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 이야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박상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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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 브라이슨은 특별한 기억이 남는 작가이다.
그는 문과 출신인 내게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와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어렵게만 느껴졌던 과학을 그렇게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반할 만한 작가였지만,
더 놀라운 것은 빌 브라이슨 자신도 과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순간순간 들었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였고,
그 과정이 마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해결하는 즐거움에 가득찬 학생을 떠올리게 했다.
이 사람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공자님 말씀이 있는데,
바로 논어에 나오는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는 말이다.

이런 작가가 ‘미국’이라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나라를 만났으니, 그 만남이 밋밋할 리가 없다.
게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긴 하지만 20년이 넘게 영국에서 살다가 귀향한 ‘이방인’의 자격으로 만난 특수한 상황이니 말 그대로 ‘특별한 만남’이 되지 않겠는가.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때때로 귀엽게(!) 투덜거리는 작가, 자신이 느낀 바를 주저하지 않고 드러내며 그 이유를 찾는 작가인 빌 브라이슨은 고국과의 만남에서 느낀 점을 60편의 글에 담았다.

그는 영국에서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인 20년을 보내고 고향인 미국으로 귀향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20년 만의 미국생활은 여전히 익숙한 것과 전혀 새로운 것이 뒤섞인,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카오스’ 상태였을 것이다.
일 년에 두어번 고향을 찾는 내 경험으로 비춰봐도 그렇다. 일년에 두 번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빌 브라이슨은 딱딱한 여행기나 감상에 치우친(오! 나의 조국이여! 하는 식의 글) 정착기를 쓰지 않았다.
여기서 빌 브라이슨의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그래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강점 두 가지가 나온다. 바로 유머를 통한 친숙함과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지적해 내는 날카로움이다.
이런 강점은 10년도 더 지난 원고(이 책에 수록된 칼럼들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쓰여진 것이다)를 2009년에 읽어도 독자들을 킥킥거리게 만들면서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도록 불가사의한 마력을 발산하기까지 한다.

그는 스머프 만화에 등장하는 투덜이 스머프처럼 미국 생활 중에 연신 투덜거리는데,
그 투덜거림이 마치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과 같아서 귀엽고 재미있다.
그런데 놀라운지고!
그 투덜거림에는 재미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자 귀향민으로서 빌 브라이슨이 느끼고 파악하는 미국인에 대한 날카롭고 진지한 성찰이 가득 담겨 있다.
괜히 책 제목에 ‘발칙한’이라는 쉽게 쓰기 힘든 단어를 수식어로 붙여 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짜 도넛을 제공한 친절한 동네 우체국에 찬사를 보내다가도 불분명한 주소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우편서비스에 불만을 토로한다.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모습은 좋지만, 그 도가 지나치고 너무나 복잡해져서(아침식사 메뉴만 해도 9가지의 달걀과 16가지의 팬케이크, 6종류의 주스, 2가지 모양의 소시지, 4종류의 감자, 8종류의 토스트와 머핀, 베이글이다) 오히려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투덜거린다.
몇 십미터 떨어진 체육관에 차를 타고 가면서 체육관의 러닝머신을 이용해서 살을 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왜 아무도 걷지 않는가?’라고 절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모습은 ‘낭비’로 보일 정도로 과도한 소비 지향적인 문화와
공항과 식당, 이민허가 과정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규정에 과도하게 얽매이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블랙 코미디(black comedy)를 즐기는 이유는 웃음 속에 불안함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빌 브라이슨의 고군분투 고국 정착기를 따라 읽다보면 우리는 웃음을 그칠 수가 없는데,
그 웃음이란 것이 파안대소하거나 빙긋이 미소 짓는 것과는 좀 다른, 키득키득거리는 ‘집어 삼키는’ 웃음이다.
이런 웃음은 뭐랄까, 대상의 숨겨진 모습을 발견할 때 짓는 다분히 관음적인 웃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웃음의 원천은 전적으로 빌 브라이슨의 유머와 날카로움 가득한 글쓰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니, 그의 미국 정착이 좀 더 시간을 끌어서 더 깊은 블랙 유머로 나타났으면 하는 것은 좀 너무한 부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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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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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나온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눈이 확 떠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뭔가 이전까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것이 180도 달라져 보인 체험이었다.

이번에 이 책을 거의 10년만에 다시 읽었다.
역시 책은 일정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여러번 읽으면 새롭게 보인다는 점을 실감했다.
처음 나온 이후로 시간도 많이 흘러서 사회의 여러 가지 면이 변화했다.
또한 출판된 이후 일어난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학자들과 활동가들 사이의 논쟁도 이 책을 보는 새로운 관점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 책이 주는 성찰과 반성, 고민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란 사회(전체)의 구조화된 질서 또는 의식과 행동체계를 개인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장(場)을 말한다.
이 때문에 habitus를 ‘삶의 습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진중권씨 같은 경우는 ‘습속(習俗)’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중요한 점은 ‘습속’은 무의식 중에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구성하고, 우리를 길들인다는 점이다.

우리 현대사의 많은 부분은 폭력과 권위에 의한 지배라는 그다지 즐겁지 못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완전하게 청산되지 못한 제국주의 잔재, 군사 쿠데타, 광주를 폭력으로 진압한 두 번째 쿠데타...
그래서였을까? 대학생이었던 시절 우리가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파쇼정권 타도’였고,
민주화 운동이 거둔 소기의 성과로 인해 이제 어쩌면 정치권력으로서, 타도의 대상이었던 실체로서의 파시즘은 사라졌고, 앞으로도 등장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시대를 겪으면서 마치 ‘가랑비에 옷젖는 줄 모르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식과 사고, 생활양상이 파시즘에 물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habitus가 되어 우리들의 일상이 무의식적인 가운데 파시즘적 행동, 파시즘적 사고로 변화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게 된’ 모습이라고 할까.

임지현 교수와 여러 필자들이 함께 만든 [우리 안의 파시즘]은 파시즘의 논리와 체계가 우리의 일상생활로 어떻게 파고들어왔으며, 어떻게 habitus가 되어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면서 우리 자신이 ‘파쇼화’되고 있는가를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임지현 교수는 개인적, 미시적 수준에서 형성된 파시즘은 독재정권의 존속을 위한 기반이 되었고, 이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힘의 독재’ 뿐만 아니라 ‘합의 독재(consensus dictatorship)’를 형성함으로써 지배구조를 지탱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장 민주적이고 열려 있어야 할 진보 진영조차도 그 운영원리에는 파시즘의 논리가 살아 숨쉬고(물론 잘 보이지 않는 형태로) 있음을 지적한다.

맹목적인 반공교육은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모든 것에 빨갱이의 낙인을 찍어대는 ‘자동회로’를 구축하였다.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도 여성에 대해서만은 가부장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아무 생각없이 찍었던 주민등록증의 지문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병역의 의무에서 임지현 교수의 주장대로 ‘파시즘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출판되고 난 이후 벌어졌던 논쟁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우리 안의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또 하나의 양비론에 이용될 소지가 충분하고, 사회운동을 ‘품성’이 갖추어진 후에나 해야 한다는 논리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파시즘 정권과 독재의 유지존속의 책임의 일부분을 그동안 우리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왔던 민중에게 환원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신(新)양비론이 나타나게 된 핵심은 이 책이 비판하고 있는 전근대적이고 파시즘적인 속성들, 즉, 권위주의나 가부장주의, 차별이 마치 그러한 습속을 만들어 내고 자신들의 이익유지를 위하여 계속 확대재생산해 온 집단의 책임을 묻기 보다는 민중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지고 실천되어지는 것으로 보는 논리 때문이다.
이 논리는 과거 독재를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흔히 하던 말. ‘너 자신부터 깨끗해진 후에 정부를 비판해라’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소위 진보운동 세력이나 시민사회운동 세력을 비판하는 아주 전형적인 지배층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은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냥 도닦듯이 개인이 깨끗한 생활을 하면 그만인 것을....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소중한 저작이며, 그 의의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점을 가슴 아프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해 오고,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바라보던 것이 실은 ‘국가중심주의’, ‘가부장주의’, ‘혈통주의’, ‘차별주의’, ‘권위주의’의 산물임을 알려주며,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그런 것들이 바로 내 일상에 체화되어 습관처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소위 이 사회의 진보를 바라고, 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성찰지점이 될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앞서 지적한 양비론적 입장, 사회개혁 무용론적 입장에 조심한다는 전제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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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호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2
외젠 다비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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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거세게 물결치는 격정적인 물줄기와 같았다면,
바로 다음에 읽은 외젠 다비의 [북호텔(Hotel Du Nord)]은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와 같았습니다.

이야기는 생마르탱 운하가 흐르는 파리 북부의 ‘북호텔’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이 호텔은 ‘화려함’의 대명사 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호텔’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다소 어색하고 허름한 건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소위 ‘파리지엥’이라고 말할 때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사람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북호텔’에 머물다가 떠나는 사람들은 파리의 서민들과 빈민들, 무슨 이유에서든 숨어 있어야 하고 피해 다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특급호텔에 비해 규모도 작고 최신식의 시설도 갖추지 못하였으나
파리의 하층민들에게 북호텔은 고단한 하루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하루를 마치고 짧게나마 휴식을 얻는 마무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북호텔은 그들이 먹고, 잠들고, 유혹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삶의 공간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호텔 주인인 르쿠브뢰르 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호텔과 인연을 맺습니다.
그러나 인물들 사이에는 비중의 차이도 없고,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북호텔’ 자체가 주인공이 될 만 합니다.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삶에 지친 사회의 하층민들을 품어 안고 있으면서,
그들 삶의 치열함과 노곤함을 모두 그 몸 곳곳에 흔적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설 마지막에 철거당하는 호텔을 보면 마치 다른 소설에서 주인공이 비장한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볼 때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인물들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녀인 르네와 미마르의 부인이었던 쥘리의 인생이 가장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북호텔의 하녀였던 르네는 사랑하던 애인에게 버림받아 절망하지만, 아기를 낳아 행복을 그려갑니다. 그렇지만 행복도 잠깐. 아기는 전염병으로 죽게 되고, 르네는 매춘부로 전락하여 마침내 호텔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쥘리는 익숙한 시골을 떠나 파리의 복잡하고 고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결국은 폐병을 얻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외젠 다비는 이들에게 값싼 동정을 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소위 하층민이 가지는 게으름과 부도덕을 탓하지 않으며,
이들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고 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탄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흐르는 생마르탱 운하의 물처럼,
외젠 다비는 그냥 그대로 이들의 생활을 그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떤 과장이나 곡해도 없이 솔직하고 담담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외젠 다비는 ‘북호텔’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삶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궁색하고 가난한 삶은 평생 유지될 지도 모릅니다.
아니, 매춘부로 전락하여 쓸쓸히 떠나간 르네처럼 오히려 더 낮은 지위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더욱 많습니다.
그러나 ‘북호텔’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인생역정을 보면 공통점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 감정도 없이 그려 낸 사람들의 일상이 오히려 어떤 웅변보다 더 강하게 삶의 치열함을 뿜어내고 있다는 점과 고단함 가운데서도 이웃에게 포도주 한 잔 사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치열함과 애정에 희망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 이전에 세상에서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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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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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문학을 읽는 이유중 하나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다보면 분명 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임에도,
그래서 그로 인해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파멸로 몰아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를 ‘인정’할 수는 없어도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게 바로 아마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작품 속 인물들에게 구현해 놓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가진 힘이 아닐까 한다.

[맥베스]의 주인공인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권력욕으로 반역하여 왕을 죽였고, 자신의 경쟁자를 암살할 것을 사주하였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 신하의 성을 공격하여 그 가족을 학살하였다.
그의 악행은 분명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햄릿과 달리 그의 악행은 훨씬 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
맥베스는 파멸당하고 정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맥베스]를 읽다보면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겉모습 뒤편에
죄의식으로 인한 불안과 양심의 소리에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맥베스는 자신의 손에 남겨진 죄악의 흔적을 세상의 모든 바닷물로도 씻을 수 없음을 깊이 탄식한다.

저 대양 모든 물로 내 손에서 이 피를
씻어낼 수 있을까? 아냐, 내 손이 오히려
광대무변 온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여
푸른 물을 다 붉게 하리라.

맥베스는 ‘권력획득’이라는 소원을 계속하여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음의 틈에 스며든 마녀의 예언과 부인의 부추김은 탐욕을 키웠고,
자신이 모시던 왕을 암살하는 구체화되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제 맥베스의 탐욕은 어떤 윤리나 종교, 지혜로도 씻을 수 없는 마음 속의 낙인이 되어 거꾸로 맥베스 자신에 대한 심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맥베스는 수백년 전 스코틀랜드의 한 특수한 인물이지만,
그의 인생행로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탐욕 앞에 무너졌고, 죄의식으로 고통 당하였으며, 정의의 심판을 받아 몰락하였다.
어쩌면 탐욕의 대상이 금전, 권력, 명예, 사랑 등으로 다양하고,
죄의식과 심판의 정도만 다를 뿐, 맥베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교창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탐심을 다스리는 방법을 강조하였고,
수많은 작가들은 탐욕으로 무너지는 인간군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 놓아 버리고 무소유, 나눔, 비움 등이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이지만,
인간의 나약하고 불완전한 본성이란 것이, 세상살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는가?
그래서 정의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맥베스의 파멸은 이성적으로 정당한 것이지만,
한 고귀한 영혼이 욕심 때문에 파멸당하는 모습에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고,
그 모습이 또한 탐욕과 양심을 가진 나의 모습이라는 점이 깊은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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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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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놀랍고 또 놀랍다.
한없이 부러운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이 학습공동체(?)의 이름은 지인을 통해서 들은지 꽤 되었다.
물론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금새 잊어버리긴 했지만.
이번에 우연히 ‘수유+너머’의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을 읽게 되었고,
올해 들어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게 되었다.
왜 이런 책을 지금에야 접하게 되었나 싶은 한탄과 함께.
(이 책은 2004년 1월에 나왔으니, 벌써 5년이 지난 책이다.)

나는 이 책에서 대학 시절 꿈꿔왔던 것,
나름대로 ‘공부’란 것을 하면서 이상향으로 삼아왔던 모습이 현실화된 것을 보게 되었다.
물론 이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학삐리’의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나의 삶이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마음 한 구석에 영원히 가지고 있을 꿈, ‘돈키호테의 꿈’과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동체’를 꿈꾸고 있지 않을까.
특히 요즘처럼 매일매일이 생존을 위한 삭막한 경쟁의 연속이며,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승자독식사회에서 지친 사람일수록 더욱 공동체를 원한다.
내 것 네 것 없이 공유하고 나누며, 서로에게 기여하고,
생존의 걱정 없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더 깊게 성장시키는 공간.

여기 승자독식의 사회를 거부하고 ‘공부’와 ‘학문’ 영역에서 출발하여 코뮨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수유+너머’라고 이름붙여진 공동체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솔직히 ‘수유+너머’에 대한 나의 인식은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인문학 공개강의를 하는 연구단체 정도에만 그쳤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통해서 이들의 실험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은 문턱→탈주→배치→축제→비전의 순서로 ‘수유+너머’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동체의 시작은 ‘문턱넘기’부터 시작한다.
넘어야 할 문턱은 무엇보다 권위에 빠진 제도권과 내 한 몸 편안한 안식을 찾는 조로증이다.
고정된 사고와 답답함 가운데 조금만 생각을 ‘전복’시키면 출구가 보이고
모든 것을 풀어놓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기만 하면 내 삶을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아감을 알려준다. 이것이 문턱넘기이다.
한 번 문턱을 넘고, 또 하나의 문턱을 넘으면 이제 공동체는 본격적으로 달려나간다.
사회가 미리 세워 둔 골인지점이 아니라, 주체가 이끄는대로, 내 삶이 개척되어나가는 곳으로 탈주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몇가지 몸으로 체득해야만 하는 자세가 있다.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공동체가 아닌,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는 공동체.
소유나 집착이 아닌, 상대의 본성을 촉발시키는 사랑이 발현되는 공동체.
일사불란함과 조직이 아닌, 이질성과 다중심, 밴드식 결합, 우발성이 범람하는 공동체.

그리고 이런 탈주를 위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의 습속과 버릇을 다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배치’가 바로 그러한 통과의례이다.
이 배치는 단순한 마음가짐의 변화만 의미하지 않는다.
먼저 ‘몸’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진지함’의 미덕도 바꿀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자의식’이란 가장 공고한 습속을 바꾸어 내야 한다.
그리고 이 배치의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렇게 배치가 바뀐 사람들은 이제 공동체를 형성하고 ‘축제’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현대의 삶이란 것은 얼마나 팍팍한가.
명문 대학=좋은 직장=부자의 등식은 이 사회 구성원 거의 전부를 구속하는 등식이 되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말이다.)
하나의 코뮌을 만들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수유+너머’는
바로 이렇게 우리에게 당연하게 습속화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시스템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왔던 것에 당당하게 반기를 들고 미래의 비전을 찾기 위한 ‘인류학적 보고서’이다.

얼마전 유목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유목의 특징은 어느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나는 데에 있다고 한다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수유+너머’의 유목이 이제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갈지 궁금해진다.
이 책을 읽고 ‘수유+너머’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다.
2004년 나온 책의 내용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다만 여전히 북적거리며 활기찬 모습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바라기는 이들의 실험이 반드시 성공하여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생활공간, 인간의 규격화된 경계를 넘는 공동체간 네트워크가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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