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발자국 창비시선 222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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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의 방

 

   손택수 시인

 

플라스틱 화분에 금이 갔다

비좁은 껍데기를

당장에라도 뛰쳐 나가고 싶어

뒤틀리고 비틀어진 뿌리들

흙을 움켜쥔 채 벽을 밀어보다가

숨이 막힐 만큼

몸을 움츠리고 한데

엉켜 있는 뿌리들

분을 갈아 줘야 하는데

온 몸에 쩍, 쩍 주름이 간

어머니가 말했다

이대로 그냥 견뎌요

화분 살 돈이 어딨어요

그해 여름이 다 가도록

몸을 뻑뻑하게 죄어오는

후끈거리는 방속에 틀어박혀

암수 한 몸 달팽이처럼

누이들과 사춘기를 막 지나고 있었다.

시집 <호랑이 발자국>. 25쪽​

​뿌리들이 보이는 금 간 플라스틱 화분을 보고 시인은 단칸방에서 누이들과 여름을 나던 그때를 떠올린다.  얼마나 덥고 숨이 막혔을까. 시를 있으니 시인의 상황이 그려지면서 "이대로 그냥 견뎌요" 라는 시 구절에 잡혀 있다. 깜냥은 깜냥끼리 통한다고 선풍기도 없던 단칸방 시절이  불쑥 떠올라 나도 모르게 그해 여름을 돌아본다. 

연일 폭염에 열대야다. 장마가 끝나가는 모양이다. 8월 염천더위가 남았다. 고약한 사춘기가 알게 모르게 지나가듯 이 순간 여름도 지나고 있겠지.  피할 수 없다면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이대로 그냥 견뎌봐요!" 라는 말을 건네고 싶은 아침이다.

"이대로 그냥 견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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