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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은 문장을 필사하게끔 만들어진 책이다. 지난번 서점에 갔을 때 산 책이다. 책속 문장은 그동안 장석주 작가가 읽고 밑줄 그었거나 작가 자신을 물들인 문장이라고 소개한다.

작가는 필사를 이렇게 전한다.
"필사는 느린 꿈꾸기이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이며, 행복한 몽상가다."

톨스토이에서 김애란까지, 책갈피속 손으로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소개한다. 문장들이 그리 길지 않으니 천천히 음미하며 써 봐도 좋을성 싶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내가 읽은 책도 있어반갑다. 그 중 김훈작가의 <자전거 여행>은 필사까지는 아니어도 야금야금 곱씹으며 먹었던 책이라서 작가가 소개한 문장을 보자, 나도 읽었고 밑줄 그은 문장이라고 알은 체를 하고 싶어진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보다 한번이라도 보고 말 섞은 사람이 더 반가운 것처럼 오지랖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친다. 바로 이 문장들이다. 겨우내 언 땅이 봄 햇살에 서서히 녹아 부푸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봄풀들

봄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땅 위로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속의 길을 예비한다. 얼고 또 녹는 물의 싹들은 겨울 흙의 그 완강함을 흔들고, 풀어진 흙속에서는 솜사탕 속처럼 빛과 물기와 공기의 미로들이 퍼져나간다.

풀의 싹들이 흙덩이의 무게를 치받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흙덩이의 무게가 솟아 오르는 풀싹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풀싹이 무슨 힘으로 흙덩이를 밀쳐낼 수 있겠는가. (23~25쪽의 글)

이것은 물리현상이 아니라 생명현상이고,역학이 아니라 리듬이다. 풀싹들은 헐겨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 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23~25쪽의 글)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 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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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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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라

 

보들레르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 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새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대로 아무튼 취하라.

 

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이 몇 시인지,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끈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대로."

보들레르 산문시집<파리의 우울>. 99쪽의 詩.

"취해서 살아라." 여고때 담임 선생님이 해준 말이다. 취해서 살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잊지 않고 살아 왔다. 좌우명까진 아니어도 내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꽤 부리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귀언貴言으로 받아 들였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니 '취하다'라는 광의의 말뜻을 알아 차린다.

​산문시를 읽고 있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재혼, 술과 마약,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속에서 자신의 불안과 우울을 창작에 불태우다 마흔 여섯의 생을 마감한 보들레르를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말이 쉽지 ​"취해" 산다는 건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보들레르 자신도 이런 시를 쓰지 않았을까.

고맙다. 철모르는 아이에게 삶의 지침을 일러준 오래전 선생에님, 불안과 가난 속에서 예술적 야망을 승화시켜 좋은 작품을 보여준 보들레르, 어려운 문학작품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옮겨준 불문학자 황현산님, 무슨 시 바람이 불어 그간 모은 용돈을 탈탈 털어 시집 코너에 쭈그려 앉아 골랐다며 네댓 권의 시집을 사 온 고딩 1학년인 작은 녀석도 참 고맙다.​ 이 시집은 가을에 읽을 책 목록에 넣어두고 있던 책이다.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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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녀석은 휘파람을 잘 분다. 처음엔 노래도 아니고 장난처럼 아무렇게나 불어대더니 요즘은 제법이다. 무슨 곡인지는 모르지만  멜로디가  귀에 붙는다. 샤워할 때 , 아침에 학교 갈 때, 이어폰을 꽂고 음악들을 때, 시도 때도 없이 휘파람을 불어댄다. 그러다 보니 저녁에도 신이 나 있는 날이 많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 두 번이지. 귀에 거슬려  "저녁에 휘파람 부는 거 아니야. " 하면 녀석은 되는 이유를 따져 묻는다.

 

어릴 적 어른들한테 강압적으로 안된다는 얘기만 듣고 자랐지 그 이유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고 커서도 알려고 찾아본 적 없다. 아마 이 말도 그런 맥락 중에 하나였다. "옛날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며 도깨비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할머니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살았다.

 

그런데 <소설가의 일>이란 책을 읽다 보니 김연수 작가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아주 그럴듯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일은 안 하고 자꾸 몽상에 바지니까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제 밥벌이를 못하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뭐 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소설가가 되어 이십 년 정도 소설을 써 보니까 거기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겠다. 그 숨은 뜻을 알기 위해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 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데서 출발해보자.

 

"감정이입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이 꼭 내 것인 양 느껴진다는 뜻이니까 공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공감이라는 걸  쥘리앵 소랠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마음 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을 읽으며 손에 땀을 쥔다는 말이 꼭 그 뜻이다. 감정이 같아지면, 몸도 한 몸이 되는 셈이다. 때로는 소설 속 주인공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건 그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공감능력이 아주 뛰어나다."(...)(160쪽)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이야기의 속성 때문에 나온 말이리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남들보다 감정이입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그건 특히 타인의 좌절에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 자기 시간과 돈을 남들을 위해 쏟는 일도 많겠지. 이런 사람이야말로 전 세계 모든 할머니들이 걱정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162쪽)

책 읽는 재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처럼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흥은 쏠쏠하다. 좋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맞아, 나도 그랬지. 하고 마음속으로 흡족해 공감을 꾹 누를 때는 ​생면부지의 작가와 교감을 하는 기분이다.

책은 항상 곁에 있는 든든한 친구며 변질되지 않는 응원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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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에는 말이 많았다.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구별되지 않았고 말과 삶을 분간하지 못 했다. 말하기의 어려움과 말하기가 위태로움과 말하기의 허망함을 알지 못 했다. 말이 되는 말과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언어적 외형적 질서에 하자가 없으면 다 말인줄 알았다. 어쩔 수 없었다, 말하기가 조건들을 일러주는 스승이나 선배도 없었고 가르쳐 주었다하더라도  알아듣지 못 했을 것이다. 말과 글을 배우는 젊은이에게 말이란 너무나도 유혹적인 것이어서 말하기의 두려움을 함께 배울 여유는 전혀 없었다.

 

사전에 나와 있는 단어는 모두 끌어다 쓸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한 단어가 사전에 나와 있기 때문에 그 단어를 끼워 넣고 말을 조립하는 것은 정당한 논리의 작용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의 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말은 질펀하게 넘쳐났고 삶의 하중을 통과하지 않은 웃자란 말들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불어갔다." (51쪽, 말하기의 어려움)

 

김훈의<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생각의 나무)에서 가져왔다.

이 책에서 인문주의자 김훈은  세상 사람들의 안과 밖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나이 들면서 말이라는 게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모르지만 세상을 향하여 내 놓을수 있는 말이 그닥 많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고 고백한다.

젊은 날 많은 말을 지껄여보고 말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음을 경험한 후의 쓸쓸한 깨달음이란 생각이 든다. 말이란 게 몸 안에 있다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 김훈은 말의 유혹을 알기에 말수가 적고 글쓰기에도 명징하게 단문 쓰기를 고집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어갈수록 귀는 열어놓고 입은 다물게 된다는 말뜻에 이해 된다. 젊은 날의 말은 욕망으로 보아줄 수 있지만 나이들어 말은 신중하지 않음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말이 되는 말과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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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햇살이 이슬을 다 살라 먹을 때까지 서성거렸다  "

<러셀 베이커 자서전>(2014.연암서가)을 읽고 있다. 
이 문장은 갑자기 아버지가 아프고 엄마는 놀라서 의사 선생님을 부른다.
의사 선생님이 집에 오고 아버지를 진찰하는 동안 어린 러셀은
쥐죽은 듯 조용한 집 뒤뜰에서 숨죽여 서성거리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문장이다.

뜨락에 아침 햇살이 퍼지는 순간을 감정이입 해 흘린 표현인 듯한데
너무 빼어나 밑줄 그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을 한 문장에 다 담았다.

5월이 초여름이다. 실내가 더워 한 낮에
집 창문을 죄 열어 놓았다. 햇살은
기다렸다는듯 베란다 난간 틈을 비집고 들어와 초록잎을 기웃거린다.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꽃대가 서광을 받아 환하다.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오후에 왜 이 문장이 자꾸 오버랩 될까.
촉촉한 이슬위를 덮치는 아침 햇살 때문일까.
문장속 어린 러셀의 마음 때문일까.

 

"나는 햇살이 이슬을 다 살라 먹을 때까지 서성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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