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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하자면 이정명의 [악의 추억]은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책이 아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별점을 주라면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할 것 같다. 물론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바람의 화원]에서 보여준 모습과 천양지차로 달라진 작가의 변신을 내가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은 끝까지 읽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책이었고, 읽으면서 아주 오래된, 그러면서도 해결이 나지 않은 질문이 모양을 바꿔가면서 머리속을 치고 나가는 느낌이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의 질문은 이런 거였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선한가, 악한가?”
[악의 추억]의 배경이 되는 바다를 메워 만든 아일랜드, 그곳은 그대로 탐욕의 상징이다.
물신숭배는 악령을 낳았고, 그 악령이 안개처럼 도시를 배회하며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다. 명예를 따라 자녀를 버린 사람, 정욕을 따라 신뢰를 버린 사람, 돈을 따라 사랑을 버린 사람. 그리고 버림받은 사람과 버린 사람의 증오와 원한은 다층적인 악순환을 이루어 거대한 ‘악’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이 악순환의 절정의 순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웃는다. 미소 짓는다.
물론 그 웃음과 미소는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 가식적인 웃음과 미소 한가운데로 총탄이 날아든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을 명확하게 선과 악으로 이등분하기가 어렵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처음 질문이 바뀌었다. “왜 인간의 마음에는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나?”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도덕교육을 통해, 또는 종교생활을 통해 선의 추구와 악의 폐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그 악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악함의 모습이 원래보다 과장되어 보고되기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도덕과 교육의 힘이 악의 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까.
어디선가 보았던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한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간 대학생이 혹독한 고문 끝에 기절하고 말았다.
잠깐 의식이 돌아온 순간, 그는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하던 고문관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공부가 시원찮은 자식 걱정, 아내의 건강에 대한 염려.. 그야말로 평범하고 인간적인 내용이었단다.
같은 인간으로서 타인에게 주저없이 고통을 가하는 ‘악랄함’과 동네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연상되는 이 평범할 정도의 ‘선량함’이 짧은 시간에, 같은 인물에게서 발현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이 모순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이 모순에 대해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몇 가지 대답의 단초들을 제공해 줄 것 같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나치 전범 가운데 한 명으로서, 남미에서의 도피생활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여기서 책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기 전에 질문 하나.
아이히만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면서 죄책감을 느꼈을까?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면서 일말이나마 마음에 동정심과 괴로움을 느꼈을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그의 재판과정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아이히만이 매우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나치와 자신의 행동이 반인간적인 짓이라거나, 악한 행동이라거나 하는 것을 느낀 바가 없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조차 없었다. 그건 그냥 그가 일상생활에서 밥먹고 세수하고 잠자듯이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평범한 우리 주위의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유발하는 ‘악’의 근원이 되는 이 모순.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말미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표현으로 이 모순을 지적해 낸다.
아이히만이 보여준 악함과 잔인함의 근본은 타인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었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무능력은 ‘생각하기를 거부한’ 무능력이었다.
다시 이정명의 [악의 추억]에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고 악함이란 것은 제도와 사회, 환경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과 탐욕을 공공연하게 옹호하고 그것을 고수하면서 확대재생산하기 위한 노력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믿고 싶다)
“악의 평범성” 이건 우리가 스스로를 사이코패스로 만들어버리지 않도록 기억해야 할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아 버리고 그들의 아픔에 최소한의 동정심이라도 가지지 않는 한,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제도적 조치에 분노하고 문제점을 인식하지 않는 한,
우리 주위를 안개처럼 맴도는 악의 평범성은 언제든 우리를 공격한다.
안개 속에 들어온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개 속의 습기에 흠뻑 젖게 마련이니까.
한나 아렌트의 말로 마무리짓는다.
그(아이히만)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뱀다리 하나
감상문을 써넣고 보니, 결과적으로 삼천포로 빠지면서 본래 쓰고자 했던 [악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쉽지만, 책 읽으며 메모해 놓은걸 보니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 이런 말이 써 있다. 애초부터 이 쪽으로 생각이 가 있었나 보다.
뱀다리 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글을 읽는데, 당시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의 아들에 대한 뒷이야기가 있었다. 독일 항복 후 헤스는 전범으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아들은 입대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말 그대로 ‘거시기’하다. “아버지를 전범으로 가둔 NATO군에 가지 않겠다!!!”였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