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우주 - 별의 탄생에서 인류의 진화까지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본 우주의 수수께끼
게르하르트 슈타군 지음, 이민용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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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츠모토 레이지 감독의 <은하철도 999>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안드로메다까지 먼 여행을 떠나는 한 여행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와 영원히 순환하는 은하철도를 배경으로 활용하였는데,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주제의식이 잘 조화된 명작으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우주는 무엇보다 ‘무한함’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 시골마을의 밤하늘은 정말 캄캄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검은 심연(深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검은 밤하늘에 쏟아져 내릴 듯 달려 있던(?) 별들은 도저히 끝까지 헤아릴 수 없었다. 어쩌면 ‘무한하다’는 말은 인간 이성이 쌓아 온 물리적 법칙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감의 표현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력감에 빠진 우리들이 이 ‘무한함’을 조물주의 문제로 돌린다고 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많은 위대한 물리학자들에서부터 평범한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보면서 기독교의 창조주든, 범신론적인 신이든, 자연현상을 ‘신’의 위상까지 끌어 올리든 하나의 절대자를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우주는 자연과학의 대상이면서 언제나 인문학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 같다. 우주의 무한함은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좋은 대비거리였고,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는 질문은 신의 존재와 연결되어 신학과 철학의 영원한 주제가 되었다. 우주에 대한 하나의 사실을 밝혀냈다고 좋아하는 것도 잠시뿐, 곧바로 풀리지 않는 의문거리가 꼬리를 물고 나타나 과학의 한계를 사유하게도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증명해낸 시간과 공간의 일그러짐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인식해온 ‘시공간의 절대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뉴튼식의 물리적 세계관을 붕괴시켰다. 그 뿐인가? 우주에 인간말고 다른 생명체와 문명이 있을 것이란 상상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온 오래된 주제였으며, 별들을 연결한 별자리는 신화의 형태로 인간의 뇌리에 박혀 있다.

그래서였을까? 게르하르트 슈타군의 [유혹하는 우주] 표지에 쓰인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본 우주의 수수께끼’라는 표현이 아주 낯설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유혹하는 우주]는 대단히 충격적인 ‘인문학적 언어’로 시작한다.

                                    “세계는 착각이고 모든 것은 현상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연상하게 하는 이 프롤로그는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우주의 모든 현상(별이 반짝이고, 혜성이 날아다니는 것,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 등)은 실제 우리 감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현상이라는 점에서 착각이며, 따라서 절대적 법칙이 아닌 상식을 뛰어넘는 상대적 입장이 필요한 공간이 우주라는 의미이다. 환원론적 입장이기는 하지만 우주를 비롯한 모든 물질은 사실 형체를 볼 수 없는 원자들의 집합체이다. 물론 이 원자는 또 쪼개어 양성자와 전자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우주를 ‘감상하는’ 것에는 눈과 망원경으로 충분하겠지만,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자의 성격과 운동을 상상하고 검정하는 머리와 가슴이 필요하다. 마치 플라톤이 현상에 구애받지 않고 궁극적 이데아를 찾아 나선 것과 같이 말이다.

[유혹하는 우주]는 우주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원자(양성자, 전자)의 움직임과 빛의 성질부터 출발하여 우주의 현상(시간과 공간까지도)을 왜 상대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우주와 별의 일생은 어떠한지, 우주에서 생명은 어떻게 발생하여 진화해 왔는지의 순서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리고 저자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 중간중간에 인문학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많은 공간을 주고 있다. 절대성에 대해서, 창조주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외계생명체에 대해서 등등... 이 책을 통해 과학적 지식과 함께 이런 공간에 자신의 생각을 채워둔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독서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우주의 생성-성장-사멸의 과정이 흥미로웠다. 인간의 일생과 어딘지 닮아 있는 우주의 일생을 보면서 무척이나 신기했는데, 이와 연관된 블랙홀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우주와 신에 대한 상상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사실 우주는 인간의 미미함을 보여주는 기제로 활용되어 왔다. 인간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 수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1초에 30만 km나 나가는 빛이 무려(!) 1년을 진행하는 ‘광년’을 거리의 기본 단위로 삼는 우주의 스케일 앞에 인간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엄청난 우주도 종말을 맞이한단다. 지구나 태양과 같은 특정한 별이 아니라 우주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가? 이 지구가 소행성이나 혜성과 충돌하여 사라져버린다거나, 태양과 같은 항성이 에너지원을 모두 소모하면서 지구와 더불어 멸망하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확률이 낮거나 엄청나게 긴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분명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주 자체가 종말을 고한다니...

[유혹하는 우주]의 저자 슈타군은 두 가지 방향으로 우주의 종말을 예상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출발점은 현재도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 우주의 속성에서 기인한다. 첫 번째 종말 시나리오. 엄청나게 높은 밀도를 가진 한 점이 폭발하여(빅뱅) 현재의 우주가 확장되고 있듯이 언젠가는 이 우주가 다시 처음의 한 점으로 수축해 버린다. 우주가 확장될수록 우주 공간에는 물질이 많아지고, 빅뱅의 에너지 대신 만유인력이 작용하여 이 물질은 서로 끌어 당긴다. 결국에는 모든 물질이 하나의 점으로 합쳐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종말 시나리오. 우주가 확장은 당연히 우주의 온도 저하로 나타난다(실제 초창기 우주에 비해 현재 우주의 온도는 무척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우주가 더욱 넓어져서 입자들이 활동할 수 없을 정도까지 온도가 떨어진다면? 아마도 태양과 같은 별들은 백색왜성이 되어 식어 버리고, 에너지가 없어진 우주는 빛이 사라져 어떤 존재도 남아 있지 않은 말그대로 ‘태초의 흑암’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아! 무섭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몇 조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
어쨌든 결론은 무한해 보이는 우주도 결국은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나 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별종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블랙홀(black hole)이란 녀석이다. 태양의 수십배 되는 크기의 별이 일생을 다하고 중성자별이 되고 난 후에 그 중력이 엄청나게 강력해져서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무서운(!!!) 암흑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 블랙홀은 우주의 종말에도 살아 남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블랙홀의 중심에 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물론 지금의 과학으로 이걸 증명할 수는 없다. 빛도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관측한다는 것 자체에도 많은 가설과 가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지 않은가? 블랙홀 안에 천국과 지옥이 있는 셈이니까. 그래서 신의 존재나 천국, 지옥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과학적 엄밀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왠지 내 상상력이 조금 더 넓어지는 느낌이 들어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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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알기 쉽게 풀어쓴 (한글판 + 영문판)
E. H. 카 지음, 이화승 옮김 / 베이직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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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역사’의 중흥기라고 할 만 하지 않은가? 대형 서점 역사 관련 서적의 진열대는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이덕일 선생과 같은 분은 그 이름만으로도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지 오래이다. 어쩌면 일주일 내내 거의 매일 TV 화면에 방송되고 있는 사극이야말로 최근 역사서적에 쏠리는 관심과 인기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역사책과 역사물의 홍수 속에서 혹시나 역사를 안다는 것이 가지는 기본이 부족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의문이 생긴다. 최근의 역사 열풍은 ‘고루하고 어려운 암기과목’이라는 역사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을 극복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지나치게 흥미위주로 빠지거나 드라마의 경우 역사왜곡의 논란에 휘말리기도 한다. 이제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과거로 하여금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되게 하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현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옛 것은 현재를 비추어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단계가 될 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딘지 기본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무언가 근본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좋은 방법은 그 분야의 고전을 읽는 것이다.
E.H.카의 강의를 묶어낸 [역사란 무엇인가].
비록 세상에 나온지 50여년 정도인 젊은(?) 책이지만 역사 분야의 고전으로 너무나 유명한 책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권하는 필독서 목록에서 이 책이 빠져 있다면, 목록 작성에 문제가 있었을 거다. 그리고 아마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이라도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정의를 들어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 새내기 시절 독후감을 위해 읽은 후 다시 한 번 [역사는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E.H.카의 논의가 이분법적이거나 환원론적이지 않고 대단히 ‘통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이 들고 있는 당대의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이름을 빼놓고 순수하게 그가 주장하는 바를 읽다보면 무척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관점이고, 50년 전 서구의 역사학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서구 역사학계는 일세를 풍미하던 랑케의 실증사학과 이에 대한 비판이 격렬하게 부딪치던 시기였다.

랑케의 실증사학은 사료와 기록을 중시하였으며, 사실에 관한 모든 지식은 객관적이며 증명 가능한 경험적 증거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랑케는 ‘그것이 진실로 어떠했는가’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과거 사실들이 개별적으로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사실의 개별성’과 ‘사실의 개체성’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역사는 ‘과학’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이 모여 구성되는 각 시대는 그 자체로 완결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들의 인과성이나 직선적인 과정으로서 역사적 진보는 거부된다.
반대로 실증사학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랑케의 생각을 ‘고상한 꿈일뿐’이라고 치부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과거의 사실들이란 역사가의 자아가 개입되고, 역사 서술계층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의도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크로체가 말한 ‘모든 역사는 현재사(contemporary history)의 성격을 갖는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역사란 현재 역사가의 관심과 상황에 따라 재구성되고 있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란 말도 이런 점이 반영된 말이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가 과연 어떤 관점에서 쓰여졌고, 그 관점에 따라 인물과 시대상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역사란 무엇인가]가 역사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로는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우선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 전체에 흐르는 통합적, 상호의존적 관점이다. E.H.카는 실증사학과 反실증사학의 대립, 정치사상의 대립,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의문들 속에서 접점을 찾고자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도출될 수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루었다.
두 번째 이 책의 강점은 그 문제들이 하나같이 역사철학에서 대단히 비중있는 주제들이란 점이다. 과거의 사실과 역사적 사실, 역사 속에서의 개인과 집단, 역사가 가지는 과학적 성질, 역사상 사건들의 인과관계, 역사의 진보와 방향성 등 굵직굵직한 주제들은 사실 각각 하나의 책으로 나올 수 있을만큼 중요한 문제들이다. 카는 이런 주제들을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설적이지만, 그 문제들이 결코 하나의 해답으로 완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저자의 주장이 가지는 생명력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지금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E.H.카의 주장 역시 포스트모던 계열과 구조주의 계열의 역사학자들로부터 끊임없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된, 지금도 살아 있는 주장인 것이다.

이번에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해 본 것이 있다.
E.H.카가 말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는 결국 ‘과거의 사실들과 현재의 역사가들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랑케의 실증사학을 극복하고 역사가를 역사적 사실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으니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과연 역사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수많은 사실들 가운데 역사적 사실을 추려 내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역사가의 힘이 지나치게 커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E.H.카는 대화가 ‘사회적’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주장하였고,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과학적’ 방법의 원용을 주장한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란 그 시대와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계속하여 강조한다. 영웅, 위인, 악인들은 어쩌면 한 명의 개인이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듯,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마침내 역사적 사실로 발생한 ‘축적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 축적성이 있는 과거 사실이라야 ‘역사적 사실’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과학적 방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객관화와 일반화를 의미한다. 또한 인과관계의 규명도 중요한 과학의 특성이다. 왜 E.H.카는 과학을 언급했을까? 그 이유는 과도한 역사가의 주관 개입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니라 역사가에 의한 사실의 ‘지배’와 ‘왜곡’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가 주장하듯이 역사학을 진보적인 학문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는 역사학의 발전을 변증법적으로 보는 듯 하다. 내가 본 것이 틀리지 않다면 E.H.카는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과거를 해석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이것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학은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모순의 축적에 따른 진보, 즉, 역사적 사실의 축적에 따른 사회의 진보가 아니라 ‘역사학의 진보’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부분은 그의 마지막 장이다. E.H.카는 역사학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하여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지양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리엔탈리즘’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 이전인 50여년 전에 영국의 한 학자가 이러한 주장을 폈다는 것이 한 편으론 신기하면서도 또 한 편으론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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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 이야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박상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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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 브라이슨은 특별한 기억이 남는 작가이다.
그는 문과 출신인 내게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와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어렵게만 느껴졌던 과학을 그렇게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반할 만한 작가였지만,
더 놀라운 것은 빌 브라이슨 자신도 과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순간순간 들었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였고,
그 과정이 마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해결하는 즐거움에 가득찬 학생을 떠올리게 했다.
이 사람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공자님 말씀이 있는데,
바로 논어에 나오는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는 말이다.

이런 작가가 ‘미국’이라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나라를 만났으니, 그 만남이 밋밋할 리가 없다.
게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긴 하지만 20년이 넘게 영국에서 살다가 귀향한 ‘이방인’의 자격으로 만난 특수한 상황이니 말 그대로 ‘특별한 만남’이 되지 않겠는가.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때때로 귀엽게(!) 투덜거리는 작가, 자신이 느낀 바를 주저하지 않고 드러내며 그 이유를 찾는 작가인 빌 브라이슨은 고국과의 만남에서 느낀 점을 60편의 글에 담았다.

그는 영국에서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인 20년을 보내고 고향인 미국으로 귀향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20년 만의 미국생활은 여전히 익숙한 것과 전혀 새로운 것이 뒤섞인,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카오스’ 상태였을 것이다.
일 년에 두어번 고향을 찾는 내 경험으로 비춰봐도 그렇다. 일년에 두 번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빌 브라이슨은 딱딱한 여행기나 감상에 치우친(오! 나의 조국이여! 하는 식의 글) 정착기를 쓰지 않았다.
여기서 빌 브라이슨의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그래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강점 두 가지가 나온다. 바로 유머를 통한 친숙함과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지적해 내는 날카로움이다.
이런 강점은 10년도 더 지난 원고(이 책에 수록된 칼럼들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쓰여진 것이다)를 2009년에 읽어도 독자들을 킥킥거리게 만들면서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도록 불가사의한 마력을 발산하기까지 한다.

그는 스머프 만화에 등장하는 투덜이 스머프처럼 미국 생활 중에 연신 투덜거리는데,
그 투덜거림이 마치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과 같아서 귀엽고 재미있다.
그런데 놀라운지고!
그 투덜거림에는 재미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자 귀향민으로서 빌 브라이슨이 느끼고 파악하는 미국인에 대한 날카롭고 진지한 성찰이 가득 담겨 있다.
괜히 책 제목에 ‘발칙한’이라는 쉽게 쓰기 힘든 단어를 수식어로 붙여 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짜 도넛을 제공한 친절한 동네 우체국에 찬사를 보내다가도 불분명한 주소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우편서비스에 불만을 토로한다.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모습은 좋지만, 그 도가 지나치고 너무나 복잡해져서(아침식사 메뉴만 해도 9가지의 달걀과 16가지의 팬케이크, 6종류의 주스, 2가지 모양의 소시지, 4종류의 감자, 8종류의 토스트와 머핀, 베이글이다) 오히려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투덜거린다.
몇 십미터 떨어진 체육관에 차를 타고 가면서 체육관의 러닝머신을 이용해서 살을 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왜 아무도 걷지 않는가?’라고 절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모습은 ‘낭비’로 보일 정도로 과도한 소비 지향적인 문화와
공항과 식당, 이민허가 과정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규정에 과도하게 얽매이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블랙 코미디(black comedy)를 즐기는 이유는 웃음 속에 불안함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빌 브라이슨의 고군분투 고국 정착기를 따라 읽다보면 우리는 웃음을 그칠 수가 없는데,
그 웃음이란 것이 파안대소하거나 빙긋이 미소 짓는 것과는 좀 다른, 키득키득거리는 ‘집어 삼키는’ 웃음이다.
이런 웃음은 뭐랄까, 대상의 숨겨진 모습을 발견할 때 짓는 다분히 관음적인 웃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웃음의 원천은 전적으로 빌 브라이슨의 유머와 날카로움 가득한 글쓰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니, 그의 미국 정착이 좀 더 시간을 끌어서 더 깊은 블랙 유머로 나타났으면 하는 것은 좀 너무한 부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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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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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나온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눈이 확 떠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뭔가 이전까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것이 180도 달라져 보인 체험이었다.

이번에 이 책을 거의 10년만에 다시 읽었다.
역시 책은 일정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여러번 읽으면 새롭게 보인다는 점을 실감했다.
처음 나온 이후로 시간도 많이 흘러서 사회의 여러 가지 면이 변화했다.
또한 출판된 이후 일어난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학자들과 활동가들 사이의 논쟁도 이 책을 보는 새로운 관점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 책이 주는 성찰과 반성, 고민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란 사회(전체)의 구조화된 질서 또는 의식과 행동체계를 개인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장(場)을 말한다.
이 때문에 habitus를 ‘삶의 습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진중권씨 같은 경우는 ‘습속(習俗)’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중요한 점은 ‘습속’은 무의식 중에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구성하고, 우리를 길들인다는 점이다.

우리 현대사의 많은 부분은 폭력과 권위에 의한 지배라는 그다지 즐겁지 못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완전하게 청산되지 못한 제국주의 잔재, 군사 쿠데타, 광주를 폭력으로 진압한 두 번째 쿠데타...
그래서였을까? 대학생이었던 시절 우리가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파쇼정권 타도’였고,
민주화 운동이 거둔 소기의 성과로 인해 이제 어쩌면 정치권력으로서, 타도의 대상이었던 실체로서의 파시즘은 사라졌고, 앞으로도 등장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시대를 겪으면서 마치 ‘가랑비에 옷젖는 줄 모르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식과 사고, 생활양상이 파시즘에 물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habitus가 되어 우리들의 일상이 무의식적인 가운데 파시즘적 행동, 파시즘적 사고로 변화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게 된’ 모습이라고 할까.

임지현 교수와 여러 필자들이 함께 만든 [우리 안의 파시즘]은 파시즘의 논리와 체계가 우리의 일상생활로 어떻게 파고들어왔으며, 어떻게 habitus가 되어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면서 우리 자신이 ‘파쇼화’되고 있는가를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임지현 교수는 개인적, 미시적 수준에서 형성된 파시즘은 독재정권의 존속을 위한 기반이 되었고, 이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힘의 독재’ 뿐만 아니라 ‘합의 독재(consensus dictatorship)’를 형성함으로써 지배구조를 지탱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장 민주적이고 열려 있어야 할 진보 진영조차도 그 운영원리에는 파시즘의 논리가 살아 숨쉬고(물론 잘 보이지 않는 형태로) 있음을 지적한다.

맹목적인 반공교육은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모든 것에 빨갱이의 낙인을 찍어대는 ‘자동회로’를 구축하였다.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도 여성에 대해서만은 가부장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아무 생각없이 찍었던 주민등록증의 지문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병역의 의무에서 임지현 교수의 주장대로 ‘파시즘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출판되고 난 이후 벌어졌던 논쟁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우리 안의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또 하나의 양비론에 이용될 소지가 충분하고, 사회운동을 ‘품성’이 갖추어진 후에나 해야 한다는 논리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파시즘 정권과 독재의 유지존속의 책임의 일부분을 그동안 우리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왔던 민중에게 환원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신(新)양비론이 나타나게 된 핵심은 이 책이 비판하고 있는 전근대적이고 파시즘적인 속성들, 즉, 권위주의나 가부장주의, 차별이 마치 그러한 습속을 만들어 내고 자신들의 이익유지를 위하여 계속 확대재생산해 온 집단의 책임을 묻기 보다는 민중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지고 실천되어지는 것으로 보는 논리 때문이다.
이 논리는 과거 독재를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흔히 하던 말. ‘너 자신부터 깨끗해진 후에 정부를 비판해라’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소위 진보운동 세력이나 시민사회운동 세력을 비판하는 아주 전형적인 지배층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은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냥 도닦듯이 개인이 깨끗한 생활을 하면 그만인 것을....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소중한 저작이며, 그 의의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점을 가슴 아프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해 오고,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바라보던 것이 실은 ‘국가중심주의’, ‘가부장주의’, ‘혈통주의’, ‘차별주의’, ‘권위주의’의 산물임을 알려주며,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그런 것들이 바로 내 일상에 체화되어 습관처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소위 이 사회의 진보를 바라고, 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성찰지점이 될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앞서 지적한 양비론적 입장, 사회개혁 무용론적 입장에 조심한다는 전제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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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호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2
외젠 다비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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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거세게 물결치는 격정적인 물줄기와 같았다면,
바로 다음에 읽은 외젠 다비의 [북호텔(Hotel Du Nord)]은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와 같았습니다.

이야기는 생마르탱 운하가 흐르는 파리 북부의 ‘북호텔’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이 호텔은 ‘화려함’의 대명사 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호텔’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다소 어색하고 허름한 건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소위 ‘파리지엥’이라고 말할 때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사람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북호텔’에 머물다가 떠나는 사람들은 파리의 서민들과 빈민들, 무슨 이유에서든 숨어 있어야 하고 피해 다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특급호텔에 비해 규모도 작고 최신식의 시설도 갖추지 못하였으나
파리의 하층민들에게 북호텔은 고단한 하루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하루를 마치고 짧게나마 휴식을 얻는 마무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북호텔은 그들이 먹고, 잠들고, 유혹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삶의 공간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호텔 주인인 르쿠브뢰르 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호텔과 인연을 맺습니다.
그러나 인물들 사이에는 비중의 차이도 없고,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북호텔’ 자체가 주인공이 될 만 합니다.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삶에 지친 사회의 하층민들을 품어 안고 있으면서,
그들 삶의 치열함과 노곤함을 모두 그 몸 곳곳에 흔적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설 마지막에 철거당하는 호텔을 보면 마치 다른 소설에서 주인공이 비장한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볼 때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인물들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녀인 르네와 미마르의 부인이었던 쥘리의 인생이 가장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북호텔의 하녀였던 르네는 사랑하던 애인에게 버림받아 절망하지만, 아기를 낳아 행복을 그려갑니다. 그렇지만 행복도 잠깐. 아기는 전염병으로 죽게 되고, 르네는 매춘부로 전락하여 마침내 호텔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쥘리는 익숙한 시골을 떠나 파리의 복잡하고 고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결국은 폐병을 얻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외젠 다비는 이들에게 값싼 동정을 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소위 하층민이 가지는 게으름과 부도덕을 탓하지 않으며,
이들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고 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탄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흐르는 생마르탱 운하의 물처럼,
외젠 다비는 그냥 그대로 이들의 생활을 그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떤 과장이나 곡해도 없이 솔직하고 담담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외젠 다비는 ‘북호텔’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삶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궁색하고 가난한 삶은 평생 유지될 지도 모릅니다.
아니, 매춘부로 전락하여 쓸쓸히 떠나간 르네처럼 오히려 더 낮은 지위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더욱 많습니다.
그러나 ‘북호텔’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인생역정을 보면 공통점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 감정도 없이 그려 낸 사람들의 일상이 오히려 어떤 웅변보다 더 강하게 삶의 치열함을 뿜어내고 있다는 점과 고단함 가운데서도 이웃에게 포도주 한 잔 사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치열함과 애정에 희망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 이전에 세상에서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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