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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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서울’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나 인정하듯이 서울은 정도(定都)된 이후 600년이 넘게 이 나라의 수도이며, 그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도시이다. 어떤 이들은 서울의 이러한 발전상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남한 면적의 0.6%에 불과한 서울시의 독점적 위치를 비판하기도 한다. 서울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부정적 인식의 가장 큰 근거는 서울이 바로 ‘수도’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도시’로서의 서울은 ‘수도’로서의 서울과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한다. 물론 한강 하류 지역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제의 초기 도읍이었던 ‘위례’시대를 빼고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서울은 ‘수도’가 아니었고, 그래서 정치적 중심지도, 경제적 중심지의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서울이 가지는 현재의 독점적이고 절대적인 위치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 한 국가의 수도가 됨으로써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서울에서 ‘수도’라는 딱지를 떼어 버리고, 이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 아닌가 한다.

전우용의 [서울은 깊다]는 그런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관공서의 여행안내서가 가지는 딱딱한 공무원체를 싫어하고, 일부 여행기들이 가지는 과도한 감상의 남발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워 한다. 그런 점에서 서울이 어떻게 ‘근대성’을 확보하면서 주민들을 통제하는 거대도시가 되어 왔는지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차분하게 반추한 이 책은 서울에 대한 관광 안내서로는 부족할지 모르나, 도시(서울)의 형성에 대한 뜻깊은 고찰이라고 평가한다.

도시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압축적으로 표현된 근대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도시를 근대적 공간이라고 평가하는 것에는 두 가지 함의를 내포한다. 무엇보다 전통사회에 비교해 볼 때 도시는 근대적 특성,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적 특성’을 가진 공간이라는 의미이고, 둘째 이와 같은 근대적 특성은 그 상대 개념인 전근대적 농촌(산촌 및 어촌까지 포함한 개념)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확연한 차별성을 가지는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도시에 ‘근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서는 도시 속에서 사회적 관계, 특히 위계적 질서라는 관계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농촌과 달리 도시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날 때에 비로소 형성된다. 도시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조건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보도록 하자. 여기에 ‘도시’라는 말 대신에 대한제국 선포를 즈음한 구한말의 ‘서울’이란 단어를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시는 농촌과 외형적으로 아주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는데, 바로 성벽(또는 목책, 울타리 등등)이라는 것으로 대표되는 공간적 경계선을 가진다는 점이다. 부르주아라는 말도 ‘성 안에 사는 사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조선시대 서울을 생각해 보면 서울의 경계는 딱 사대문 안, 그러니까 성문을 열고 닫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성벽까지가 경계였다.
성벽은 도시를 농촌이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공간으로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문제는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단순한 구분점에 불과했던 성벽이 그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선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농촌 사이의 섬’ 정도의 상대적으로 대등한 의미를 가지던 도시는 본격적으로 생존과 확장을 위해 농촌을 수탈하는 일방적이고 위계적인 의미를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도시의 성장사는 곧 농촌의 수탈사이기도 했다. 생산 보다는 소비를 그 특성으로 하는 도시는 농촌에 무언가를 ‘공급’해 주기 보다는 농촌으로부터 각종 생산물과 사람(인재)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태생적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근대사회 도시가 주위 농촌을 수탈하고 ‘문명’을 생산하여 집적하는 동안 농촌은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도시는 이렇게 집적된 생산성을 바탕으로 주위로 확장된다. 바로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게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에 따라 과거에는 ‘농촌 사이의 섬’과 같았던 도시가 인구집중과 더불어 ‘메갈로폴리스’가 되어 간다. 이건 아마 누구나 경험적으로 느낄 것 같은데, 경부선 기차를 타고 부산 쪽으로 내려가면 천안 정도까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농촌이라기보다 오히려 도시의 연속에 가깝다. 인천 방면도 마찬가지로서, 서울지하철이 연결되는 곳은 어디든지 이제는 ‘도시’라고 보아야 할 정도이다.

도시 공간의 확장이 근대적 도시형성과 관련하여 가지는 의미는 사회적 권력관계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일개 도시 수준이 아니라 전체 사회구성원들에게 확장되어 간다는 점이다. 자연적 특성이 강한 농촌에 비해 도시 공간은 인위적으로 구성되는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도시 공간이 확장된다는 것은 도시가 가지는 인위적인 통제력이 확장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권력’이란 ‘공간을 개조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내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미한 권력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 개조할 수 있는 공간은 내 책상 주변 정도이지만, 서울시장이라면 서울시를, 대통령이라면 한 국가 전체의 공간을 개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추진한 청계천 복원사업이나 지금 추진하는 ‘4대강 사업’도 공간에 대한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어쨌거나 도시는(엄밀히 말하자면 도시공간을 개조할 수 있는 권력자들은) 건물과 도로, 광장과 공원 등을 인위적으로 배치하고 개조함으로써 그 안에 생활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동선을 통제하고, 사고와 태도를 지배하는 효과를 노린다. 조선왕조가 서울로 천도하면서 남북 방향의 지금의 세종로를 중심대로로 삼고 그 주위에 관가와 육의전을 배치한 것이나,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경희궁을 육교로 연결하고 동서 방향의 종로를 중심대로로 인식한 것도 다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마포에서 동대문까지 종로를 관통하던 전차길이 그대로 지하철 1호선으로 계승된 것도 도시가 가지는 공간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도시에 근대적 공간이라는 특성을 부여하여 거주민들의 사고와 태도를 지배하는 효과를 노린다고 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시간’에 대한 통제이다. 사실 산업의 주된 형태가 농업이었던 전통 사회에서는 시간을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해가 뜰 때쯤 일어나 일을 나갔다가 해가 질 때쯤 하루를 마무리지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 사회의 시간 관념에서는 중요한 것은 대체적인 ‘절기’ 정도를 아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수공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 생활에서는 시간을 정확하게 준수해야 할 필요성과 함께 시간을 ‘나누고’, ‘절약하는’ 양적인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해졌고, 이를 위해서 현재의 시간을 도시민 모두가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였다. 주요 역을 중심으로 도시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계탑이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했으며, <학교종이 땡땡땡>같은 노래들은 시간 관념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각인시켰다.
이제 도시는 인위적인 구조물들을 통해 거주하는 사람들을 시선과 동선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미분화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 양상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시간을 두루뭉실하게 썼다간 무능력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우리 사회가 소위 Korean Time을 얼마나 창피하게 여겨 극복하려고 했던가!!) 시간이 양적인 개념으로 바뀌면서 그 동안 질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던 근무시간이나 근무량 등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결국 생산성이 높다거나 효율적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시간에 많은 물품을 생산한다는 바로 ‘시간당 ~’ 하는 개념이다. 이 양적인 개념이 우리들의 생활 형태와 근로 형태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크고, 그 영향력이 확대되어 왔는지는 아마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실감할 것이다.

근대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대한제국 시기 서울시민들이 가장 경이롭게 받아들였던 변화가 무엇이었을까? 역시 전차가 아니었을까? 말과 소, 또는 인력으로 움직여야 했던 교통수단에서 벗어나 전에 보지 못했던 시커멓고 거대한 물체가 달려오는 모습은 당시에 경이로움 자체였을 것이다. 이렇게 전차는 ‘도시’가 가지는 공간적 한계를 뛰어 넘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시계는 전통 사회가 가지고 있던 시간적 한계를 뛰어 넘도록 하였다. 이제 시간은 절약할 수도, 낭비할 수도, 더하고 빼고 나눌 수 있는 사물이 되었다. 이렇게 세분화되어 버린 시간은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동력과 어울려 도시생활 자체를 물질 중심적 공간으로 바꾸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현대 서울의 모습이 비로소 구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글을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서울이 가지는 절대적이고 독점적인 현재 위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서울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은 오히려 결핍된 공간이다. 물품이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는지 모르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신선한 음식물, 여유로운 생활에 언제나 목말라 한다. 여러 동물실험에서도 증명되지 않았는가. 생존에 필수적인 요인들이 제한된 상태에서 개체의 밀도가 높아질 때 그 생명체가 얼마나 폭력적이 되고, 얼마나 공격적이 되던가.
나는 서울의 절대성과 독점성을 이제 지방으로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바로 지금도 정치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세종시 문제가 아닐까 한다. 누구든 기회만 있으면 올라오려고 하는 서울, 지방경제가 질식하고 있다는 절박한 외침의 한가운데 있는 서울, 한국의 다른 도시나 농촌은 감히 넘볼 수 없는 특권을 유지하고 있는 서울. 계속 커지고 수탈하여 규모가 커져가는 것은 무엇이든 폭발하거나 블랙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세종시 논란이 서울시민의 삶의질을 위해서라도 서울의 권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뱀다리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해 반드시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주제가 있었다. 바로 <근대=자본주의>라는 다소 도식화된 논리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적용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시대구분은 서양사, 특히 유럽사적인 성격이 강한데,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를 어떻게 구분짓느냐의 문제와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종 연간을 중심으로 하는 구한말을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인 근대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물론 임진‧병자 양란 이후 생산성의 증대와 신분제도의 문란을 근대사회가 가지는 전형적인 특징으로 파악할 수도 있겠으나, 이 시기는 하나의 태동기 또는 발달기 정도로 보고 중세시대의 생산양식과 사회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근대’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대한제국 칭제를 중심으로 한 고종 연간으로 설정했다고 보면 되겠다.

대신 우리 사회의 근대성이 지금 극복되어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할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이런 점에서 10여년 전에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포스트모던 열풍과 미셀 푸코는 그 의미와 아울러 비판점이 분명 존재한다. 나중에 ‘근대’라는 시대구분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하게 내 입장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여전히 그 과정중에 있다는 생각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모던’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다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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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5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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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대 후반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변화의 시기였지만 개인적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시기였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게 아직도 귀에 선한 소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들리던 학교 앞 대학교에서 울려퍼지던 구호와 노래 소리, 그리고 뒤이어 터지는 최루탄 소리였다.
TV를 보면 가끔 연예인들이 군대내 화생방 훈련장에서 눈물 콧물 쏟아내는 장면을 볼 때가 있는데, 난 그걸 중학생 때부터 해왔다. 최루가스가 스며든 교실 안에서 울며 짜며 수업을 받다가 결국에는 그 날 수업을 마치지 못하고 또다시 최루가스 범벅인 채로 집에 돌아와야 했던 경험은 이제 그 시대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이 되었다.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화염병과 최루탄의 가투(街鬪)가 상징하듯이 최소한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 사회는 대립하는 두 집단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불’의 시대였고, 날카로운 예각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집단’의 시기였고, ‘조직’의 시기였다.
정권은 정권대로 ‘사회질서’와 ‘총화단결’을 모토로 사회불순분자들에 대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면, 그 반대편은 조직의 힘, 단결의 힘, 대오의 힘으로 거기에 맞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집단이 지향하는 바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수단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조직화와 집단 속에서 하나의 힘으로 뭉치는 것을 강조했고, 그 속에서 개인적 삶과 가치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집단이 강조되려면, 집단의 가치를 절대화하고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작동된다.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로 환원되던 시기였다. 사회변동도, 전세계적인 혁명도,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사생활 하나하나까지도 변화를 추동하던 동력을 이데올로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길이라고 여겼던 시대였다.

2.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은 묘하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한 시대가 가면 그와 더불어 그 시대의 지배적 가치 역시 종언을 고한다는 사실이 경험으로 다가왔다.

[경마장 가는 길]은 5년 반 동안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R이라는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귀국 후 R은 프랑스 유학 도중 3년동안 동거하던 J와 해후한다. 반갑게 맞아 줄 것이라 생각했던 R과 달리 J는 둘 사이에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때론 낙담하고 때론 화내면서 한국생활에 회의감이 드는 R.
여기에 R의 가족생활이 겹쳐진다. 그의 부모와 여동생은 질병과 가난 가운데도 유학비를 보태 주었고(이런 행동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의 아내는 이혼하자는 R의 제안을 거부한다.

[경마장 가는 길]이 놀라운 점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R과 주위 인물들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따위는 없다. 특별히 독자들의 눈을 확 잡아 끌만한 임팩트 있는 사건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R의 일상은 먹고 잠자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친구를 만나고 다방에 들어가고 여관이나 집에서 잠자다가 가끔 대학에서 강의해 주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일상을 마치 작가가 R의 그림자가 된 것처럼,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끈질기고 세세하게 하나하나 묘사한다. 무엇보다 그 철저하게 객관적인 ‘묘사’에 기가 질린다.

그래서 R과 J의 삶에서 사회 변혁이라든가 가난한 민중의 삶과 같은 거대담론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문학을 전공하였지만 어떠한 문학이론도 이들의 일상을 설명하는 데에 이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들의 삶, 오직 그들의 일상, 오직 그들의 존재 뿐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일상만을 메마르게 묘사한 [경마장 가는 길]이 사회의 변화를 아주 예리하게 지적해 낸 작품이 되었다. R과 J의 일상양식 자체가 그 이전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종언한 새로운 형태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3.
나한테 1992년과 1993년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이라고 말하겠다. 소위 X세대는 이전 부모 세대와 질적으로 달랐다. 공동체의 가치 대신에 개인의 가치를 우선에 두었고, 합리적인 이성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길보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감성과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해체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가장 웃긴 장면은 잠자리 요구를 거부하는 J에게 R이 내뱉는 말이다.
                      “네가 그렇게 (나와의 잠자리를) 거절하는 이데올로기가 뭐니?”

처음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웃음이 터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잠자리를 거부하는 여자에게 저렇게 말한단 말인가.
그럼 매일 같이 화장실에 가는 이데올로기는 뭐고, 오늘 점심에 된장찌개 백반을 먹은 이데올로기는 뭐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저렇게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고, 그 속에서 정당성을 찾아온 것이 현실이었다. 믿기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렇게 가치가 충돌하고, 과거와 현재가 짬뽕된 시기에는 부조화와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겨난다. [경마장 가는 길]의 주인공 R이 바로 그랬다.
그의 5년은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보낸 시기였다. 그가 귀국하여 다시 경험한 한국문단, 한국학계의 현실은 학벌과 인맥이 지배하고 대필과 표절이 난무하며 이름값으로 자리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어렵게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찢어지게 가난한 그의 가정생활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인과의 갈등만 깊어질 따름이다.
‘별 것 아니던’ 동료들이 모두 교수가 되었으나, 정작 그는 겨우 시간강사 자리나 알아보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 되어 겉돈다.

이러한 부조화와 배회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수단이 J와의 잠자리였다. 따라서 R의 일상에서 가장 비중이 높고 중요한 일이 J와의 만남이었고, 그의 현실과의 괴리감을 조금이라도 좁혀줄 수 있는 행동이 J와의 잠자리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건 그의 마음의 안정뿐만 아니라 일종의 보상심리, 또는 자존심 회복의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경마장 가는 길]을 읽으면서 나는 이게 바로 1990년대 초반을 헤쳐온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심리가 아닌가 한다.
386세대는 사회의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능숙했다. 그리고 하나의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이제 많은 대학생들은 자신의 ‘스펙’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학연수니, 배낭여행이니 하는 것이 대학생들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문제는 이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버린 세대들, 변화의 접점에 놓인 세대들이었는데,
그들은 정치세력화할 준비도,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서 폭탄처럼 맞은 1998년의 IMF 외환위기.
이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안정과 보상의 기제가 필요했다. J의 몸에 집착하는 R처럼.

4.
생각해 보니, 이들은 이제 30대 후반이다. 대학을 나올 때 IMF를 겪었고, 결혼하고 안정을 찾아야 할 시기에 금융위기를 겪었다.
앞당겨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떨어야 하며, 비정규직‧계약직의 차별 속에 살아가는 이들도 꽤 된다.
변화의 시기, 그 접점에 서 있던 이들이 찾아내야 할 가치가 무엇일까.
R이 찾아 헤매던, 그러나 한 번도 가 본 경험이 없고 어떻게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경마장’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아직 한번도 경마장에 가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경마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오래 전에 언젠가 한번은 누가 나에게 경마장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였는지 지금 알 수 없다. 그가 말한 경마장은 어쩌면 이 도시에 있는 경마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대에 있는 경마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람 부는 오후에 하늘 아득히 떠가고 있는 신문지처럼 경마장은 지금 공중에 아득히 흐르고 있다. (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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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국화와 칼 Picture Life Classic 4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진근 옮김 / 봄풀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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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 확장의 자신감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하던 제국주의 시대, 유럽과 미국의 서양인들은 동양인을 침략과 수탈의 대상, 왜소하고 미개한(!) 인종으로 파악했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무시하던 동양의 섬나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제대로 한 방 먹인다.
충격을 받은 미국 정부는 선전포고와 더불어 루스 베네딕트 교수에게 일본 분석을 의뢰하게 되고 그녀는 일본 이해의 기념비적 저작인 [국화와 칼]을 내놓는다. 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나 새로운 정치체제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상대편에 대한 세밀한 분석도 가능하게 하는 모양이다.

루스 베네딕트 여사는 우선 일본사회, 일본국민이 가진 이중성을 고찰한다. 일본문화란 세련됨과 고요함, 온순함과 예의의 상징인 국화와 거칠고 야만스러우며 잔혹함과 무사도의 상징인 칼이 공존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대립하는 특성을 가진 국화와 칼이 공존하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화가 있어야만 하는데, 이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똑같이 생긴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울퉁불퉁 멋대로 생긴 벽돌로는 결코 집을 짓지 못한다. 큰 벽돌은 주춧돌이 되어 기단을 받쳐야 하고, 작은 벽돌 하나하나는 모여 벽을 이룬다.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는 개성의 발현이 억제되며, 자신이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자세가 중시된다. 튀는 사람은 왕따와 이지메의 대상일 뿐이다.
조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규격화 못지않게 강조되는 것이 ‘질서’의 유지이다. 여기서 질서는 상호평등한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때 질서란 상명하복, 상의하달 식의 위계적이고 서열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국내적으로는 최고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천황에 대한 충(忠)이 그 어떤 덕목이나 미덕보다 우선시되며, 국제적으로는 힘있는 국가의 리더십에 다른 국가들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적인 사실로 말하자면, ‘대일본제국’은 아버지, 또는 맏형의 역할이고, 다른 아시아 민족들은 대일본제국의 뜻을 잘 받들어 ‘구미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보호할 ‘대동아공영권’에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네딕트 여사가 일본문화를 분석하는 키워드로 삼은 것, 그러니까 온(恩)을 갚기 위한 의무, 기리(義理)에 대한 집착 등은 결국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개인이 감수해야 할 희생이자 의무를 표현한 셈이다. 천황으로 대표되는 상층의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하는(그나마 다 갚지도 못하는) 의무가 되는 셈이고, 주군, 동료, 나 자신을 향한 의리는 사회유지를 위한 희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일본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자기수양과 후세 세대에 대한 교육은 조화를 위한 규격화와 위계적 질서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의무와 본분을 달성하기 위해 나의 존재를 잊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반대로 자신만의 개성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를 교육에서 가르쳤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가미가제 특공대’는 이러한 일본인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천황의 은혜에 죽음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미학, 일본에 수모를 안겨주는 연합군(미군)에 대한 국가를 대신한 의리의 실현, 자신을 잊고 오로지 국가의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무념무상, 무아의 경지...

그렇다면 [국화와 칼]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국화와 칼]을 읽으면서 과연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부터,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서 전체주의적 시각이 자리잡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물론 그런 게 다 일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편리하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인식이란 것은, 특히 사회 전체가 마치 전염병처럼 앓게 되는 ‘사회적 인성’이란 것은 어떤 계기와 정치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이용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에 대한 한민족의 존경과 자긍심은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겠으나, 그것을 성역화하고 민족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또다른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일본인들에게 조화와 위계의 관념을 확실하게 내면화시킨 것은 역시 메이지 유신이 아니었나 싶다. 주군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복종, 주군이 베푼 은혜에 대한 갚을 수 없는 의무(‘나는 저 분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다’라는 관념), 주군에 대한 의리, 불명예를 갚기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죽음의 미학. 사실 이 모든 것은 ‘사무라이’의 도덕이었고, 사무라이의 미학이었다. 따라서 하급 사무라이들이 주축이 되어 에도 막부를 붕괴시키고 천황 중심의 정치적 혁명을 일으킨 메이지 유신이 이후 일본 정치와 일본국민의 정신형성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역할한 것은 사무라이의 미학체계를 전일본인들에게 각인시키고 그것을 내면화시켜 군국주의 일본으로 나아가게 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주군에 대한 절대적 충성은 개인, 즉,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으로 대치되며, 천황이 곧 국가를 상징한다고 할 때 절대적 국가주의로 넘어오게 된다.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은 이제 국내정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들이 따라야 하는 원칙으로 확장된다. 물론 그 속에서 일본은 최상위층에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분수에 맞지 않게 튀는 사람은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범으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체제적 인물로 낙인찍히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다. 이지메로 대표되는 일본의 배타적 문화는 바로 이 시기에 본격화 될 뿐만 아니라,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는 개성을 안으로만 파고들어 가는 소위 ‘오타쿠’ 문화 역시 메이지 유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최근 일본이 겪고 있는 어려움, 단적인 예를 들자면 일본항공(JAL)의 파산과 도요타 자동차의 위기, 몰락해 가는 1억 중산층의 신화는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구축해 온 일본의 발전모형이 파산에 이른 것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상명하복식 조직문화의 경직성과 비창의성, 엘리트주의와 정경유착에서 비롯된 부패, 창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모나지 않은’ 인간형이 가져온 한계와 규격을 벗어난 인간에 대한 이지메... 이런 것들이 성장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일본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도덕은 우리 역시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는 말이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는 근대화와 서구화를 추진했던 유신지사들의 모습은 1960년대 ‘조국근대화’를 부르짖던 우리 군사정부와 오버랩된다. 나 역시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일주일에 몇 차례씩 ‘국기에 대한 맹세’를 다짐해야 했고,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이른바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다. 도덕과 사회 시간은 어떤 주제든 결국 조국과 민족에 대한 충성, 부모와 교사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가르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우리가 나라에 충성하는 길은 학생으로서 지금 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라는 ‘자기 자리 지키기’를 반복하여 주입당했다.
사상과 생각은 통제되었고, 일치단결 이외에 다른 것은 이단시되었던, 국가와 민족은 절대 비판할 수 없는 성역의 위치였으며,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는 추앙받아 마땅한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다. 이 모습, [국화와 칼]이 그리고 있는 메이지 유신시기와, 또는 세계대전 시기 일본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시간적 편차만 있고 공간의 다름만 있을 뿐이지 똑같은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이제 시간은 많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일제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으며, 국가와 민족의 절대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터부시된다. 최근에는 그나마 힘들게 쌓아왔던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침해받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법치와 질서, 사회적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말이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 우리와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란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의 심성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와 관념들이 근거하고 있는 물적 토대는 일본식 근대화 모델을 따라 추진했던 ‘조국근대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일본 못지않게 개인보다 전체를, 개성보다 분수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을 이어 왔으며, 체면을 중시하고 ‘죄보다 수치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국화와 칼]은 대단히 유용하면서 흥미로운 책이다. 일본에 대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숙명적으로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국화와 칼]이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본식의 근대화 모델을 따라 지금 여기까지 걸어온 우리 사회에서 일본문화가 드리운 그림자를 고찰해 보는 데에 대단히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 2010년 현재 우리가 [국화와 칼]을 새롭게 읽어내야 할 이유이다.

대다수 서양인은 낡은 규칙과 관습에 반기를 들고 행복을 얻으려면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강자의 면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의무를 이행하고자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이야말로 강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강인한 성격이란 반항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것이라고 믿는다.(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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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하자면 이정명의 [악의 추억]은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책이 아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별점을 주라면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할 것 같다. 물론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바람의 화원]에서 보여준 모습과 천양지차로 달라진 작가의 변신을 내가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은 끝까지 읽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책이었고, 읽으면서 아주 오래된, 그러면서도 해결이 나지 않은 질문이 모양을 바꿔가면서 머리속을 치고 나가는 느낌이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의 질문은 이런 거였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선한가, 악한가?”

[악의 추억]의 배경이 되는 바다를 메워 만든 아일랜드, 그곳은 그대로 탐욕의 상징이다.
물신숭배는 악령을 낳았고, 그 악령이 안개처럼 도시를 배회하며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다. 명예를 따라 자녀를 버린 사람, 정욕을 따라 신뢰를 버린 사람, 돈을 따라 사랑을 버린 사람. 그리고 버림받은 사람과 버린 사람의 증오와 원한은 다층적인 악순환을 이루어 거대한 ‘악’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이 악순환의 절정의 순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웃는다. 미소 짓는다.
물론 그 웃음과 미소는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 가식적인 웃음과 미소 한가운데로 총탄이 날아든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을 명확하게 선과 악으로 이등분하기가 어렵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처음 질문이 바뀌었다. “왜 인간의 마음에는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나?”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도덕교육을 통해, 또는 종교생활을 통해 선의 추구와 악의 폐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그 악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악함의 모습이 원래보다 과장되어 보고되기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도덕과 교육의 힘이 악의 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까.

어디선가 보았던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한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간 대학생이 혹독한 고문 끝에 기절하고 말았다.
잠깐 의식이 돌아온 순간, 그는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하던 고문관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공부가 시원찮은 자식 걱정, 아내의 건강에 대한 염려.. 그야말로 평범하고 인간적인 내용이었단다.

같은 인간으로서 타인에게 주저없이 고통을 가하는 ‘악랄함’과 동네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연상되는 이 평범할 정도의 ‘선량함’이 짧은 시간에, 같은 인물에게서 발현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이 모순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이 모순에 대해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몇 가지 대답의 단초들을 제공해 줄 것 같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나치 전범 가운데 한 명으로서, 남미에서의 도피생활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여기서 책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기 전에 질문 하나.
아이히만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면서 죄책감을 느꼈을까?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면서 일말이나마 마음에 동정심과 괴로움을 느꼈을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그의 재판과정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아이히만이 매우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나치와 자신의 행동이 반인간적인 짓이라거나, 악한 행동이라거나 하는 것을 느낀 바가 없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조차 없었다. 그건 그냥 그가 일상생활에서 밥먹고 세수하고 잠자듯이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평범한 우리 주위의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유발하는 ‘악’의 근원이 되는 이 모순.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말미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표현으로 이 모순을 지적해 낸다.
아이히만이 보여준 악함과 잔인함의 근본은 타인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었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무능력은 ‘생각하기를 거부한’ 무능력이었다.

다시 이정명의 [악의 추억]에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고 악함이란 것은 제도와 사회, 환경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과 탐욕을 공공연하게 옹호하고 그것을 고수하면서 확대재생산하기 위한 노력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믿고 싶다)
“악의 평범성” 이건 우리가 스스로를 사이코패스로 만들어버리지 않도록 기억해야 할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아 버리고 그들의 아픔에 최소한의 동정심이라도 가지지 않는 한,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제도적 조치에 분노하고 문제점을 인식하지 않는 한,
우리 주위를 안개처럼 맴도는 악의 평범성은 언제든 우리를 공격한다.
안개 속에 들어온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개 속의 습기에 흠뻑 젖게 마련이니까.

한나 아렌트의 말로 마무리짓는다.

그(아이히만)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뱀다리 하나
감상문을 써넣고 보니, 결과적으로 삼천포로 빠지면서 본래 쓰고자 했던 [악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쉽지만, 책 읽으며 메모해 놓은걸 보니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 이런 말이 써 있다. 애초부터 이 쪽으로 생각이 가 있었나 보다.

뱀다리 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글을 읽는데, 당시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의 아들에 대한 뒷이야기가 있었다. 독일 항복 후 헤스는 전범으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아들은 입대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말 그대로 ‘거시기’하다. “아버지를 전범으로 가둔 NATO군에 가지 않겠다!!!”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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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2 로마제국 쇠망사 2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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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업식에 가면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표현을 많이 듣게 된다.
로마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야말로 저 표현에 가장 걸맞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적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두 가지인데,
비잔티움으로의 천도(콘스탄티노플 건설)와 밀라노 칙령을 통한 그리스도교 공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의 로마제국과의 단절, 즉, 끝을 의미하면서 이제 로마제국이 과거와는 다른 방향을 잡아 나갈 것이라는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길이 통하던’ 로마를 떠나 철저하게 황제가 계획한 도시(비잔티움)로 천도했다는 사실은
로마인들이 기억 속에서나마 긍지로 삼고 있던 ‘과거의 로마’와의 완벽한 결별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밀라노 칙령은 누구에게나 종교선택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일견 로마의 다신교적 전통과 관용적인 종교정책의 실현에 충실한 것 같이 보이지만,
황제 자신도 그리스도교도로 개종(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칙령의 실질적 혜택은 그리스도교에 주어졌다.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던, 또는 천덕꾸러기였던 신세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를 호령할 수 있는 날개를 단 셈이다.
콘스탄티누스 치세의 로마제국은 이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전의 전통과 사뭇 달라진 길에 들어선 것이다.

2.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임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제국 전체를 4분하여 각 지역에 황제를 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외적의 침입이 잦던 시기에 넓은 땅덩어리를 ‘지역방어’하는 체계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대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권력분점은 내부에서 붕괴될 위험이 높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체계이기도 했는데, 황제끼리 반목하거나, 야심만만한 황제가 여럿 등장했을 때 내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이 바로 이러한 약점을 통해 생존했으며, 또한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무수한 위기를 넘긴 끝에 재통일에 성공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분산된 황제의 힘을 다시 하나로 모으기 위한 노력의 결정체였다.
이제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남아 있던 ‘로마 공화정체’, 즉, 로마의 시민권을 존중하거나 원로원의 의견을 묻는 최소한의 절차조차 사라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비잔티움이 이웃하였던 페르시아의 군주가 그랬던 것처럼 한 명의 ‘전제군주’로서 재탄생한 것이다.

고대 로마의 자유에서 비롯한 미덕의 외형조차 잃게 되자, 간소함이 특징이었던 로마 예법은 어느덧 아시아 궁정의 위엄 있는 겉치레로 전락했다. 공화정에서는 개인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이 매우 두드러졌지만, 군주제 아래에서는 미약하고 모호해지면서 황제들의 전제 정치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황제들은 개인 능력 대신 왕실의 노예로부터 전제 권력의 미천한 앞잡이에 이르기까지 계층과 직위에 따른 엄격한 종속관계를 도입했다. (p.17)

물론 이렇게 군주 한 명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 체제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력을 발휘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는 전제적 지배체제가 의도했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그의 사후, 능력면에서나 품성면에서나 그에 미치지 못한 황제들과 환관들(나라망친 환관들은 중국에서만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의 전제적 지배는 로마제국을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된다.

3.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위대한 황제로 대접받는데,
사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정치적 업적 보다는 '그리스도교의 공인'이란 종교적 업적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밀라노 칙령 자체는 관용적이면서도 로마의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누구도 그 신앙으로 인해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종교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와 함께 개인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용인 그 자체야 욕먹을 일이 아니겠으나,
문제는 황제 스스로가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실제 현실에서는 종교간 평등이 아니라 다신교가 억압받는 종교간 차별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그리스도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황제가 바뀌었다고 해서 반대방향으로 동일하게 작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이 통치하던 시대.
소위 ‘이교도’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으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원래 주인을 찾아 준다는 명목아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넘겨졌다.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소위 ‘삼위일체’를 둘러싼 그리스도교도들의 격렬한 논쟁은 국론의 분열과 속주간 반목‧대립이라는 해악만을 끼쳤을 뿐 로마제국 입장에서 엄밀히 말하면 아무런 실익도 없는 것이었다.

후대의 폭군들은 오랜 치세동안 무고한 자들을 무수히 죽여도 재생의 물, 즉 세례를 통해 순식간에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이리하여 종교의 남용이 도덕의 토대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되었다. (p.176)

종교적 관용의 대헌장인 밀라노 칙령은 로마제국의 국민이면 누구나 자신의 종교를 선택하고 신봉할 특권이 있음을 천명했으나, 이 귀중한 특권도 얼마 안 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함께 박해의 원칙까지도 받아들였으니, 가톨릭 교회와 의견을 달리하는 종파들은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고통과 억압에 시달리게 되었다. (p.195)

기번은 이 지점에서 또 한 명의 로마 황제를 등장시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대비시킨다.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조카인 율리아누스 황제이다.
콘스탄티누스에게 ‘대제’라는 영예로운 별칭이 붙은 것과 반대로 율리아누스에게는 ‘배교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따라 다닌다.
물론 이 ‘배교자’라는 별칭은 철저하게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개념이다.
로마제국 이후 서양세계를 지배했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이교의 부흥과 다신교적 전통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아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으리라.

율리아누스 황제는 제위에 오르기 전 그리스 아카데메이아에서 학문을 닦았고, 그리스-로마신들에 깊이 천착하여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교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로마의 전통을 되살리려 하였다.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정치형태는 과거 로마 공화정이었으며, 이상적인 종교는 다양성을 가진 다신교였던 것이다.
물론 율리아누스 황제의 시도는 실패했다. 페르시아 원정에서의 뜻하지 않았던 전사와 그의 뜻을 계승할 후계자의 부재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4.
기번이 기술한 두 황제의 대조된 배치는 이런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번 역시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콘스탄티누스=위대함>, <율리아누스=배교자>란 평가를 내린다. 그리고 이 평가속에는 로마제국 부흥의 명예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쇠망의 책임은 율리아누스에게 돌리는 의도가 엿보인다. 과연 이 평가는 정당한가?”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에 대한 서평에도 그런 말을 적은 바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로마제국 쇠망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솔선수범하고 진취적이던 로마시민의 가치관이 타락한 것에 있으며, 대제국에 걸맞지 않는 관용과 포용정신의 쇠퇴를 그 다음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정상적인 로마였다면 게르만족이나 고트족 등 외적의 침입에 좀 더 합리적인 대책을 제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자비를 들여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앞장서 종군하는 로마시민군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은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송두리째 맡겨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거다.

로마 군대의 야만족 수용은 날이 갈수록 일반화되고 불가피해졌으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p.36)

문제는 이런 자발적 정신의 타락이 당시 로마제국의 종교와 악순환의 상승작용을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기번은 이 때의 ‘악순환’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데,
첫째는 로마 황제들의 표면적인 종교관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제에서는 종교차별로 나타난 비관용과 불포용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율리아누스 황제 모두 표면적으로는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절대군주제에서 황제 자신이 어떤 종교를 신봉한다는 것 자체가 제도적 평등에서 현실적 차별을 유발할 위험성이 농후하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에 집중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로마 다신교를 신봉한 율리아누스 황제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즉, 자신의 종교의 절대성과 타종교에 대한 교묘한 탄압이 어우러진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종교가 로마제국에 가져온 악순환은 사치와 낭비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은 예외없이 사치와 향락, 낭비를 일삼았다.
철인(哲人) 황제와도 같았던 율리아누스 황제조차도 자신이 신봉하던 종교행사에 대해서만큼은 아낌없이 국가의 부를 쏟아부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황제 본인과 궁정의 관리들, 그리고 황제가 총애하던 성직자들(그리스도교 주교는 물론 로마 다신교 신전의 사제들까지)의 사치는 모두 근면한 농민들의 희생에서 나온 것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엄격하게 근검 절약을 실천했으나, 종교의식에는 세입의 상당 부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신들의 제단에 바치기 위해 먼 지방에서 희귀하고 아름다운 새들이 끊임없이 수송되어 왔으며, 하루에 백 여 마리의 소가 율리아누스의 손에 희생되는 일도 흔했다. (p.322)

따라서 기번이 보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율리아누스 황제를 선악의 화신처럼 대비시켜 왔던 당시 가톨릭의 관점은 그야말로 ‘웃긴 농담’이며 편파적 평가일 뿐이었다.
오히려 기번은 상당 부분 율리아누스 황제야말로 ‘조국을 사랑하는 자이며 세계의 황제가 될만한 자(p.304)’라고 인정한다.

5.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비잔티움 천도에서 시작된 [로마제국 쇠망사 2]는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를 거쳐 또 한 명의 위대한 그리스도교 황제로 일컬어지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국교’로 격상시킨 인물.
따라서 이제 로마제국에서 다양성에 대한 포용은 찾아보기 어려운 미덕으로 전락해 버리고 ‘정통’의 자리를 다투는 분파적 파벌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질 거란 예상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빈사 상태에 빠진 로마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리고 그 대응에도 왜 로마제국은 쇠망을 피하지 못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3권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이다.


뱀다리
[로마제국 쇠망사 2]의 책이 가지는 흐름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는 지적일 수 있으나,
기번이 가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은 반드시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 시각을 드러낸 부분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극단적으로 나타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서 승리하고 그곳의 궁전을 불태운 사건에 대한 평이다.

그러나 이처럼 함부로 저질러진 파괴행위에 대해 우리가 동정하거나 분노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인 예술가의 손으로 완성한 단순한 나체 조각상 하나가 야만족들의 노동으로 빚어진 이 모든 조야하고 비싸기만 한 기념물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p.378)

물론 이와 같은 역사인식은 당시 서구사회에서 일반적인 의식이었을 것이고,
기번 역시 이러한 시대정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역사가로서 그의 자세는 로마 제국의 쇠망 과정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만큼이나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반면교사의 시사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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