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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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의 [캐비닛]은 책으로는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영화로는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이 책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시종 유쾌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만큼 평론가들로부터 작품성 인정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먼저 읽은 독자들의 서평에는 작가의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력과 재미에 대한 칭송이 넘쳐났다.
하지만, 이 책은 내내 읽으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들게 했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들인 ‘심토머(symptomer)’들은 현재의 사회질서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같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친 사람들’일 뿐이다.
그리고 과학과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돌연변이’들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미친 사람들’과 ‘돌연변이’들을 향해 사회가 대하는 태도이다.

지금 사회가 개인이 추구해야 할 긍정적인 가치로 요구하는 것은
좋은 성적-좋은 직장-좋은 가정.... 이런 것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안정적으로 살면서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고, 쓸데없는 생각말고 맡은 바 일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반항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것으로 방향을 튼다.
바쁜 생활을 뒤로 하고 잠들어 버리거나(토포러), 행복을 찾아 시간의 절대성에 도전한다(메모리모자이커). 고양이라는 하급 생물이 되기를 원하기도 하고, 외계를 고향으로 생각하여 외계인과 소통하려고 한다.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은행나무에 바친 이야기에 이르면, 이들 ‘심토머’들의 반항은 극에 이른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증상들은 개인별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현대의 생활, 특히 도시 생활은 사람을 얼마나 분주하게 만드는가.
물질적 성공에 대한 신화와 배금주의는 또 얼마나 사람을 잔인하고 삭막하게 만드는가.
질서와 안보의 이름 하에서 획일화된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습이 아닌가.
물론 일탈을 꿈꾸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실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한다.
여기에 반항하고 스스로의 개성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한 사람’,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
아니면, 기업의 이윤창출을 위한 먹잇감이 되는 키메라처럼 돈벌이의 대상이 되고 만다.

[캐비닛]은 이처럼 거대한 현실 앞에 왜소해 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최소한의 저항을 블랙유머로 환기시킴으로서 내가 지금 처한 현실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일을 해낸다.
13호 캐비닛 속에 들어가는 특이한 삶을 사는 것에 자신이 없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다들 자기만의 조그마한 개성을 가지고, 작게나마의 일탈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분출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이 좀 더 많아지고, 좀 더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용인되기를 바란다.

13호 캐비닛 속에 잠들어 있는 375명의 이 사회의 ‘심토머’들은 그 후 어떤 결말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권박사는 조만간 사망할 것이고, 권대리는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피해 버린 데다가, 키메라를 노리는 기업은 그 노력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심토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상담해 줄 사람, 함께 술마시고 생활하면서 웃고 울어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이들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지 걱정과 함께 궁금함이 든다.

비록 허구인 소설 속의 이야기라 해도, 앞서 언급한대로 여기에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는 이들이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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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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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참...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책이다.
사실 읽는 내내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책이었다.
예전에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읽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 책에서는 저자(정혜윤 PD)와 나 사이에 다른 여러 사람들이 끼어 들어가 있어서였을까?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생소함이 [침대와 책]에서는 느껴졌다.

저자의 방대한 독서량과 거기서 비롯된 깊은 성찰에 맞장구치고 싶기도 하고
내 독서량이야 부끄럽지만, 그래도 내가 읽은 책의 제목이 보일 때 반갑기도 하고,
때때로 마음 속 깊이 묻어둔 단어들.. 예를 들어 마르크스나 범민족대회, 차라투스트라 이런 단어들을 만났을 때는 순간적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냥 두고 페이지를 넘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말들.
성찬(盛饌)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뭐랄까. 거리감. 그래. 왜 나는 이 책에서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 걸까?
정혜윤 PD의 [침대와 책] 속의 글들은 왜 그런지 낯설다. 이유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생각해 보니, 그건 내 독서취향에서 나오는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따뜻함’과 아울러 ‘시원함’도 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아울러 자신이 읽었던 책 중에서 이런이런 건 마음에 안든다하고 시원하게 까주고(?),
때론 무모할 정도로 ‘뭐 이런 책이 다 있나?’라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면을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침대와 책]은 너무 착한 독서일기 같다.
자신의 삶 가운데 영향을 주었던 책과 주인공, 스스로의 성찰에 도움이 되는 책과 주인공을 모아 두었다는 느낌이 순간순간 들었고,
그래서인지 저자는 다양한 작품 속 인물, 또는 위대한 작가들의 말에 의탁하고 때때로 그 가운데로 숨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글쓰기가 다른 독자들에게는 이 책의 최고의 강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소소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 삶을 긍정하고, 책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밑줄쳐가며 뽑아내는 독자들에게 정혜윤 PD는 최고의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각 장마다 붙인 제목들도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언제든지 경험하는 것들 아닌가.
가족이나 친구와 싸웠을 때, 또는 가족이나 친구의 하소연과 눈물을 어떤 위로의 말을 찾을 수도 없이 그저 들어주어야만 했을 때.
내가 도대체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변화하고 싶고 일탈하고 싶고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정혜윤 PD는 그런 시기마다 독자들에게 잊고 지냈던 아름다운 꿈을 되살려 주고, 또다른 꿈을 꾸게 해주는 글을 쓰는 것 같다.
일상의 소소함 가운데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시선이 놀랍다.
행복한 사람에게 더 큰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울고 있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라디오 PD라는 직업 때문에 그럴까?
이 책을 읽고 난 후 저자에 대해 검색하다가 우연히 최근 <시사In>을 통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쓴 정혜윤 PD의 공개편지를 본 기억이 있는데, “역시나!”라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작가에게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시원한’ 글을 요구한다면, 나는 너무 못된 사람일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말은 정말 내 머리로는 이해 불가이다.
침대=관능의 이미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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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 부키 경제.경영 라이브러리 1
로버트 하일브로너. 레스터 서로우 지음, 조윤수 옮김 / 부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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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
저자가 책의 제목으로 삼은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물론 나는 경제학도가 아니니 답변의 정확도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신뢰하지 않아 주었으면 한다.

내가 보기에 경제학은 첫째,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의 문제에 대하여
둘째, 경제체계 내의 주체들(가계, 기업, 정부)이 어떻게 대응하며,
셋째, 최대 효율을 위하여 어떻게 자원을 배분하며, 또 결과인 성과물을 어떻게 형평적으로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이론적인 해답을 제공해 준다.
이렇게 경제학의 ‘말할 수 있는 점’에 대한 설명이 책의 제2부와 제3부에 ‘거시경제’ 및 ‘미시경제’라는 제목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학으로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그리고 더 큰 규모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단하 예를 들어 수입의 문제만 봐도 이런 면이 나타난다.
즉, 값싸고 질좋은 외국물건이 수입되어 들어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수입품으로 인해 국내 생산이 중단되고 해당 직종의 종사자들이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소비자들이 외국 제품에서 얻은 이익의 가치는 있는 것일까?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사회 전체적인 부는 과거보다 훨씬 증가했음에도 소득 불균형은 더욱 커졌다.
각 국 정부는 환율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기를 쓰지만, 투기 자본으로 경제 전체가 당분간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는 경우가 발생한다.
분명히 기술은 진보하고 GDP도 매년 성장한다고 하는데, 고용은 늘지 않고 일자리의 질도 갈수록 저하된다.
전세계가 열병처럼 앓고 있는 현재의 경제위기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위기의 진원점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과정은 경제주체들이 ‘합리적 존재’임을 가정하는 순수한 경제학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흔히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또다른 요인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파악하지 않고, ‘정치경제학’이라는 상호연관되는 체계 속에서 분석한 것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얻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이 선택한 사회적, 정치적 설명은 지금이야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해도,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이단적인’ 설명이었을 것이다.
경제학은 상대적으로 명료하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숫자로 현상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다소 명료하지는 않아도 사회학적이나 정치학적인 설명이 현상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이 책의 강점이자 놀라운 점은 ‘경제입문서’를 표방하면서도
마치 잔잔한 수면 아래의 역동적인 흐름을 읽어내는 것처럼,
경제학의 숫자와 이론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정치적, 사회적 결정의 역동성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의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저자들의 기본 입장은 시장주의자 또는 지금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상당히 비판하고,
경제의 원활한 흐름에 있어서 국가의 개입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읽힘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또는 미래의 위기 상황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자본주의의 변혁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마르크스도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했듯이, 인류사에서 자본주의는 혁신적인 경제체제였고, 이로 인해 이전의 봉건적인 생산관계는 종식되었다.
자본주의의 변혁성은 두 가지 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윤을 향해 확장하고자 하는 확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자율 교정성이다.
자본주의가 위기상황을 타개하여 이윤을 계속 창출하고자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을 비롯한 방법을 동원하여 문제를 교정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한,
결국 인류는 자본주의 안에서 생존의 해답을 찾게 되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확장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위험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자본의 확장과 축적이 다소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져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생활의 어려움은 가중되어 가고, 학자들에 따라서는 L자형의 장기불황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의 확장성에 기대하기 보다는 이를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개입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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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하멜른
케이스 매퀸.애덤 매퀸 지음, 이지오 옮김, 오석균 감수 / 가치창조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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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하멜른]은 피리부는 사람의 쥐떼 소탕과 어린이 실종 전설을 배경으로 하여,
중세 봉건제도의 하에서의 농노들의 가슴 아픈 생활, 정의와 자비의 양립, 가족과 사회성원으로서의 의미 등
만만치 않은 소재와 주제들을 버무린 흥미진진한 역사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다.

가혹한 영주의 수탈로 아버지가 병들고,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된 요하네스는 피리 길드의 장인들을 만나 도제로 들어간다.
몇 년 후 하멜른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쥐떼를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하네스.
그는 정의와 자비를 상징하는 다색옷을 입고 하멜른에 도착하게 되고,
쥐떼와 영주들의 압제에 고통당하는 민중들과, 민중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흥청망청 즐기며 혈세를 낭비하는 지도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쥐떼를 소탕하면 받기로 되어 있는 사례금 금고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하멜른 시의  시장의 딸인 클라라와 함께 정체불명의 자객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우선 이 책은 무척이나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기에 좋은 책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지고지순한 가치로 믿어 온 것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충돌하며,
또 어떻게 변형되고 반박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은 무한신뢰와 무한애정의 관계로 흔히 생각하지만,
때론 아들은 아버지를 무능하게 여기고, 아버지는 아들을 무시하거나 학대한다.
이런 이중적 부자관계는 반역자 안셀름에게서도, 바우어와 슈트롬 사이에서도, 그리고 주인공인 요하네스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리고 사례금을 받지 못하게 된 요하네스가 주장하는 부정부패에 대해 ‘정의’로운 심판에는
‘자비’가 빠져 있어서 융통성 없는 원리원칙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엄청난 재산을 갖춘 영주이면서 하멜른 시의 부시장이란 명예를 얻은 바우어의 이면에는
농노들을 착취하고 시민의 재산을 횡령하여 결국엔 스스로를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은 악마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길드와 시민사회의 갈등, 자매 사이의 갈등, 중세의 계층과 계급 사이의 차별 등이 하멜른에서의 닷새 동안 펼쳐진다.

하멜른을 황폐화시킨 쥐떼의 정체와 본질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가장 가까운 가족 내에서 싹튼 미움과 분노, 자비와 애정이 없는 정의,
지위와 명예를 이용한 착취와 수탈 등이 하멜른을 뿌리부터 갉아먹고,
결국에는 그들의 미래인 어린 아이들조차도 앗아가 버린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모든 하멜른 시민들과 피리 악사들의 화해와 축제라는, 겉으로 보기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여전히 찜찜한 그 무엇인가가 남아 있었다.
바로 사라진 아이들은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었고,
그래서 하멜른의 축제 뒤쪽에는 미래를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슬픔 속에 있는 부모와 그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의 어떤 모습이 하멜른의 쥐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 쥐떼가 우리를 뿌리부터 갉아먹고, 결국에는 우리의 미래까지도 가져가 버리는 날이 오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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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 효종.현종실록 - 군약신강의 나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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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나 좋아하고 아끼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권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만화라고 무시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나온 조선왕조에 대한 어떤 입문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에 빠져서 IMF로 어려웠던 시절에 직장까지 그만두고 사료와 씨름한 작가의 마음가짐과 준비한 공력 때문일 것이다.

이번 13권은 조선의 16대, 17대 왕이었던 효종과 현종실록을 다룬다.
이 두 왕은 ‘북벌(효종)’과 ‘예송논쟁(현종)’이라는 뚜렷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실록과 기타 사료를 검토하고 난 후 효종의 북벌이 실제로 추진되었다기 보다는 하나의 구호적인 성격과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효종은 군사에 관심이 많았고, 다양한 군사제도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효종의 군사개혁은 청을 정벌하려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침입이 있을 경우 임진왜란 때와 같은 장기항전 및 게릴라전을 염두에 두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효종이 북벌을 표방한 것은 적장자였던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이후 효종이 평생동안 낙인처럼 지니고 있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송시열을 중용한 것도 역시 당대 주류 사대부들인 산림(山林) 세력의 지지를 얻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다분히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고 보고 있다.

현종 당시의 예송논쟁은 이후 숙종에서부터 정조시기까지를 관통한 ‘당쟁’이 본격화된 사건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예송논쟁은 왕이 직접 당쟁의 중심에 서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시도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종대의 예송논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효종과 그 왕후가 죽은 후 입어야 할 상복의 기간을 두고 치열한 예학의 해석논쟁과 더불어 일어났다.
하지만 작가도 지적하듯이 상복을 입는 기간은 전시대에도 온갖 편법이 난무하였던 문제였고, 또한 각 당파의 주장에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점에서 논쟁의 결과가 완전한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 되어 버린 예송논쟁은 분명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효종의 북벌과 현종의 예송논쟁은 이제는 조선사회에서 왕권에 대한 신권의 우위가 돌이키기 어려운 대세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태종이나 세조, 연산군이 노력했던 신권을 지배하는 왕권이나 세종이 노력했던 왕권과 신권의 조화와 균형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기가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왜란과 호란, 인조반정 등을 거치면서 나타난 왕권의 무력함과 및 간관제도와 상소로 대표되는 성리학 사상으로 무장한 산림세력의 자신감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이 시대를 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시점에서 보수회귀와 근본주의적 편협함이 나타났고, 종국에는 이것이 국력의 약화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왕권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대부 지배체계 역시 무력함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였고, 그런 점에서 서서히 의식과 물질기반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중소상인들과 일부 농민들의 역할이 중요해 지는 시기였다.
하지만 결국 이 시대의 흐름은 ‘소중화(小中華)’를 강조하고, 경전의 문구 하나에 치중하여 상대편을 몰락시키는 보수적 근본주의로 회귀하고 말았다.
청나라는 서양 각 국가들과, 일본은 네덜란드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화로의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조선은 중화중심를 심화시켜 가고 있었다.
이제 당쟁은 건전한 붕당정치라기 보다는 문구 하나하나로 꼬투리를 잡아 ‘너죽고 나살기’ 방식의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조금만 더 융통성을 가진 지배체제가 이루어졌더라면, 수권 집단의 타협이란 새로운 정치문화가 창출되었더라면, 기층 민중들의 의식이 좀 더 각성하였더라면 하는 등등의 생각을 가져보지만....
결국 역사에서 가정이란 하나의 결과론이며 아쉬움의 표출 이상이긴 어려운 것 같다.

다행이었다고 느낀 점은 김 육과 같은 정치인이 있어서 ‘대동법’이라는 민중중심적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점 정도일까.
그나마도 기득권 세력의 반대로 전국적인 실행은 그 후로도 한참 후인 숙종 시대나 되어야 하니, 더욱 답답함을 느낄 뿐이었다.

이제 현종의 시대까지 가고, 아마도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장 많은 소재가 되었을 ‘장희빈’이 등장하는 숙종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예송 논쟁을 통해 지배계급의 주류였던 서인 세력과 만년 야권이었던 남인 세력의 본격적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당쟁을 통해 당시 조선의 지배계급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영조/정조시기에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다음 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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