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인간
구경미 지음 / 열림원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노는 인간은 소속되어 있는 독서클럽에서 2월 토론 대상으로 선정된 책이었다. 누군가의 추천이 있었지만 추천의 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단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이 단편집이라는 최소한의 정보조차 갖지 못한 채 손에 쥐게 되었다.

 '노는 인간'은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작품에서는 '작가'라는 최소한의 명분만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떤 목적도 희망도 없는 그녀는 동거남의 가시 돋친 말에 일단 밖으로 나온다. 그리곤 정처없이 돌아다니면서 노는 인간의 위상을 맘껏 누린다. 길가에 버려진 소파에 누워서 생각에 잠긴다거나 호프집에 혼자 앉아서 사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일 등이다. 이런 소일거리들이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자 마지막으로 해볼 수 있는 반항의 전부다.

 나머지 9편의 단편에서도 소위 노는 인간은 공히 등장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제 3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보통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상사에게 마지막으로 한 방을 쏘아부치고 뛰쳐나와 시골에 잠적해버린다던가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행동은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에 있다.

 이렇게 일탈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심어준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판타지는 환상일 뿐이다. 그렇게 뛰쳐나갔을 때 바로 하루 뒤만 생각한대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행동으로 옮기고 일탈을 감행하는 이들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최소한의 명분을 가지고 놀면서 다른 사람이 못보는 잉여의 영역을 만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최소한의 명분이 재산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그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예술하는 사람들의 무위의 삶은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참신하다는 느낌은 받기 힘들었다. 분명 일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만, 이젠 너무 흔한 얘기가 되버렸다는 느낌이다. 이미 주위에 놀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최소한의 명분만 있을 뿐 보통의 삶을 거부하는 또는 거부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흔하다. 주위에서 뻔히 보는 사람들의 얘기를 또다시 소설에서 읽게되는 셈이다. 그래서 책 한 권을 다 읽고도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무력함을 느끼는 건 아닌가 싶다.

 작가의 첫 단편집이다. 아직 시작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하겠다. 지금 사회의 모습을 그려내는 방법을 배웠다면 이젠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헤쳐나가는지 보고싶다. 그들이 무력하게 사는 모습은 독자들도 무기력하게 만든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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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6일에 독서클럽 '책과 세상' (http://blbook.tistory.com/) 문학팀의 세번째 정기모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모임에 빠진 덕에 두번째 모임이면서 한달 반만의 토론이었다. (아직도 지난 '파이 이야기' 모임에 못 나간 건 후회하고 있다.) 이번 모임의 책은 구경기 작가의 '노는인간' 이었는데, 다소 급하게 선정된 감은 없지 않았으나, 책의 내용도 가벼운 편이었고 단편집이라 별 부담없이 쉬엄쉬엄 읽을 수 있어 토론에 별 문제는 없었다.

 처음에는 '슽흐롱'과 단 둘이 모임을 하는 줄 알고 - 실제로 4시까지 나온 사람은 둘 뿐이었으므로, 게다가 연락이 닿은 사람도 - 좁디좁은 카페로 향했으나, 이후 무려 4분이나 더 오셨고, 부득불 한시간 지체하여 토론을 시작할 수밖엔 없었다.  

 소설의 내용이 지나치게 가볍고 뜻하는 바가 없어 토론의 깊이가 있겠냐는 기우가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소설에서 얘기하는 소위 노는 인간이라는 집단은 몇 년 전이었다면 신기하고 드문 존재였으나 지금은 흔하디 흔한 얘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같은 내용이라도 문장만의 힘만으로 소설을 읽게끔 만드는 몇몇 작가가 아니라면 그 소재 자체가 건드리기 어려웠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되면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걸 말하는 꼴이 되는데, 확답은 할 수 없으나, 작가의 처녀작이 이 작품이라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애초에 토론의 주제는 소설보다는 '노는 인간'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토론의 시작은 '이 책에서 노는 인간은~''단편 '봉덕동 블루스'에서 그는~' 하고 시작하지만 결국은 우리 사는 얘기를 식으로 흘러갔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느니, 그들은 무모하지도 않고 작의적이도 않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주를 이뤘다. 소설이 인간사의 투영인 것을 생각하면 소설을 매개로 사는 얘기를 하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무의미해보이는 얘기들 중에서도 한 가지 기억에 남은 것이 있는데, 나중에서야 본 평론가의 글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겹치는 것을 보면 작가를 보는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곧 '노는 인간' 다르게 말하면 '잉여 인간' 이기 때문에 그들만이 보고 느끼는 것이 있다는 얘기였다. 사회의 흐름에 떠밀려 가는 사람이라면 못 보는 사회의 다른 부분을 그들은 보고 느낀다. 우리에겐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히 지켜볼 여유도 버려진 소파에 누워서 햇살을 맞을 시간도 없으니까.

 이렇게 우야무야 토론을 끝내고는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는데, 그 내용은 이미 정리되어 있으니 구지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다만 독서토론 시작 이후 가장 실용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는 것 정도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걸음 정도는 앞으로 나가지 않았나 싶다. 이제 반발짝 정도는 뒤로 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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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스킨 트레이드
(원제 : The Skin Trade, George R. Martin, 1989)
게제지 : 월간 판타스틱 8-10호 (2007.12-2008.2)


간단히 말해서 스킨 트레이드는 '늑대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소재인데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소재는 아니지만,
<샌드킹>의 조지 R 마틴이 썼다는 것만으로도 읽을 이유는 충분했다.

개인적으론 연재 소설을 참 못 읽는 편인데,
특히 이번 경우처럼 월간잡지에 한달에 한 편씩 게재되는 경우에는
완결되길 기다렸다가 읽곤한다.
(그 덕에 지금 연재되고 있는 <기나긴 순간>은 무심히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읽으려면 몇 달이나 남았는지...)

분량은 중편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맞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 자리에서 다 읽자면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끊어서 읽자니 아쉽고...
결국, 식사시간을 끼어서 이도저도 아닌 채로 읽고 말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가지는 힘은 긴박감에 있다.
어느 서스펜스 소설이 이렇게 흥미로울까.
스릴러적인 요소에 늑대인간이라는 배경까지 더해져 긴장감은 끝없이 이어진다.
주인공이 자신도 늑대인간임을 밝힐 때의 희열이란.

하지만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그 소재의 무한함이라 할 것이다.
단순히 전설화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귀신이나 도깨비와는 달리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에 대한 그들의 세계관은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다.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생활이 된 듯한 느낌을 곳곳에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다.
(어린이용 전설의 소재로만 간간히 등장하는 도깨비를 보면....)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것들을 살려야 한다고 거창하게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들과 우리의 인프라는 엄연히 다르니까.
그저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부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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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밋빛 인생 - 2002 제2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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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미경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밤이여, 나뉘어라>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작가의 이름만으로 고른 두번째 소설이 이 책이다. 다소 불순해보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에는 알게 모르게 상(賞)이라는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던 셈이다.

 사다놓곤 2년만에 읽은 책이지만, 발행된 지는 6년이나 지났고, 그간 작가의 컴퓨터 속에 들어있었을 시간까지 감안하면 시간의 터울이 상당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현대소설답게 그리고 현대인을 그린 얘기답게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었고 적당히 낯설었다. 난 이미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들은 외국소설을 읽을 때와 흔히 순수소설이라 일컫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책들을 읽을 때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하게 만든다. 친절하게 가이드를 자처해 집까지 데려다주는 그들과는 달리 우리작가들은 어딘가 두리뭉슬하다. 길을 물으면 '이 쪽으로 가시다가 왼쪽으로 꺽어서 쭉 걸어가시면 되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때론 그 곳에 과연 길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한다.

 하지만 길임을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일지라도 어떤 심리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건 그들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다른 사람의 얘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 삶에 투영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이 아귀가 맞는 이야기들. 누군가 내 얘기를 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믿는 이상 길이 없다고 한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사랑에 대해서 작가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하다. 사랑하지 않는 부부사이나, 결혼을 했으면서도 이성을 만나는 등의 행위 등은 그 담담함 속에 묻혀 있지만, 사실 부부갈등이나 외도 등의 단어들로 쉽게 변형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어떠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그리될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듯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음의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뜨거웠던 그 사랑조차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삶의 한 부분일 뿐임을. 그저 인생의 담담한 한 페이지 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누군가에 의해 언뜻언뜻 생각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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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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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등학생들에게 과학추천 도서목록이 주어질 때 항상 들어있는 책 중 하나가 바로 '과학 혁명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책도 내가 고등학생이던 2000 년 판형인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왜 8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나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추천도서라는 게 이해가되질 않는다. 당시에도 채 한 장의 에세이도 읽지 못하고 책꽂이에 넣어둔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에도 몇차례나 완독을 시도했지만 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처음으로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제대로라는 말을 하긴 힘들 것 같다. 300 페이지 분량의 책을 읽는데 3주나 걸린데다 지금도 책의 내용이 뭔지 헷갈리는 정도라면 설명이될까. 그러면 26살 나이먹고 고등학교 추천도서 읽고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버리는 나는 비정상인가.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경험했을 때는 비정상이라든가 소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결론지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책을 적게 읽는 것도 아니고 그 책들이 모두 쉬운 책들도 아닐 뿐더러 책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이런 류의 책에서만 과부하가 걸리는가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른 결론은 결코 나의 소양이 부족함도 아니요, 얇팍한 책읽기를 줄곧해온 덕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학자 특유의 고지식함을 꼽고 싶다. 책을 어렵게 쓰는 것이 곧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는 잣대는 아니다. 물론 책의 독자층에 따라 여러 전문용어나 쉽지 않은 표현이 나올수는 있지만, 적어도 대중을 위해 씌여진 에세이 형식의 책이라면 자랑삼아 쓰는 책이라는 표시는 낼 필요 없다. 독자들 중에서 몇이나 뉴튼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궁금할 따름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배경지식의 부족함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다면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만 그 깊이가 고등학교 교육에선 쉬이 알 수 없는 정도에 이르는데다 기본적인 설명없이 당연한 듯 설명하는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오래안 가 책을 덮게 만드는 이유를 제공한다.

 마지막 이유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이유라 생각되는데- 번역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거다. 이 책을 번역하신 분은 관련된 학문을 계속 연구하신 학자다. 학자로서의 업적은 어떤지 모르지만 번역자로서의 능력은 최악인 것 같다. 맞춤법을 틀리게 쓰는 것은 예사로 하고 - 내가 읽은 책은 초판도 아닌데다 2쇄까지 된 판본인데 어떻게 밥먹듯 맞춤법이 틀리는지 모르겠다- 앞뒤 문맥이 맞지 않거나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서술이 툭툭 튀어 나온다. 과학 책이 아니라 국어 오류사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책의 본문은 이해가 잘 되지 않다가 막바지에 있는 역자 후기에 가서야 책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절반은 원작자의 책임이지만 나머지는 역자의 책임이다. 어쩌면 한글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번역에는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공계처럼 국내 서적보단 원서를 더 많이 봐야하는 학문의 경우, 학생들 사이에선 해석이 안 되는 한이 있어도 원서를 보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엉터리인 번역을 보는 것보다 잘못된 해석을 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매번 공염불에 그치는 전문 번역인의 양성을 심히 고려해봐야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첫머리에 얘기했듯이 이 책은 고등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어버렸다. 쿤이 주창했던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이미 일반화되어 사용되듯이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고등학생들에 꼭 필요한 책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대뜸 이런 책을 읽으라고 내어놓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1%도 안 되는 학생만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책을 추천도서라 내놓는 건 무슨 생각일까. 어려운 책을 내놓으면 알아서 배경되는 책들은 찾아보라는건가. 교과서에선 F=ma 만 가르치면서 뉴턴 방정식이 나온 배경의 완벽한 이해를 바라는 건 뭔지 모르겠다.

 이 책이 그들에게 필요한 책임은 분명하다. 분명 논란이 있는 사상이지만 배울 점이 있다. 그렇다면 번역서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볼 수 있는 해설서도 내놓아야 한다. (물론 좋은 번역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책만 추천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교육을 해야한다. 그런 뒤에야 다른 어려운 책으로 가지를 쳐 나갈 수 있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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