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호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2
외젠 다비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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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거세게 물결치는 격정적인 물줄기와 같았다면,
바로 다음에 읽은 외젠 다비의 [북호텔(Hotel Du Nord)]은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와 같았습니다.

이야기는 생마르탱 운하가 흐르는 파리 북부의 ‘북호텔’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이 호텔은 ‘화려함’의 대명사 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호텔’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다소 어색하고 허름한 건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소위 ‘파리지엥’이라고 말할 때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사람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북호텔’에 머물다가 떠나는 사람들은 파리의 서민들과 빈민들, 무슨 이유에서든 숨어 있어야 하고 피해 다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특급호텔에 비해 규모도 작고 최신식의 시설도 갖추지 못하였으나
파리의 하층민들에게 북호텔은 고단한 하루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하루를 마치고 짧게나마 휴식을 얻는 마무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북호텔은 그들이 먹고, 잠들고, 유혹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삶의 공간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호텔 주인인 르쿠브뢰르 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호텔과 인연을 맺습니다.
그러나 인물들 사이에는 비중의 차이도 없고,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북호텔’ 자체가 주인공이 될 만 합니다.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삶에 지친 사회의 하층민들을 품어 안고 있으면서,
그들 삶의 치열함과 노곤함을 모두 그 몸 곳곳에 흔적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설 마지막에 철거당하는 호텔을 보면 마치 다른 소설에서 주인공이 비장한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볼 때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인물들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녀인 르네와 미마르의 부인이었던 쥘리의 인생이 가장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북호텔의 하녀였던 르네는 사랑하던 애인에게 버림받아 절망하지만, 아기를 낳아 행복을 그려갑니다. 그렇지만 행복도 잠깐. 아기는 전염병으로 죽게 되고, 르네는 매춘부로 전락하여 마침내 호텔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쥘리는 익숙한 시골을 떠나 파리의 복잡하고 고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결국은 폐병을 얻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외젠 다비는 이들에게 값싼 동정을 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소위 하층민이 가지는 게으름과 부도덕을 탓하지 않으며,
이들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고 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탄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흐르는 생마르탱 운하의 물처럼,
외젠 다비는 그냥 그대로 이들의 생활을 그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떤 과장이나 곡해도 없이 솔직하고 담담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외젠 다비는 ‘북호텔’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삶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궁색하고 가난한 삶은 평생 유지될 지도 모릅니다.
아니, 매춘부로 전락하여 쓸쓸히 떠나간 르네처럼 오히려 더 낮은 지위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더욱 많습니다.
그러나 ‘북호텔’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인생역정을 보면 공통점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 감정도 없이 그려 낸 사람들의 일상이 오히려 어떤 웅변보다 더 강하게 삶의 치열함을 뿜어내고 있다는 점과 고단함 가운데서도 이웃에게 포도주 한 잔 사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치열함과 애정에 희망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 이전에 세상에서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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