그러므로 저자는 서양 철학의 역사를 온전히 살피려면, 계몽주의 이후 유폐된 오컬트의 영역까지 두루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영화나, TV, 유튜브를 보면 오컬트에 관한 부분이 많이 다루어진다. 물질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숨겨진 지식",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악마" 등과 같은 것을 인간은 호기심 가득 탐구하는 본능이 있다. 저자는 그런 본능을 끌어 올리며 독특한 시선으로 본 책을 서술해 나간다. 이런 책의 종류가 누군가를 통해서는 나와 주었으면 했는데 이제야 나왔고, 그는 읽는이로 하여금 신선함을 느끼도록 해준다.

일단 이 책은 창의성은 없다고 밝힌다. 저자는 철학사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목적을 가지고 책을 만들었다. 그래서 기본에 충실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어려운 주제별 분석이 아니라 철학자 위주로 소개한다. 물론 그는 좋은 자료를 참고하여서 책을 써내려 갔다.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이 쓴 철학사가 전문 철학으로 훈련 받은 자가 읽는 책이 아닌 철학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 편한 구도로 책을 만들었다. 따라서 〈철학 입문서〉이자 〈철학사 맥락 읽기〉 안내서다.

소설 읽듯 편하게 읽으며

여러분의 철학을 시작해 보세요

탁석산

책의 구성은 고대 이후 현대까지 서양 철학 2500년사의 사상의 흐름을 살핀다. 그리고 철학과 이성, 신비 사이에서 길을 물으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시 말해 철학의 이성, 신학의 사색, 과학의 권위, 신비주의/에소테리시즘의 사유를 그 학문들 사이의 관계성 안에서 담아 올리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독자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그건 철학사는 이성을 무기로 온갖 사유와 맞서 싸운 철학자들의 모험기인데, 그 모험기에서 자기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를 바라고 있다. 나라는 자아와 가치관은 그 누구의 관념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사는 자가 아니다. 많은 철학적 사유를 결국 내 것으로 만들어 살아야 한 사람의 철학 인생이 나오는 것이다. 신은 다양한 사고를 가진 자들을 환영한다. 물론 그것이 사물과 자연과 인간에게 해(害)되는 생각이라면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철학은 인류애를 가진 철학이어야 하며, 거기에 신이라는 독특한 신비 사상이 들어갈 때 인간은 신과의 합일이라는 것 속에서 조화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책을 보면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이성과 신비의 공생과 공존'이 있었음을 가르쳐 준다. 서양 철학의 출발점은 이성과 신비의 경계였다. 그러나 고대 철학자들은 철학과 신비주의의 경계를 허물었다. 특히 플라톤은 철학자이지만, 그의 사상은 이후 신플라톤주의, 기독교 신학, 근대 오컬트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중세 시대에 철학과 신학이 결합한 시기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 대표적인 기독교 인물 중에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 체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참고했고, 또한 이교의 신비 전통은 가톨릭 체계 안으로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당시 신비주의는 교회 내에서 진지한 검토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중세에 철학은 신학 및 신비주의와 〈공생〉과 〈공존〉의 구도를 띠며, 인간 존재의 근원과 신의 본질을 해석하는 공동의 질문에 응답해 나아간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거치며 철학은 신학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 시기 철학자들은 인간 중심의 사유로 회귀하면서 인간의 능력, 이성, 주체성에 주목했다. 특히 데카르트는 철학의 출발점을 회의에 두며, 외부 세계보다 내면의 사유 주체에서 출발하는 철학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한편 이 시기에는 철학과 오컬트의 〈분리〉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 계몽주의는 에소테리시즘을 미신으로 규정하며 학문 밖으로 밀어냈고, 야콥 브루커는 철학사를 〈이성의 역사〉로 재정의하며 에소테리시즘(신비주의 철학)과 종교를 배격하려 했다. 그리고 철학은 실존과 해체의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쇼펜하우어 같은 경우는 이성 대신 의지를 강조하였고, 니체는 이성과 윤리의 기원을 의심하였다. 결국 계몽주의 이후의 철학은 이성의 승리를 선언하는 동시에, 이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성찰로 전환되어 갔으며, 그리고 이것은 자기반성으로 전개되며 인간과 세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성찰의 장이 되었고, 이는 현대 철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현대 철학으로 와서는 또 다시 공존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즉 철학, 신비주의, 종교, 과학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재구성되어 새로운 융합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어느 것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더 깊이 알기 위해 지금의 철학자들과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있다.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직관과 통찰, 계시와 신비적 현상을 통해 오히려 과학과 이성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책은 쉽게 써졌지만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란 것이 결코 역사적으로 오컬트(숨겨진 지식)와 분리되지 않고 신비주의 영역을 빙빙 돌아 다녔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된 것이다. 숨겨진 것이 나타난 것보다 아무래도 매력이 있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더 큰 세계, 더 온전한 지혜로 나아가려면 이런 책 하나는 읽어주는 것이 맞다.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왜 고전이 좋았을까 - 오래된 문장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
신은하 지음 / 더케이북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은 지나간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풍파를 견뎌낸 문장들이다.”

 

고전이란 그 말 자체에는 무언가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현대인들이 쓰는 글과는 다른 인생 근저의 생각들이 언어적 원숙함과 함께 독특한 문체로 구성되어져 있다. 마치 오래된 보물을 캐내는 쾌감을 고전을 읽으면서 느낀다. 읽으면 읽을수록 가치가 품어져 나오는 책이 바로 고전이다. 그러나 어떤 고전은 마크 트웨인이 말하듯 지루함과 방대한 양에서 고개를 돌리게 만들기도 한다. 즉 트웨인은 고전에 대해 말하기를 "고전이란 누구나 읽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읽고 싶은 생각이 없는 그런 것이다."고 말했다.

 

저자는 고전을 참 좋아하는 자임을 책을 읽으며 느낀다. 저자에게 있어 고전은 삶을 가로지르는 질문 앞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단한 등불과 같은 것임을 밝혔다. 저자는 자신이 읽은 고전을 다시 자신의 삶으로 풀어내며 명문장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책장을 넘기며 떠오른 기억들, 마음을 흔든 한 줄, 그리고 그 문장을 곱씹으며 자신을 다듬어온 시간들이 차분하게 펼쳐진다. 어떤 문장이라도 읽는 자에게 감동과 깨달음, 깊이 있는 사색을 주지 못한다면 고전이라고 하여도 결국 죽은 문장이다. 그러나 저자가 읽은 고전은 저자의 마음을 무수한 망치로 두들겨패며 훌륭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필요했던 문장이, 독자인 나에게도 필요한 문장으로 다가올 때면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미래에 산다하여도 앞서지 못한 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이란 어쩌면 한치도 앞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는 존재로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고전에서 주는 통찰과 가르침은 상당히 깊은 차원에서 끌어 올려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은 읽기가 편하다. 저자 자신이 책 모임을 사랑하는 독서 활동가로서 고등학교, 시립도서관, 숭례문학당 등에서 독서와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기에 책이 반듯하게 편집되고 군더더기 없이 기록되어 있다. 한 쳅터마다 길지 않게 기록되어 있으면서 짧지만 임펙트 있는 가독성으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손에 들기 편하여 이번 여름 휴가철에 가지고 간다면 결코 후회가 없는 책이라고 본다.

 

책의 구성은 파트 1에서 왜 저자는 고전이 좋았을까를 시작으로 주제별로 다섯 파트를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물론 어떤 지면은 더 고전의 내용을 소개해주면 좋겠는데 하며 아쉽게 끝내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결국 독자의 몫으로 남아서 고전이란 숲을 향해 들어가게 만든다. 어쩌면 이 책은 저자의 삶을 바탕으로 고전에서 만난 보화와 같은 글귀를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만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인가? 내가 수고하지도 않은 것을 저자의 수고로 진리의 광맥을 안겨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또한 같은 고전을 읽었음에도 저자가 보는 시선과 독자가 보는 시선이 매우 다름도 보게 된다. 결국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 지식의 깊이에 따라 책은 읽혀지는 것이다.

 

책에서 처음 마음을 두드린 글은 동양 고전 맹자진심 상(盡心 上)편에 나오는 글귀이다.

 

"유수지위물야(流水之爲物也)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이란 말이 나온다. "물이 흘러가다가 웅덩이를 만나면 그 웅덩이를 다 채우기 전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저자는 성경의 말씀 중에 하나인 욥기에 나오는 글을 함께 인용하며 말한다. 즉 욥기 23:10절 말씀에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

 

무슨 말인가? 살면서 웅덩이로 상징되는 어떤 고난이나 역경을 만날 때, 그 웅덩이를 다 채우는 '인내'의 시간과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이 지나가야 마침내 '순금'과 같은 인생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삶을 우리는 살다가 만난다. 저자는 그것이 몸의 병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자신이 계획했던 것을 다 멈추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만났다. 그러나 저자는 이때 조바심에 발을 동둥 구르기보다는, 깊이 파인 웅덩이를 보며 지금 건널 수 없는 고비라면 기꺼이 물을 채우며 기다리자고 말하며 조용히 도서관으로 나가 내공을 쌓는 시간으로 견녀냈다. 즉 원치 않는 몸의 질병, 회사 생활의 슬럼프, 인간관계의 갈등과 같은 갑자기 튀어나온 복병 같은 웅덩이 앞에, 맞서기 보다는 책장을 넘기며 밑줄을 긋고, 발췌하고, 단상을 적는 시간으로 물을 채워나갔다.

 

맹자에 글중에 또 다른 울림을 주는 문장이 나온다. "유위자비약굴정(有爲者辟若掘井) 굴정구인(掘井九軔) 이불급천(而不及泉) 유위기정야(猶爲棄井也)"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팠어도 샘물에 이르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버려진 우물이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웅덩이를 채우는 시간만큼이나 깊이 파내려가는 끈기가 필요함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 문장으로 보면 "중요한 건 꺽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삶이 힘들더라도 자살이란 것으로 인생을 끝내는 것은 어리석다. 인생은 누구나 고난이란 과정을 겪으며 웅덩이의 물을 채우는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독자도 여러 번의 아픔과 시련을 겪으면서 시간이 해결해 주는 순간을 겪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 것이 아닌 그저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버텨내고, 때론 꿈틀되면서 내 자신의 물웅덩이에 물을 채워나가는 시간을 가졌다. 결국 맹자의 말처럼 물이 채워지기까지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시 흐르게 되어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 책은 고전과 싸운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저자 자신이 삶의 문제를 모두 고전이란 문장 앞에서 멈추고 사색한 결과로 얻어진 글이다. 저자를 통해 새로운 고전 정보를 알게 되는 시간이 되어 좋았다. 이제 독자에게 남는 건 책을 살 것이냐 아니면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내딛느냐이다.

 

이 책의 한 문장

 

사랑은 존재의 자격을 묻지 않는다. 누구나 사랑받아야할 이유를 증명하지 않고도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할 자격 역시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p.127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인생에서 넌 무엇을 기대했나?"

 

- 존 윌리엄스 스토너p.168, 170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그대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헨리데이비드 소로우 월든p.233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p.2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