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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보후밀 흐라발 필생의 역작!
....이라는 묵직한 광고글과 처절한 줄거리를 부각시킨 리뷰들을 먼저 접해서일까?
우선,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의 내용에 놀랐다.
나도 모르게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나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류의 실화에 기반한 억압받은 지적인 굶주림이나, 공산주의 치하인 체코에서 지하 출간한 작가의 처절함을 기대하고 있었던가 보다.
헌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작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암울함이나 처절함 보다는 비극을 희극으로 또는 우화로 표현하는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는다. 아니, 어찌보면 유머 그 자체다.
만차의 똥사건은 물론이요, 햔타가 맥주집에 갔을 때 외투속에서 튀어오른 생쥐에 놀라 흩어지던 여종업원들의 장면은 거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로 치환되서 보일 지경이었다.
문제는 쉴새 없는 작가 특유의 유머들로 뒤범벅된 (아마도 현학적일) 장광설에 가까운 문장들에 나 또한 감동을 느끼고 다른 독자들 처럼 깊이 고개 끄덕이고 싶지만, 어째 내게는 이게 벌거벗은 임금님의 화려한 연회복으로 보인다는데 있다.
그 아름다움이 남들 눈에는 보이는데 나만 안보여...
숱한 미사여구와 화려한 수사들. 그걸로도 모자라 또 구석구석 빼곡하게 채워넣는 우화적인 은유들.
때로는 웃으며 깊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거나 코끝이 찡해졌던 순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너무하게도 극중 햔타가 책들을 세심하게 분류해서 장식하고 아름답게 압축한 책의 꾸러미들을 또 한 번 폴 고갱의 그림들로 뒤어싸서 치장하듯... 문장과 문장, 그 사이의 행간들을 단 한조각도 그대로 두질 않고 과할 정도로 씻고 닦고 치장하고, 사이사이 현학적 은유까지 박아넣는다. 솔직히 너무 과해 질식할 것만 같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 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히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그보다 더한 슬픔이 담긴 생각과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근차근 쌓아가는 습관과 광기가 항시 존재해온 유서 깊은 왕국에 나는 거주한다.
작업장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내 압축기가 취한 결혼식 하객을 싣고 눈 위를 달리는 썰매처럼 명랑한 방울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물론 이 감성에 깊이 공감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내게는...
그녀를 잃는다는 건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은 구석에 처박히고, 내 전부를 가져가는 거예요.
라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대사들과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영화 호랑이의 눈 中...)
감동이 오려다가도 멈칫! 하게 만드는 과도한 감성적 치장의 숨막힘...
아마도 문장에 관한 나의 취향은 맥시멈리스트가 아니라 미니멀리스트에 가까운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인생은 아름다워(한국인들이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의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로베르토 베니니를 그리 좋아하질 않는다.
하지만 비극을 희극으로... 그것도 대사 하나 없는 무성영화로 표현할 수 있었던 거장 채플린을 좋아하고 깊이 존경한다.

어린시절 그의 영화들에 받았던 강렬한 감동들... 억지스레 강요하지 않는 그 진짜배기 감정들에 울고 또 웃었다.
하지만 온통 채플린의 오마쥬들로 떡칠되어 있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수다스러움에는 조금도 공감하질 못했다.
왜 였을까?
대사없이 슬랩스틱 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 채플린과 요설에 가깝게 대사를 쏟아내는 베니니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채플린은 진정한 거장이고 베니니는 그보다는 못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보후밀 흐라발의 현학적이고 수다스런 유머들에도 그리 큰 공감은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참 수다스럽다.
말 그대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처음엔 체코 공산주의 치하에 한 지식인의 불가피한 침묵을 표현한 은유적 제목인 줄 알았건만... 의외롭게도 제목만은 날 것 그대로였다. 정말 시끄러운... 할말도 정말 많은 햔타의 시끄럽디 시끄러운 고독.
어찌보면 은유, 반어법, 미사여구, 수사들로 가득한 책에서 가장 명쾌하고 강렬했던 건 오로지 제목 뿐이었던 것 같다.
때로는 백마디 말보다 단 한 장면이...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된 문장들 보다. 짧고 명쾌한 단 한 문장이 더 강렬할 수도 있다.
문장의 길이나 글자수를 떠나 수다스런 작가보다 과묵한 작가들을 더 좋아한다는 개인적 취향을
절실하게 일깨워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