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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우주의 크기는 무한하지만,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육십여가지 원소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원소들의 결합이 제아무리 많은 수효에 이른다 해도, 끝내 유한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유한한 원소들로 무한대의 우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온갖 결합이 이루어지면서, 갖가지 결합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한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책을 창조해 내는 작가는 물론이고, 그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각각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책이란 세계 속에서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론 충돌하고, 때론 투쟁하고, 때론 타협하고, 때론 어울리고, 때론 섞여 버리면서 한 세계는 다른 세계를 만나기 이전보다 더욱 풍족함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보르헤스가 '천국은 분명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책이 가진 이와 같은 끊임없는 성장과 확대재생산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절대자가 창조한 우주는 유한한 원소들의 끊임없는 결합으로 무한히 확장한다.
이와 같이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유한한 책은 서로 다른 책, 서로 다른 인간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확대되는 속성을 지녔다.
정혜윤 작가의 [그들의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11명의 유명인사들을 내세워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만났을 때 일어나는 갈등, 대립, 타협, 조화 등의 창조과정을 '책'을 매개로 풀어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저명인사들이 우리도 모두 알만한 유명한 책을 한 권씩 소개하는 소프트한 책 소개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간적으로는 유년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간적으로는 시골 촌동네에서부터 먼 동토의 땅 레닌그라드까지,
하나의 소우주인 개인이 자신의 삶의 결절점 곳곳에 이정표로 자리잡은 책과 영화 등 예술이 무엇인가를 추적하고,
또한 그 예술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구성해 왔는가를 더듬어 가는 느리면서도 진중한 발걸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의 주인공은 11명의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저자인 정혜윤씨라는 느낌을 받았다.
깊은 독서를 통하여 형성한 자신만의 책관(觀)과 세계관을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잔잔히 풀어내고 있다고 할까...
그럼에도 이 책에서 소개된 11명의 '유명한' 사람들의 현재가지 인생편력은 내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읽은 책의 높은 수준을 부러워하거나, 내가 아는 책이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실망할 새가 없었다.
진중권씨가 소개한 영원한 도서관을 떠돌며 이 책 저 책 뽑아가면서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이 즐거웠고,
정이현씨가 다른 사람을 속이던 불안과 두려움이 현실로 될까봐 스스로도 불안해 하였으며,
공지영씨의 '나는 살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라는 살벌한(!) 외침 속에 그녀의 울분과 회한의 풀어짐을 느꼈다.
김탁환씨의 꿈은 역사소설이 되어 시공간을 초월한 작가와 역사적 인물의 교감임을 알 수 있었고,
임순례씨의 영화는 <우생순>을 빼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꼭 대중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인 것 같아서 나 또한 푸근해졌다.
은희경씨의 인터뷰에서 그녀의 [새의 선물]의 영악하고 당돌한 '진희'의 원형을 발견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진경씨의 지적인 노마드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고, 또한 그런 그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변영주씨의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는 잊기 쉽고, 놓치기 쉬운 삶의 당위성에 소홀하지 않는 치열함을 말해 주었으며,
신경숙씨가 소개한 프랑시스 잠의 시에서는 아무도 없는 눈쌓인 새벽길을 보는 것과 같은 투명함을 느꼈다.
문소리씨의 치열한 삶이 내면의 빛으로 승화되어 주위를 비추어 줄 때,
박노자씨는 이방인에서 내부인으로 들어와 내 마음 속의 파시즘을 가슴 아프게 찔러 주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 11개의 세계는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을 통해 나의 세계롤 들어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만들어 온 것은 어떤 책이었고, 어떤 경험이었는가?
아주 어릴 때 읽었던 출판사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던 조잡한 과학도서의 책 뒤표지에 있었던 유명한 말..
즉,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자신만의 세계에 감금시키거나 마음과 생각과 상상력을 한 군데에 고착화시키고 싶지 않아서 책을 읽는다고 말해왔다.
그렇지만, 실제 내가 읽는 책이, 내가 하는 독서가 새로운 세계를 통하여 나의 세계를 끊임없이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반성과 고민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은 앞으로 내가 읽어볼 책의 리스트에 수많은 책목록을 첨가하게 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장영희 교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이후로 어떤 책에서 소개된 책을 나도 읽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던 대학시절에 읽었던 책도 있고, 최근에야 접해본 책도 있었지만,
그 한권의 책이 지닌 의미(그게 비록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의미일지라도)를 알고서 다시 읽을 때의 즐거움은 또한 새로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