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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2 ㅣ 로마제국 쇠망사 2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1.
졸업식에 가면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표현을 많이 듣게 된다.
로마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야말로 저 표현에 가장 걸맞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적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두 가지인데,
비잔티움으로의 천도(콘스탄티노플 건설)와 밀라노 칙령을 통한 그리스도교 공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의 로마제국과의 단절, 즉, 끝을 의미하면서 이제 로마제국이 과거와는 다른 방향을 잡아 나갈 것이라는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길이 통하던’ 로마를 떠나 철저하게 황제가 계획한 도시(비잔티움)로 천도했다는 사실은
로마인들이 기억 속에서나마 긍지로 삼고 있던 ‘과거의 로마’와의 완벽한 결별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밀라노 칙령은 누구에게나 종교선택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일견 로마의 다신교적 전통과 관용적인 종교정책의 실현에 충실한 것 같이 보이지만,
황제 자신도 그리스도교도로 개종(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칙령의 실질적 혜택은 그리스도교에 주어졌다.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던, 또는 천덕꾸러기였던 신세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를 호령할 수 있는 날개를 단 셈이다.
콘스탄티누스 치세의 로마제국은 이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전의 전통과 사뭇 달라진 길에 들어선 것이다.
2.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임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제국 전체를 4분하여 각 지역에 황제를 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외적의 침입이 잦던 시기에 넓은 땅덩어리를 ‘지역방어’하는 체계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대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권력분점은 내부에서 붕괴될 위험이 높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체계이기도 했는데, 황제끼리 반목하거나, 야심만만한 황제가 여럿 등장했을 때 내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이 바로 이러한 약점을 통해 생존했으며, 또한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무수한 위기를 넘긴 끝에 재통일에 성공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분산된 황제의 힘을 다시 하나로 모으기 위한 노력의 결정체였다.
이제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남아 있던 ‘로마 공화정체’, 즉, 로마의 시민권을 존중하거나 원로원의 의견을 묻는 최소한의 절차조차 사라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비잔티움이 이웃하였던 페르시아의 군주가 그랬던 것처럼 한 명의 ‘전제군주’로서 재탄생한 것이다.
고대 로마의 자유에서 비롯한 미덕의 외형조차 잃게 되자, 간소함이 특징이었던 로마 예법은 어느덧 아시아 궁정의 위엄 있는 겉치레로 전락했다. 공화정에서는 개인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이 매우 두드러졌지만, 군주제 아래에서는 미약하고 모호해지면서 황제들의 전제 정치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황제들은 개인 능력 대신 왕실의 노예로부터 전제 권력의 미천한 앞잡이에 이르기까지 계층과 직위에 따른 엄격한 종속관계를 도입했다. (p.17)
물론 이렇게 군주 한 명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 체제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력을 발휘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는 전제적 지배체제가 의도했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그의 사후, 능력면에서나 품성면에서나 그에 미치지 못한 황제들과 환관들(나라망친 환관들은 중국에서만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의 전제적 지배는 로마제국을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된다.
3.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위대한 황제로 대접받는데,
사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정치적 업적 보다는 '그리스도교의 공인'이란 종교적 업적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밀라노 칙령 자체는 관용적이면서도 로마의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누구도 그 신앙으로 인해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종교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와 함께 개인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용인 그 자체야 욕먹을 일이 아니겠으나,
문제는 황제 스스로가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실제 현실에서는 종교간 평등이 아니라 다신교가 억압받는 종교간 차별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그리스도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황제가 바뀌었다고 해서 반대방향으로 동일하게 작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이 통치하던 시대.
소위 ‘이교도’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으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원래 주인을 찾아 준다는 명목아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넘겨졌다.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소위 ‘삼위일체’를 둘러싼 그리스도교도들의 격렬한 논쟁은 국론의 분열과 속주간 반목‧대립이라는 해악만을 끼쳤을 뿐 로마제국 입장에서 엄밀히 말하면 아무런 실익도 없는 것이었다.
후대의 폭군들은 오랜 치세동안 무고한 자들을 무수히 죽여도 재생의 물, 즉 세례를 통해 순식간에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이리하여 종교의 남용이 도덕의 토대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되었다. (p.176)
종교적 관용의 대헌장인 밀라노 칙령은 로마제국의 국민이면 누구나 자신의 종교를 선택하고 신봉할 특권이 있음을 천명했으나, 이 귀중한 특권도 얼마 안 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함께 박해의 원칙까지도 받아들였으니, 가톨릭 교회와 의견을 달리하는 종파들은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고통과 억압에 시달리게 되었다. (p.195)
기번은 이 지점에서 또 한 명의 로마 황제를 등장시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대비시킨다.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조카인 율리아누스 황제이다.
콘스탄티누스에게 ‘대제’라는 영예로운 별칭이 붙은 것과 반대로 율리아누스에게는 ‘배교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따라 다닌다.
물론 이 ‘배교자’라는 별칭은 철저하게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개념이다.
로마제국 이후 서양세계를 지배했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이교의 부흥과 다신교적 전통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아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으리라.
율리아누스 황제는 제위에 오르기 전 그리스 아카데메이아에서 학문을 닦았고, 그리스-로마신들에 깊이 천착하여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교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로마의 전통을 되살리려 하였다.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정치형태는 과거 로마 공화정이었으며, 이상적인 종교는 다양성을 가진 다신교였던 것이다.
물론 율리아누스 황제의 시도는 실패했다. 페르시아 원정에서의 뜻하지 않았던 전사와 그의 뜻을 계승할 후계자의 부재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4.
기번이 기술한 두 황제의 대조된 배치는 이런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번 역시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콘스탄티누스=위대함>, <율리아누스=배교자>란 평가를 내린다. 그리고 이 평가속에는 로마제국 부흥의 명예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쇠망의 책임은 율리아누스에게 돌리는 의도가 엿보인다. 과연 이 평가는 정당한가?”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에 대한 서평에도 그런 말을 적은 바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로마제국 쇠망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솔선수범하고 진취적이던 로마시민의 가치관이 타락한 것에 있으며, 대제국에 걸맞지 않는 관용과 포용정신의 쇠퇴를 그 다음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정상적인 로마였다면 게르만족이나 고트족 등 외적의 침입에 좀 더 합리적인 대책을 제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자비를 들여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앞장서 종군하는 로마시민군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은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송두리째 맡겨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거다.
로마 군대의 야만족 수용은 날이 갈수록 일반화되고 불가피해졌으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p.36)
문제는 이런 자발적 정신의 타락이 당시 로마제국의 종교와 악순환의 상승작용을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기번은 이 때의 ‘악순환’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데,
첫째는 로마 황제들의 표면적인 종교관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제에서는 종교차별로 나타난 비관용과 불포용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율리아누스 황제 모두 표면적으로는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절대군주제에서 황제 자신이 어떤 종교를 신봉한다는 것 자체가 제도적 평등에서 현실적 차별을 유발할 위험성이 농후하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에 집중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로마 다신교를 신봉한 율리아누스 황제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즉, 자신의 종교의 절대성과 타종교에 대한 교묘한 탄압이 어우러진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종교가 로마제국에 가져온 악순환은 사치와 낭비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은 예외없이 사치와 향락, 낭비를 일삼았다.
철인(哲人) 황제와도 같았던 율리아누스 황제조차도 자신이 신봉하던 종교행사에 대해서만큼은 아낌없이 국가의 부를 쏟아부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황제 본인과 궁정의 관리들, 그리고 황제가 총애하던 성직자들(그리스도교 주교는 물론 로마 다신교 신전의 사제들까지)의 사치는 모두 근면한 농민들의 희생에서 나온 것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엄격하게 근검 절약을 실천했으나, 종교의식에는 세입의 상당 부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신들의 제단에 바치기 위해 먼 지방에서 희귀하고 아름다운 새들이 끊임없이 수송되어 왔으며, 하루에 백 여 마리의 소가 율리아누스의 손에 희생되는 일도 흔했다. (p.322)
따라서 기번이 보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율리아누스 황제를 선악의 화신처럼 대비시켜 왔던 당시 가톨릭의 관점은 그야말로 ‘웃긴 농담’이며 편파적 평가일 뿐이었다.
오히려 기번은 상당 부분 율리아누스 황제야말로 ‘조국을 사랑하는 자이며 세계의 황제가 될만한 자(p.304)’라고 인정한다.
5.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비잔티움 천도에서 시작된 [로마제국 쇠망사 2]는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를 거쳐 또 한 명의 위대한 그리스도교 황제로 일컬어지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국교’로 격상시킨 인물.
따라서 이제 로마제국에서 다양성에 대한 포용은 찾아보기 어려운 미덕으로 전락해 버리고 ‘정통’의 자리를 다투는 분파적 파벌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질 거란 예상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빈사 상태에 빠진 로마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리고 그 대응에도 왜 로마제국은 쇠망을 피하지 못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3권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이다.
뱀다리
[로마제국 쇠망사 2]의 책이 가지는 흐름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는 지적일 수 있으나,
기번이 가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은 반드시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 시각을 드러낸 부분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극단적으로 나타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서 승리하고 그곳의 궁전을 불태운 사건에 대한 평이다.
그러나 이처럼 함부로 저질러진 파괴행위에 대해 우리가 동정하거나 분노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인 예술가의 손으로 완성한 단순한 나체 조각상 하나가 야만족들의 노동으로 빚어진 이 모든 조야하고 비싸기만 한 기념물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p.378)
물론 이와 같은 역사인식은 당시 서구사회에서 일반적인 의식이었을 것이고,
기번 역시 이러한 시대정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역사가로서 그의 자세는 로마 제국의 쇠망 과정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만큼이나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반면교사의 시사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