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의 일치였으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짜는 5월 23일, 즉,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었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날짜는 5월 29일 밤, 즉, 그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 우리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적지 않은 생각을 하는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 나는 인문학이란 것이 사회과학적 인식과 실천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의미가 반감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굳이 마르크스가 말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들먹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기존의 [독서일기] 시리즈를 이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7]이 되지 않은 이유도, 굳이 “공부”라는 제목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읽기로부터 얻어진 지식과 사색의 결과물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과 만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의 칼날로 빛날 때에 인문학은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미국 사회의 ‘과두정’을 말하고 있는 <과두정이 온다> 부분이었다.
왜 작가는 민주주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는 시대에 철지난 ‘과두정’을 이야기하는가?
그는 미국의 예를 든다. 미국이 지금과 같은 세계의 “깡패국가”가 된 원인에 대해서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한다.

“미국의 부는 생산 활동에서 나온게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결과로 이룩됐다” 그래서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미국화한 세기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20세기 이후 미국의 정치지형을 관통하고 있는 흐름은 ‘과두정’이라고 지적한다.
과두정이란 소수 엘리트들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제가 아닌가.
미국의 과두정을 이끄는 소수 엘리트들은 SWAP이란 인종적 방패와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도덕적‧종교적 경직성을 보호막으로 삼고, 그 속에서 ‘군산복합체’로 표현되는 초국가적인 거대자본과 군사력의 힘에 기대어 있는 집단이라 하겠다.
이들에게 전세계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존속하기 위한 자기들의 앞마당일 따름이며,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시킨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계 어디라도 개입할 준비를 갖춘다.

문제는 이런 미국에서의 과두정이 21세기가 되면서 ‘미국화’하여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장례 과정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inner circle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입만 열면 반복하곤 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와는 별 상관없는, 그래서 미국화하고 있는 과두정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는 거리가 멀고 자신들의 지배계급적 이익에 충실한 사람들,
무엇이 그리 자신이 없는지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아예 그 비판이 나오지 못하도록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봉쇄해야 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경제적, 교육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심리적 우월감으로 발전시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낙인을 찍는 사람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이윤을 얻어 ‘아류제국주의’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미 공고화될대로 공고화된 이들 집단을 어떻게 해체시킬 수 있는가
과두정화되어 미국화하는 지배체제에 대항해 어떻게 민주주의의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가진자의 대통령이 아니라 서민대통령으로 일컬어지며 영면에 들어간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본다.

같은 맥락에서 <촘스키와의 대화>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촘스키가 누구인지는 여기서 길게 반복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장정일 작가가 왜 촘스키를 자신의 책에 ‘모셔오게’ 되었는지는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좀 길더라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소위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계급은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거나 온갖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소외시키기 위해 선전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까다롭고 막중한 선전 사업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들이 학식을 쌓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다. 다국적기업과 국가가 야합하고 있는 오늘과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을 통해 체제 선전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체제에 의해 저명한 지식인 혹은 책임있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체제의 나팔수가 된 지식인들이 민중을 프로그램화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중을 민주주의의 참여자에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통치 계급과 거기에 기식하는 지식인들은 대중이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결국 지배계급의 영구적인 자리보전을 위한 전략은 첫째, 대중들을 방관자로 만들 것, 둘째,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대중들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들 것 등 두 가지로 요약된다.
촘스키가 미국 사회를 보면서 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서 쓴 글이 아닐까 할 정도로 지금 우리사회의 모습과 합쳐진다.
방관자로서의 대중, 구경꾼으로서의 대중..... 가슴 한 구석을 아프게 찌르는 뜨끔한 말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참여정부의 가장 큰 공은 탈권위적 정치개혁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권위의 해체는 대중들로 하여금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대중들이 서로 소통하며 발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다.
물론 이런 현상을 본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을 거다.
‘무식한 대중이 뭘 아나?’, ‘배우지도 못한 것들이 건방지게시리...’

[공부]에는 귀에 익숙한 사람, 생판 처음 듣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들 중 마르크 블로흐와 하이데거를 비교해 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마르크 블로흐는 현대 역사학의 큰 족적을 남긴 역사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당시
안전한 생활과 풍요로운 노후를 보장받는 망명의 길을 버리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역사학의 중요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현상학적 측면에서 존재란 자신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유명한 테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치 부역자’라는 평생 씻을 수 없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으며,
존재를 억압하는 기술문명과 싸운다는 명분 하에 나치에 협력하여 프라이부르크 총장을 지내면서 독일 대학 내의 ‘학문적 자율성’을 빼앗아 간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과정과 생애를 돌아보면서
블로흐와 하이데거의 삶,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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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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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의 [캐비닛]은 책으로는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영화로는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이 책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시종 유쾌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만큼 평론가들로부터 작품성 인정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먼저 읽은 독자들의 서평에는 작가의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력과 재미에 대한 칭송이 넘쳐났다.
하지만, 이 책은 내내 읽으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들게 했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들인 ‘심토머(symptomer)’들은 현재의 사회질서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같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친 사람들’일 뿐이다.
그리고 과학과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돌연변이’들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미친 사람들’과 ‘돌연변이’들을 향해 사회가 대하는 태도이다.

지금 사회가 개인이 추구해야 할 긍정적인 가치로 요구하는 것은
좋은 성적-좋은 직장-좋은 가정.... 이런 것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안정적으로 살면서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고, 쓸데없는 생각말고 맡은 바 일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반항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것으로 방향을 튼다.
바쁜 생활을 뒤로 하고 잠들어 버리거나(토포러), 행복을 찾아 시간의 절대성에 도전한다(메모리모자이커). 고양이라는 하급 생물이 되기를 원하기도 하고, 외계를 고향으로 생각하여 외계인과 소통하려고 한다.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은행나무에 바친 이야기에 이르면, 이들 ‘심토머’들의 반항은 극에 이른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증상들은 개인별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현대의 생활, 특히 도시 생활은 사람을 얼마나 분주하게 만드는가.
물질적 성공에 대한 신화와 배금주의는 또 얼마나 사람을 잔인하고 삭막하게 만드는가.
질서와 안보의 이름 하에서 획일화된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습이 아닌가.
물론 일탈을 꿈꾸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실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한다.
여기에 반항하고 스스로의 개성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한 사람’,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
아니면, 기업의 이윤창출을 위한 먹잇감이 되는 키메라처럼 돈벌이의 대상이 되고 만다.

[캐비닛]은 이처럼 거대한 현실 앞에 왜소해 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최소한의 저항을 블랙유머로 환기시킴으로서 내가 지금 처한 현실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일을 해낸다.
13호 캐비닛 속에 들어가는 특이한 삶을 사는 것에 자신이 없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다들 자기만의 조그마한 개성을 가지고, 작게나마의 일탈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분출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이 좀 더 많아지고, 좀 더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용인되기를 바란다.

13호 캐비닛 속에 잠들어 있는 375명의 이 사회의 ‘심토머’들은 그 후 어떤 결말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권박사는 조만간 사망할 것이고, 권대리는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피해 버린 데다가, 키메라를 노리는 기업은 그 노력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심토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상담해 줄 사람, 함께 술마시고 생활하면서 웃고 울어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이들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지 걱정과 함께 궁금함이 든다.

비록 허구인 소설 속의 이야기라 해도, 앞서 언급한대로 여기에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는 이들이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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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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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참...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책이다.
사실 읽는 내내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책이었다.
예전에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읽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 책에서는 저자(정혜윤 PD)와 나 사이에 다른 여러 사람들이 끼어 들어가 있어서였을까?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생소함이 [침대와 책]에서는 느껴졌다.

저자의 방대한 독서량과 거기서 비롯된 깊은 성찰에 맞장구치고 싶기도 하고
내 독서량이야 부끄럽지만, 그래도 내가 읽은 책의 제목이 보일 때 반갑기도 하고,
때때로 마음 속 깊이 묻어둔 단어들.. 예를 들어 마르크스나 범민족대회, 차라투스트라 이런 단어들을 만났을 때는 순간적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냥 두고 페이지를 넘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말들.
성찬(盛饌)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뭐랄까. 거리감. 그래. 왜 나는 이 책에서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 걸까?
정혜윤 PD의 [침대와 책] 속의 글들은 왜 그런지 낯설다. 이유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생각해 보니, 그건 내 독서취향에서 나오는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따뜻함’과 아울러 ‘시원함’도 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아울러 자신이 읽었던 책 중에서 이런이런 건 마음에 안든다하고 시원하게 까주고(?),
때론 무모할 정도로 ‘뭐 이런 책이 다 있나?’라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면을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침대와 책]은 너무 착한 독서일기 같다.
자신의 삶 가운데 영향을 주었던 책과 주인공, 스스로의 성찰에 도움이 되는 책과 주인공을 모아 두었다는 느낌이 순간순간 들었고,
그래서인지 저자는 다양한 작품 속 인물, 또는 위대한 작가들의 말에 의탁하고 때때로 그 가운데로 숨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글쓰기가 다른 독자들에게는 이 책의 최고의 강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소소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 삶을 긍정하고, 책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밑줄쳐가며 뽑아내는 독자들에게 정혜윤 PD는 최고의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각 장마다 붙인 제목들도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언제든지 경험하는 것들 아닌가.
가족이나 친구와 싸웠을 때, 또는 가족이나 친구의 하소연과 눈물을 어떤 위로의 말을 찾을 수도 없이 그저 들어주어야만 했을 때.
내가 도대체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변화하고 싶고 일탈하고 싶고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정혜윤 PD는 그런 시기마다 독자들에게 잊고 지냈던 아름다운 꿈을 되살려 주고, 또다른 꿈을 꾸게 해주는 글을 쓰는 것 같다.
일상의 소소함 가운데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시선이 놀랍다.
행복한 사람에게 더 큰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울고 있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라디오 PD라는 직업 때문에 그럴까?
이 책을 읽고 난 후 저자에 대해 검색하다가 우연히 최근 <시사In>을 통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쓴 정혜윤 PD의 공개편지를 본 기억이 있는데, “역시나!”라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작가에게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시원한’ 글을 요구한다면, 나는 너무 못된 사람일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말은 정말 내 머리로는 이해 불가이다.
침대=관능의 이미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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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 부키 경제.경영 라이브러리 1
로버트 하일브로너. 레스터 서로우 지음, 조윤수 옮김 / 부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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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
저자가 책의 제목으로 삼은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물론 나는 경제학도가 아니니 답변의 정확도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신뢰하지 않아 주었으면 한다.

내가 보기에 경제학은 첫째,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의 문제에 대하여
둘째, 경제체계 내의 주체들(가계, 기업, 정부)이 어떻게 대응하며,
셋째, 최대 효율을 위하여 어떻게 자원을 배분하며, 또 결과인 성과물을 어떻게 형평적으로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이론적인 해답을 제공해 준다.
이렇게 경제학의 ‘말할 수 있는 점’에 대한 설명이 책의 제2부와 제3부에 ‘거시경제’ 및 ‘미시경제’라는 제목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학으로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그리고 더 큰 규모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단하 예를 들어 수입의 문제만 봐도 이런 면이 나타난다.
즉, 값싸고 질좋은 외국물건이 수입되어 들어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수입품으로 인해 국내 생산이 중단되고 해당 직종의 종사자들이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소비자들이 외국 제품에서 얻은 이익의 가치는 있는 것일까?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사회 전체적인 부는 과거보다 훨씬 증가했음에도 소득 불균형은 더욱 커졌다.
각 국 정부는 환율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기를 쓰지만, 투기 자본으로 경제 전체가 당분간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는 경우가 발생한다.
분명히 기술은 진보하고 GDP도 매년 성장한다고 하는데, 고용은 늘지 않고 일자리의 질도 갈수록 저하된다.
전세계가 열병처럼 앓고 있는 현재의 경제위기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위기의 진원점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과정은 경제주체들이 ‘합리적 존재’임을 가정하는 순수한 경제학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흔히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또다른 요인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파악하지 않고, ‘정치경제학’이라는 상호연관되는 체계 속에서 분석한 것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얻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이 선택한 사회적, 정치적 설명은 지금이야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해도,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이단적인’ 설명이었을 것이다.
경제학은 상대적으로 명료하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숫자로 현상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다소 명료하지는 않아도 사회학적이나 정치학적인 설명이 현상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이 책의 강점이자 놀라운 점은 ‘경제입문서’를 표방하면서도
마치 잔잔한 수면 아래의 역동적인 흐름을 읽어내는 것처럼,
경제학의 숫자와 이론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정치적, 사회적 결정의 역동성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의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저자들의 기본 입장은 시장주의자 또는 지금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상당히 비판하고,
경제의 원활한 흐름에 있어서 국가의 개입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읽힘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또는 미래의 위기 상황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자본주의의 변혁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마르크스도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했듯이, 인류사에서 자본주의는 혁신적인 경제체제였고, 이로 인해 이전의 봉건적인 생산관계는 종식되었다.
자본주의의 변혁성은 두 가지 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윤을 향해 확장하고자 하는 확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자율 교정성이다.
자본주의가 위기상황을 타개하여 이윤을 계속 창출하고자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을 비롯한 방법을 동원하여 문제를 교정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한,
결국 인류는 자본주의 안에서 생존의 해답을 찾게 되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확장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위험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자본의 확장과 축적이 다소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져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생활의 어려움은 가중되어 가고, 학자들에 따라서는 L자형의 장기불황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의 확장성에 기대하기 보다는 이를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개입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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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하멜른
케이스 매퀸.애덤 매퀸 지음, 이지오 옮김, 오석균 감수 / 가치창조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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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하멜른]은 피리부는 사람의 쥐떼 소탕과 어린이 실종 전설을 배경으로 하여,
중세 봉건제도의 하에서의 농노들의 가슴 아픈 생활, 정의와 자비의 양립, 가족과 사회성원으로서의 의미 등
만만치 않은 소재와 주제들을 버무린 흥미진진한 역사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다.

가혹한 영주의 수탈로 아버지가 병들고,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된 요하네스는 피리 길드의 장인들을 만나 도제로 들어간다.
몇 년 후 하멜른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쥐떼를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하네스.
그는 정의와 자비를 상징하는 다색옷을 입고 하멜른에 도착하게 되고,
쥐떼와 영주들의 압제에 고통당하는 민중들과, 민중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흥청망청 즐기며 혈세를 낭비하는 지도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쥐떼를 소탕하면 받기로 되어 있는 사례금 금고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하멜른 시의  시장의 딸인 클라라와 함께 정체불명의 자객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우선 이 책은 무척이나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기에 좋은 책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지고지순한 가치로 믿어 온 것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충돌하며,
또 어떻게 변형되고 반박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은 무한신뢰와 무한애정의 관계로 흔히 생각하지만,
때론 아들은 아버지를 무능하게 여기고, 아버지는 아들을 무시하거나 학대한다.
이런 이중적 부자관계는 반역자 안셀름에게서도, 바우어와 슈트롬 사이에서도, 그리고 주인공인 요하네스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리고 사례금을 받지 못하게 된 요하네스가 주장하는 부정부패에 대해 ‘정의’로운 심판에는
‘자비’가 빠져 있어서 융통성 없는 원리원칙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엄청난 재산을 갖춘 영주이면서 하멜른 시의 부시장이란 명예를 얻은 바우어의 이면에는
농노들을 착취하고 시민의 재산을 횡령하여 결국엔 스스로를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은 악마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길드와 시민사회의 갈등, 자매 사이의 갈등, 중세의 계층과 계급 사이의 차별 등이 하멜른에서의 닷새 동안 펼쳐진다.

하멜른을 황폐화시킨 쥐떼의 정체와 본질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가장 가까운 가족 내에서 싹튼 미움과 분노, 자비와 애정이 없는 정의,
지위와 명예를 이용한 착취와 수탈 등이 하멜른을 뿌리부터 갉아먹고,
결국에는 그들의 미래인 어린 아이들조차도 앗아가 버린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모든 하멜른 시민들과 피리 악사들의 화해와 축제라는, 겉으로 보기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여전히 찜찜한 그 무엇인가가 남아 있었다.
바로 사라진 아이들은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었고,
그래서 하멜른의 축제 뒤쪽에는 미래를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슬픔 속에 있는 부모와 그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의 어떤 모습이 하멜른의 쥐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 쥐떼가 우리를 뿌리부터 갉아먹고, 결국에는 우리의 미래까지도 가져가 버리는 날이 오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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