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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간다

 

     허수경 시인

 

기차는 지나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에서 가져옴

 

 

기차를 떠올리면 추억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오래전 먼 곳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이도 있겠지만 아주 가서 오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추억은 그리움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떠나고 오지 않는 이들을 기다리며 지금도 역 출구 앞을 서성이고 있지 않을까. 더구나 그 사람이 사랑한 사람이라면.

 

이 시는 그렇게 절절하다. 모든 지나간 자리에는 남아 있는 이의 아픔이 있다. 기차와 밤꽃과 꽃자리가 시인을 아프게 한다.  추억은 기차가 통과한 내 몸 같은 것이기에 시인의 그리움은  상처가 되어 그것을  보듬어  안은 것일까.  마지막 시 구절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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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발자국 창비시선 222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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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의 방

 

   손택수 시인

 

플라스틱 화분에 금이 갔다

비좁은 껍데기를

당장에라도 뛰쳐 나가고 싶어

뒤틀리고 비틀어진 뿌리들

흙을 움켜쥔 채 벽을 밀어보다가

숨이 막힐 만큼

몸을 움츠리고 한데

엉켜 있는 뿌리들

분을 갈아 줘야 하는데

온 몸에 쩍, 쩍 주름이 간

어머니가 말했다

이대로 그냥 견뎌요

화분 살 돈이 어딨어요

그해 여름이 다 가도록

몸을 뻑뻑하게 죄어오는

후끈거리는 방속에 틀어박혀

암수 한 몸 달팽이처럼

누이들과 사춘기를 막 지나고 있었다.

시집 <호랑이 발자국>. 25쪽​

​뿌리들이 보이는 금 간 플라스틱 화분을 보고 시인은 단칸방에서 누이들과 여름을 나던 그때를 떠올린다.  얼마나 덥고 숨이 막혔을까. 시를 있으니 시인의 상황이 그려지면서 "이대로 그냥 견뎌요" 라는 시 구절에 잡혀 있다. 깜냥은 깜냥끼리 통한다고 선풍기도 없던 단칸방 시절이  불쑥 떠올라 나도 모르게 그해 여름을 돌아본다. 

연일 폭염에 열대야다. 장마가 끝나가는 모양이다. 8월 염천더위가 남았다. 고약한 사춘기가 알게 모르게 지나가듯 이 순간 여름도 지나고 있겠지.  피할 수 없다면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이대로 그냥 견뎌봐요!" 라는 말을 건네고 싶은 아침이다.

"이대로 그냥 견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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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창비시선 253
문성해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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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문성해 시인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임자

 

취한(醉漢)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 번 내밀지 않던,

 

한 평의 컨테이너를

등껍질처럼 둘러쓴,

 

깨어나 보면

저 혼자 조금

호수 쪽으로 걸어나간 것 같은

 

지하철역 앞

토큰 판매소

 

오늘 불이 나고

보았다

 

어서 고개를 내밀라 내밀라고,

사방에서 뿜어대는

소방차의 물줄기 속에서

 

눈부신 듯

조심스레 기어 나오는

꼽추 여자들,

 

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

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시집 <자라. 창비>. 66~67쪽의 시.

 

"눈부신 듯/조심스레 기어 나오는/꼽추 여자들,/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시란 무엇일까. 시인은 누굴까. 삶이 대체  뭘까. 이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궁금증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시와 시인, 시와 삶 사이에 긴장이 들어 있다.

긴장은 팽팽했다가 스르르 무너지게도 한다. 삶은 어쩌면 살아가는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눈에 비치는 풍경​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풍경 속 기계 부품처럼 살다가 사물화가 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시인은 시를 삶 속으로 끌어와 고통스러운 진실을 보여준다.

*"삶은, 풍경이라는 거짓말"  이어서 아프고 쓸쓸하고 저릿하다.

​저 꼽추 여자들과 나와 너와 우리를 위해 푸시킨의 시 한 구절을 끌어온다. 심심한 위로가 돼 주길 바라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김기연 작가의 산문집

 

...눈부신 듯/조심스레 기어 나오는 /꼽추 여자들,/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자라다 만 목덜미가/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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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부근

        정일근 시인​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집<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81쪽의 詩

<시시콜콜> 꽤 오래전에 산 시집인데 이맘때가 되면 꺼내 본다. 시편마다 시인의 맑은 서정이 가을날과도 닮아 있다. 시도 계절을 타는지 모르겠다. 우연히 본 거미집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는 시인을 보고 거기에 마음이 붙잡힌다.

거미를 쫓아내면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못본 채 돌아서는 구절이 따뜻하면서도 고맙다. 어쩌면 시인도 보따리를 싸 여기저기 거처를 찾아 헤매봤거나 지금도 그리 살고 있지 않을까싶어 거미도 시인도 짠하다.

측은지심이란 머리로 계산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그리로 가는 것일까. 가을이 깊어가는 아침에 시인과 거미를 걱정하느라 행간에 머물러 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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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 두 편

 

 

반딧불 하나가 내 소매위로 기어 오른다, 그래, 나는 풀잎이다. - 이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것을 모르다니 -바쇼

<마음대로 詩 해독解讀> 간 밤, 세상에서 가장 짧다는 ​시(하이쿠)를 읽었다. 아마 시인은 봇물처럼 쏟아지는 감정을 하이쿠 라는 용기에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담느라 수도 없이 언어를 갈무리 했으리라.

스탠드 불빛아래서 읽는 시는 나도 모르게 여백에 갇힌다.반딧불이가 팔로 기어오르는 모양을 상상하고 내가 풀잎이 되는 순간을 떠올리면 이슥한 밤기운이 감도는 듯 하다.

 시는 행간을 읽되 그 사이의 고요까지 읽어야 제 맛이 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어둠속 반딧불이 빛같다.​ 언어의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고 최대한의 의미를 담아낸 시인처럼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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