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의 야회 미스터리 박스 3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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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지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 책을 읽었다는 회사 동료가 선물해 주어 읽은 책입니다.

간단하게 책 뒷표지에 있는 글로 줄거리 소개는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범죄 피해자 가족모임'에 참가했던 두 여성이 살해되었다.

하프 연주자는 양 손목이 잘려나가고, 다른 한 명은 뒤통수가 돌계단에 내리쳐진 채로.
오코우치 형사는 피해자 남펴의 행방에 의문을 품지만 공안부에서 이유없이 수사를 중지시킨다.
또한 모임에 패널로 참석했던 변호사가 19년 전 일어났던
소년 엽기범죄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엽기적인 살인마와 프로 킬러가 맞붙은 순간,
경찰조직의 부패에 직면한 형사도 고독한 한 마리 늑대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뭐랄까요... 먼저 '머리'라는 그릇 속에 많은 물이 여러 곳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만 골라 내어도 여러 권의 책이 나올 수 있는 주제들.... 그 주제들이 정신없이 머리속으로 몰아쳐 들어왔습니다.
 
미성년 범죄자의 갱생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범죄피해자의 사적인 복수는 허용이 되는가?
정치와 경찰이라는 국가기관간의 유착과 검은 거래는 사라지지 않는가?
그리고 그 검은 거래를 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던져 책임지고 입을 막아야 하는가?

이런 사회성 짙고 논쟁이 여지가 아주 많은 주제들부터 시작해서...
가족이란? 사랑이란? 친구란? .... 그리고 개인의 경험과 트라우마라는 상대적으로 미시적이고 심리적인 분야까지
모두 건드리고 나가는 작가의 좌충우돌식 글쓰기는 일면 위태위태하면서도
상대진영을 헤집고 다니는 축구선수(!!)를 보는 것처럼 즐거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나오는 하드보일드한 장면들은 섬뜩섬뜩함을 느끼게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 이런 책을 보면 무척 서글퍼지기까지 합니다.
이토록 잔인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이제 현실이 되었고,
그 가슴 아픈 개인사의 뒷면에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들을 더이상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하드보일드'라고 하는 것...
인간적인 상식 수준에서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양상들이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엽기적인' 사건이 주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받는 충격과 그에 따르는 '반성'이 점점 사그러들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하드보일드한 내용을 '책'이란 매체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어느 정도로 그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야회(夜會).... 밤에 여는 사교적인 모임이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동기이든 사회적인 동기이든 밤과 같은 어두움 속에서 은밀히 벌여지는 희생제물들의 잔치(!!!!!).
그렇게까지 우리 사회가 어두움에 가득차 있는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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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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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밤에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를 보면서 열불이 터졌는데,
마침 그 때 읽고 있던 책이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외딴 집]이었습니다.
서평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국민과의 대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서 그냥 들었던 단상만 써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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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부터 작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유행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가 아니었을까?
뭐든지 조금만 부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 “이렇게 될 동안 노무현은 뭐했나?”라는 댓글이 빠짐없이 달렸었다.
인터넷 상에서 이 말이 댓글로 붙여질 때는 하나의 ‘놀이’라는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했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사자가 퇴임하여 낙향한 현재까지도 국민적 비난을 받는 일에 아직도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면 단순히 인터넷에 놀이로만 사용되던 뉘앙스가 아닌 책임 떠넘기기와 희생양 삼기라는 느낌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다.

미야베 미유키의 [외딴 집]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게 다 가가님 탓이다”

쇼군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에도 막부 시기의 어느 무더운 여름.
쇼군의 측근인 가가님은 악령에 씌워 부인과 자녀, 호위무사들을 죽이고 마루미 번이란 바닷가 마을로 유배를 오게 된다.
그 때부터 평화로웠던 마루미 번에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심심찮게 발생하던 식중독이나 전염병은 가가님의 저주 때문이며,
여름이면 지역특성상 있던 벼락 역시 가가님이 마을에 왔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린다.
사람이 죽어도 가가님 탓, 병이 들어도 가가님 탓, 이웃간에 싸움이 일어나도 가가님 탓,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모두 가가님 탓....

[외딴 집]을 보면서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의 질긴 생명력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탓이오’라는 말은 사라져 버리고 ‘네 탓이오’라는 풍조가 지배적이 되었다.
변명과 합리화가 팽배해진 사회가 되었고,
뭔가 자신이 잘못한 일에는 사과보다 우선 무조건 부인한 후에, 나중에 ‘그건 오해였다’, ‘그런 뜻이 아니다’라는 말로 회피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내 책임을 돌릴 희생양이 되어준다면, 내가 잘못한 것을 일순간이라도 모면하게 해준다면
퇴임한 대통령이든, 내 옆의 이웃이든 누구이든 좋다.

‘책임 떠넘기기’가 낳게 되는 결과는 무엇일까?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을 알 리가 없는 미야베 미유키 여사가 [외딴 집]에서 그린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가가님’의 탓으로 돌리던 마루미 번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불신과 미움이 싹튼다.
결국 큰 벼락이 떨어지던 날.
마루미 주민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피가 피를 부르는 격렬한 다툼을 벌이게 되고,
그 와중에 지역의 지도층 집안에서는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다툼을 벌인다.
이 다툼이 어떻게 해결되고, “이게 다 가가님 탓이다”라는 말이 어떻게 해소되었는지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밝히기 어렵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에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게 진짜 가가님이 되든 아니면 이름없는 민초의 한 사람이 되든지 간에 말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이 ‘책임 떠넘기기’가 돌고 돌아서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무 죄없이 어려움만을 감내하고 있어야 할 민초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을 가져본다.

또 한가지.
이런 민초들의 맹목적인 공포와 공포가 불러온 혼란에 대해서
소위 위정자라 할 수 있는 마루미 번의 지도층 인사들은 정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여 해석하고, 상대편을 넘어뜨리기 위한 여러 가지 움직임을 보인다.
물론 이들은 말한다. ‘이게 다 마루미 번과 가문을 위해서‘라고.
물론 봉건시대라는 시대적 한계는 있겠으나, 그들에게 민초들의 고통과 힘든 생활은 전혀 개선할 대상이 아니다.
이런 위정자들의 모습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부르짖는 현재에도 겹쳐서 보이는 것은 내가 너무 과민한 탓일까?

사족 하나
이건 밝혀야 정당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현재 정부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정부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는 시기에 대해 100% 지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뭐랄까... 지금 정부에 대해서는 ‘증오의 관계’인데, 지난 정부에 대해서는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족 둘
사실 미미 여사의 책은 [이유]와 [모방범]에 이어서 세 번째였고, 꽤나 우연한 계기가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유]는 왠지 모르게 2% 부족한 느낌이었고, [모방범]은 너무도 유명한 이름값이 오히려 책읽기의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 시대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시기라서 그런지 [외딴 집]은 여러 가지 배우기도 하면서 잘 보았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트릭이나 공포 같은 것을 기대하고 보시는 분들께는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미미 여사의 능력을 본 것 같아서 새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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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글쟁이들 - 대한민국 대표 작가 18인의 ‘나만의 집필 세계’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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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민(국문학, 한시), 이주헌(미술), 이덕일(역사), 한비야(기행), 김용옥(동양철학, 종교), 구본형(경영혁신), 이원복(교양만화), 공병호(자기계발), 이인식(과학), 주강현(민속), 김세영(만화작가), 임석재(건축), 노성두(미술), 정재승(과학), 조용헌(동양학), 허균(전통문화), 주경철(서양사), 표정훈(출판)




[한국의 글쟁이들]에 소개된 우리 시대의 글쟁이들과 그들의 전문분야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독서좀 한다는 사람이라면 이들 가운데 최소한 한 명의 책은 거쳐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장은 아닐 것 같다.

(간단히 말해서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생각해 보라)

따라서 이들의 책은 해당 분야에서 최소한 한 권 이상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올랐고, 또한 해당 분야의 스테디셀러로서 오래 남은 책을 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이들은 이렇게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글쟁이가 되었을까?

나는 무엇보다 이들이 ‘주변’에서 시작하였으되, ‘주류’가 가지지 못한 강점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류’가 찾지 못한 강점이란.. 바로 자신의 전문 분야와 일반 대중들 사이를 대중의 눈높이에서, 대중의 언어를 가지고 연결해 줄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글을 썼다는 점인데, 이것은 결국 누구보다 열심히 많은 공부를 한 이들임에도 ‘뻐기는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분야의 소위 ‘주류’에 있는 학자들로부터 가볍고 통속적이며 학문적 전문성이 없는 글을 쓴다는 비난을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책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이들의 이름값만으로도 수많은 독자들이 책을 구입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독자들로 하여금 ‘참 많이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전문가란 사람이 나와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글쟁이가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에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저술가의 전문성은 두 가지 지점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바로 그 분야에 대한 현장성과 자료조사의 철저성이다.

책상머리에서의 공론은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이주헌의 미술관 기행이 공감을 얻은 것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실제로 여행을 다니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는 그의 실제 유럽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한비야의 책이 가지는 생명력은 두 말할 여지없이 현상성에서 나온다.

전문성의 두 번째 지점은 철저한 자료조사에 있다고 생각된다.

발품을 팔아 문헌을 얻든, 인터넷을 뒤지든, 사람취재를 하든 이들은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납득할만한 자료를 구한다.

이런 측면에서 거의 대부분의 저술가들은 메모광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은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기록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 메모 속에서 생각이 싹을 틔우고 나면 그것을 ‘발효’시켜 책을 쓰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 ‘발효’시키는 과정이 바로 자료찾기이며, 발효가 제대로 된 음식에서 맛있는 음식냄새가 나오듯 책에서도 독자들을 끄는 향이 나게 된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다.

대중성에 치우친 글쓰기는 자칫 객관성이 훼손되고 선정적이고 대중영합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며,

과연 이렇게 ‘떠먹여 주는’ 글쓰기와 독서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전문적인 학술서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 전문적인 내용을 알기 쉽게 전달하여 대중적 지평을 넓히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의 책상에만 갇혀서 학문적 엄숙함과 정통성만을 강조하고, 그렇지 못한 ‘재야’의 목소리는 무시하고 따돌리는 우리 학계의 잘못된 인습이 현재의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것은 아닌가.

떠들썩하게 말해지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란 결국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라는 저자의 쓴소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다.




또한 정재승 교수가 말한 새로운 인재상과 독서법에 대해서도 인문학자들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래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결국 한 우물만 파는 게 아니라 우물을 두세 곳 파고,

그 우물 사이에 지류를 내는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책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지식풍토가 ‘전문가’에 대한 맹신을 강조하고,

그들의 권위에서 나오는 주장에 절대성을 부여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 전문가의 권위는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한 어느 정도는 해체하고,

새로운 학문분야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글쟁이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숨은 글쟁이들이 제공하고 있는 발전의 단초를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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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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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크기는 무한하지만,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육십여가지 원소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원소들의 결합이 제아무리 많은 수효에 이른다 해도, 끝내 유한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유한한 원소들로 무한대의 우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온갖 결합이 이루어지면서, 갖가지 결합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한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책을 창조해 내는 작가는 물론이고, 그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각각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책이란 세계 속에서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론 충돌하고, 때론 투쟁하고, 때론 타협하고, 때론 어울리고, 때론 섞여 버리면서 한 세계는 다른 세계를 만나기 이전보다 더욱 풍족함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보르헤스가 '천국은 분명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책이 가진 이와 같은 끊임없는 성장과 확대재생산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절대자가 창조한 우주는 유한한 원소들의 끊임없는 결합으로 무한히 확장한다.

이와 같이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유한한 책은 서로 다른 책, 서로 다른 인간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확대되는 속성을 지녔다.

 

정혜윤 작가의 [그들의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11명의 유명인사들을 내세워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만났을 때 일어나는 갈등, 대립, 타협, 조화 등의 창조과정을 '책'을 매개로 풀어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저명인사들이 우리도 모두 알만한 유명한 책을 한 권씩 소개하는 소프트한 책 소개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간적으로는 유년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간적으로는 시골 촌동네에서부터 먼 동토의 땅 레닌그라드까지,

하나의 소우주인 개인이 자신의 삶의 결절점 곳곳에 이정표로 자리잡은 책과 영화 등 예술이 무엇인가를 추적하고,

또한 그 예술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구성해 왔는가를 더듬어 가는 느리면서도 진중한 발걸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의 주인공은 11명의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저자인 정혜윤씨라는 느낌을 받았다.

깊은 독서를 통하여 형성한 자신만의 책관()과 세계관을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잔잔히 풀어내고 있다고 할까...

그럼에도 이 책에서 소개된 11명의 '유명한' 사람들의 현재가지 인생편력은 내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읽은 책의 높은 수준을 부러워하거나, 내가 아는 책이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실망할 새가 없었다.

진중권씨가 소개한 영원한 도서관을 떠돌며 이 책 저 책 뽑아가면서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이 즐거웠고,

정이현씨가 다른 사람을 속이던 불안과 두려움이 현실로 될까봐 스스로도 불안해 하였으며,

공지영씨의 '나는 살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라는 살벌한(!) 외침 속에 그녀의 울분과 회한의 풀어짐을 느꼈다.

김탁환씨의 꿈은 역사소설이 되어 시공간을 초월한 작가와 역사적 인물의 교감임을 알 수 있었고,

임순례씨의 영화는 <우생순>을 빼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꼭 대중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인 것 같아서 나 또한 푸근해졌다.

은희경씨의 인터뷰에서 그녀의 [새의 선물]의 영악하고 당돌한 '진희'의 원형을 발견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진경씨의 지적인 노마드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고, 또한 그런 그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변영주씨의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는 잊기 쉽고, 놓치기 쉬운 삶의 당위성에 소홀하지 않는 치열함을 말해 주었으며,

신경숙씨가 소개한 프랑시스 잠의 시에서는 아무도 없는 눈쌓인 새벽길을 보는 것과 같은 투명함을 느꼈다.

문소리씨의 치열한 삶이 내면의 빛으로 승화되어 주위를 비추어 줄 때,

박노자씨는 이방인에서 내부인으로 들어와 내 마음 속의 파시즘을 가슴 아프게 찔러 주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 11개의 세계는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을 통해 나의 세계롤 들어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만들어 온 것은 어떤 책이었고, 어떤 경험이었는가?

아주 어릴 때 읽었던 출판사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던 조잡한 과학도서의 책 뒤표지에 있었던 유명한 말..

즉,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자신만의 세계에 감금시키거나 마음과 생각과 상상력을 한 군데에 고착화시키고 싶지 않아서 책을 읽는다고 말해왔다.

그렇지만, 실제 내가 읽는 책이, 내가 하는 독서가 새로운 세계를 통하여 나의 세계를 끊임없이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반성과 고민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은 앞으로 내가 읽어볼 책의 리스트에 수많은 책목록을 첨가하게 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장영희 교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이후로 어떤 책에서 소개된 책을 나도 읽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던 대학시절에 읽었던 책도 있고, 최근에야 접해본 책도 있었지만,

그 한권의 책이 지닌 의미(그게 비록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의미일지라도)를 알고서 다시 읽을 때의 즐거움은 또한 새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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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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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 칼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지막 테제를 생각나게 하는 책이었다.
“이제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여 왔다”라는 테제 말이다.
물론 이 테제는 당시 헤겔 관념론에 빠진 천편일률적 사변철학을 비판한 말이기 때문에 [세계를 재다]라는 책과 관련짓는 것에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이제 막 과학이 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에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는가라는 생각과 연관되어 떠오른 말이었나 보다.

 

 

[세계를 재다]에는 훔볼트와 가우스라는 두 명의 과학자가 등장한다.
이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 방법은 극과 극이었다.


훔볼트는 학자라기보다는 탐험가나 모험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자기의 ‘발’로 세계를 해석했다.
그는 호기심이 생기면 무엇이든지 확인해야 했는데, 반드시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몸으로 직접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근육이 전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직접 자기 몸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전기고문’을 행하다가 결국 기절해버리는 모습이나
파도의 높이를 재기 위해 뱃머리에 자신을 묶어 놓은 채로 항해한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왠지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가우스는 전형적으로 ‘머리’로 세계를 해석했다.
그는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피하였고, 아내가 아기를 낳다 죽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해낸 1부터 100까지 더하는 방법은 초등학교 수학책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함수와 표준정규분포를 이용한 가설의 검정 등은 골머리를 썩이며 배워야 하는 통계학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20세기 후반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증명되는 공간의 휘어짐에 대한 생각을 내놓은 최초의 학자였으며, 천체의 운행을 수학적 법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은 가장 ‘현대적인’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이 책을 통하여 철학적 흐름이란 것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발로 세계를 해석하는 훔볼트에게서는 경험주의의 그림자를,
머리로 세계를 해석하는 훔볼트에게서는 합리주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훔볼트와 가우스가 만난다는 설정 자체는 세계를 해석해 온 두 가지의 대표적인 방식이 함께 조우하게 됨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가끔 ‘칸트’를 등장시키는 것은 보통 장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 책에서 칸트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란 윤리학적 측면이 보다 강조되어 있으나,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여 독일 관념론의 틀을 잡은 칸트는 훔볼트와 가우스로 대표되는 세계를 재는 두 가지 방법의 종합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흐름을 녹여내기 위한 시도로서 [세계를 재다]를 이해한다면,
마지막이 다소 당황스럽게도 급하게 매듭지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세계를 재다]의 마지막은 가우스의 아들 오이겐이 비밀집회 도중 체포되어 추방명령을 받고 아메리카(미국)에 도착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별다른 사건(?)이나 의미없이 끝나버리고 마는 훔볼트와 가우스의 만남은 좀 싱겁다.
머리로 세계를 해석한 가우스의 아들이자 수학자였던 오이겐은 프로이센 황제의 독재를 비판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집회에 실제 참여했다가 발각되어 미국으로 추방된다.
이는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의 흐름이 새로운 해석방법으로 ‘미국’으로 대표되는 ‘다원주의’와 ‘실용주의’, ‘프래그머티즘’으로 나아가는 흐름을 연상시킨다.
칸트가 틀을 잡은 관념론은 헤겔에 이르러 극성을 이루지만,
어떻게 보면 그 이후 이 세계를 재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차적인 방법은 미국식의 실용주의화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다니엘 켈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세계 독자들은 독일 문학에서 무거움과 진지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독일 문학이 지겹다.
                    묵은 인상을 걷어낼 새로운 문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였을까?
[세계를 재다]는 정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 소설의 고정관념을 깨고
상당히 경쾌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가득하여 속도감있게 잘 읽히는 책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철학적 관점은 결코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무거운 주제의식이 경쾌함을 가지게 된 첫 번째 공은 당연히 저자인 다니엘 켈만에게 있고, 다음으로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번역자에게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독일문학 = 무겁고 지루한 문학’이라고 일반화시켜버리는 관점에 절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실제 인물에 상상력을 더하여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담아낸다는 것이, 그것도 흥미롭게 담아낸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을 알기에 이 책의 가치는 결코 작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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