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입담 좋게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들려주면 듣고 있는 사람도 몸이 그쪽으로 기울이게 된다. 소설 쓰는 김중혁이 들려주는<메이드 인 공장>은 여러 가지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을 돌아본 이야기를 작가적 스타일로 들려준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독자들에겐 은밀한 비밀의 누설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브래지어의 가격차는 원단과 와이어다. 고급 브래지어는 형상기억​합금 와이어를 쓰고, 싼 브래지어에는 철로 만든 와이어를 쓴다 사용해 보지 않았지만 형상기억합금 와이어와 철의 차이는 아마도 엄청날 것이다. 가슴을 조이는 코르셋의 압박에서 벗어나 브래지어를 쓰게 됐지만 이제는 가격의 압박이 문제다.(중략)

'시작과 끝이 일치하도록 한다.'

박음질의 마무리를 일컫는 말이지만 작업의 기본을 지시하는 말익도 하다. 만듦새는 일정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꼼꼼해야 하고, 끝을 예감하며  긴장을 풀어서도 안된다. 시작과 끝이 일치하도록 하는 게 말처럼 쉬운 말인가. 책상에다 큰 글씨로 프린트해서 붙여두고 싶은 문장이다. 저 문장을 읽을 때마다 브래지어의 공장의 경쾌하고 조용한 리듬의 재봉틀 소리가 기억날 것 같다.​"(59~61쪽)

 



`시작과 끝이 일치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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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는 기존의 있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편집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주창하는 문화심학자 김정운 교수의 책 <에디톨로지>(2014.21세기북스)는 21세기의 창조는 어떻게 갈 것인가를 알려주는 책이다. 다양한 자료와 사진 그림을 통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중 카라얀에 대한 재해석은 신선하고 내겐 인상깊은 내용이다.

 

"음악은 귀로 듣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화려한 카라얀의 동작과 표정이 음악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음악을 들을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 조명도 최대한 어둡게 한다. 작은 백열등이나 촛불을 켠다. 귀의 감각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정서적 경험은 하나의 감각만으로는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흐릿한 방안을 보기도 하고, 무언가를 떠 올리기도 한다. 절대 음악에만 집중할 수 없다. 음악은 절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카랴얀은 음악과 영상의 편집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카라얀이 세계 최초의 뮤직 제작자라는 것을 잘 모른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예술감독, 영상감독을 자처한다. 1965년 예술감독으로 오페라 <라보엠>을 찍은 후, 1967년에는 <카르멘>의 연주를 본인이 직접 감독한다.

 

"당시 기껏해야 공연 실황으로 연주되던 클래식 공연을 카라얀은 당야한 영화적 기법을 동원해 최초의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이후 본격 등장한 베를린 필하모니의 뮤직비디오는 거의 '카라얀 감독, 카랴얀 각본, 카라얀 주연,'이었다. 그의 지나친 나르시시즘은 욕먹어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보는 음악'을 창조해낸 카라얀의 업적을 폄하해서는 안된다."(130~131쪽)

이 사진을 보니 반갑다.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에 취한 듯한 카라얀 사진에 뻑 갔던 시절이 있었다. 여고시절 가사시간에 수를 놓았는데 그 시간에 나는 카라얀의 우수에 찬 모습을 까만실과 흰실로 한 땀한 땀 놓았었다. 그때 여러가지 샘플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선택했다.

음악에 취하지 않으면 감히 나올 수 없는 포즈라고 생각했었다. 지휘하는 모습에서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듯 강렬했다. 지금봐도 여전히 카리스마있고  매력적이다. 청각과 시각을 편집해 낸 ​최초의 뮤직비디오 제작자였다니 놀랍다.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내는 저자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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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든 봄

    

        이경 시인

 

 

세들어 사는 집에 배꽃이 핀다

빈 손으로 이사와 걸식으로 사는 몸이

꽃만도 눈이 부신데 열매 더욱 무거워라

차오르는 단맛을 누구와 나눠 볼까

주인은 어디에서 소식이 끊긴 채

해마다 꽃무더기만 실어보내 오는가

<마음대로 시해독> 가난한 시인이 세 들어 사는 집에 봄이 온다. 시인은 빈 손으로 들어와 사는 것도 고마운데 꽃과 열매까지 보니 무척 고마운 모양이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가난한 시인에겐 집주인이 보내준 봄인듯 황송하게 받는다. 세든 시인, 세든 봄. 어쩌면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들어 사는 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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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나무의 저녁

 

                   장 철 문

 

민박표지도 없는 외딴집. 아들은 저 아래 터널 뚫는

공장에서 죽고. 며늘아기는 보상금을 들고 집을 나갔다

한다. 산채나물에 숭늉까지 잘 얻어먹고, 삐그덕거리는

널빤지 밑이 휑한 뒷간을 걱정하며 화장지를 가지러 간다.

삽짝 없는 돌담 한켠 산벚꽃이 환하다. 손주놈이 뽀르르

나와 마당 가운데서 엉덩이를 깐다. 득달같이 달려 온

누렁이가, 땅에 떨어질세라 가래똥을 널름널름 받아서 먹는다.

누렁이는 다시 산벚나무 우듬지를 향해 들린 꽁꼬를 찰지게 핥는다.

손주놈이 마루로 올라서자 내게로 달려온 녀석이 앞가슴으로 뛰어 오른다.

주춤주춤 물러서는 꼴을 까르르 까르르 웃던  손주놈이

내려와 녀석의 목덜미를 쓴다.녀석의 꼬리를 상모같이 흔들며

긴 혓바닥으로 손주놈의 턱을 바투 핥는다.

저물어 가는 골짜기 산벚꽃이 희다.

 

장철문시집 <산벚나무 저녁,창비>의 24쪽의 시

 

 

 

<마음대로 詩해독> 장철문 시인의 시는 왠지 마음이 끌린다. 그림이 그려지면서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의 시 속에서는 남루하고 힘없는 이웃들이 산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주를 키워야 하는 노인, 밭두렁에서 호박 하나를 따와 마음이 편치 않아 양심선언하는 남자, 어둔 창앞에서 차 한잔을 나누며 서로 애잔해 하는 부부, 그의 시 속에서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넋두리를 꼭 들어 주어야만 할 거 같은 분위기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보편적인 이야기다. 시 속 손주를 키우는 노인네도 부모 사랑을 못 받고 할머니랑 사는 어린 손주도 누렁이도 끝까지 마음이 쓰인다.

 

단촐하니 맞는 저녁 풍경속 산벚나무꽃은 얼마나  환하고 서글플까?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장욱진의 소박한 그림들과도 겹쳐진다.

 

삽짝 없는 돌담 한켠 산벚꽃이 환하다.
저물어 가는 골짜기 산벚꽃이 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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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들

 

    이면우 시인

 

사람들이 울지 않으니까

분하고 억울해도 문 닫고 에어컨 켜 놓고 TV 보며

울어도 소리없이 우니까

 

요렿게 우는 거라고

목숨이 울 때는 한데 모여

숨 끊어질락 말락 질펀히 울어젖히는 거라고

 

옛날옛적 초상집 마당처럼 가로등 환한 벚나무에 매달려

여름치 일력 한꺼번에 찌익, 찍 찢어내듯 매미들 울었다

낮 밤 새벽 가리잖고 틈만 나면

시집<아무도 울지않는 밤은 없다>.34쪽의 詩

<마음대로 詩 해독解讀> 시인은 여름날 시원하게 울어젖히는 매미를 보자 울음을 참고 사는 사람들이 떠 올랐나보다.

너나할 것 없이 슬퍼도 울 일 있어도 울지 않은 인간이 안되 보였을까. 매미들의 울음에 대해 말을 꺼낸다.

매미가 인간들에게 울며 울음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말해야 할 때 말 못하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울음을 참다 종국에는 우는 것조차 잊어버린 건 아닐까. 이 시를 읽다보면 신경계가 고장나 본능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마 가고 나면 매미가 여기저기서 울어대겠지. 여름 한 철을 살기위해 참고 기다렸던 시간만큼 숨이 끊어져라 울어대겠지. 삶의 바닥까지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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