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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알기 쉽게 풀어쓴 (한글판 + 영문판)
E. H. 카 지음, 이화승 옮김 / 베이직북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바야흐로 ‘역사’의 중흥기라고 할 만 하지 않은가? 대형 서점 역사 관련 서적의 진열대는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이덕일 선생과 같은 분은 그 이름만으로도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지 오래이다. 어쩌면 일주일 내내 거의 매일 TV 화면에 방송되고 있는 사극이야말로 최근 역사서적에 쏠리는 관심과 인기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역사책과 역사물의 홍수 속에서 혹시나 역사를 안다는 것이 가지는 기본이 부족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의문이 생긴다. 최근의 역사 열풍은 ‘고루하고 어려운 암기과목’이라는 역사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을 극복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지나치게 흥미위주로 빠지거나 드라마의 경우 역사왜곡의 논란에 휘말리기도 한다. 이제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과거로 하여금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되게 하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현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옛 것은 현재를 비추어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단계가 될 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딘지 기본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무언가 근본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좋은 방법은 그 분야의 고전을 읽는 것이다.
E.H.카의 강의를 묶어낸 [역사란 무엇인가].
비록 세상에 나온지 50여년 정도인 젊은(?) 책이지만 역사 분야의 고전으로 너무나 유명한 책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권하는 필독서 목록에서 이 책이 빠져 있다면, 목록 작성에 문제가 있었을 거다. 그리고 아마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이라도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정의를 들어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 새내기 시절 독후감을 위해 읽은 후 다시 한 번 [역사는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E.H.카의 논의가 이분법적이거나 환원론적이지 않고 대단히 ‘통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이 들고 있는 당대의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이름을 빼놓고 순수하게 그가 주장하는 바를 읽다보면 무척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관점이고, 50년 전 서구의 역사학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서구 역사학계는 일세를 풍미하던 랑케의 실증사학과 이에 대한 비판이 격렬하게 부딪치던 시기였다.
랑케의 실증사학은 사료와 기록을 중시하였으며, 사실에 관한 모든 지식은 객관적이며 증명 가능한 경험적 증거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랑케는 ‘그것이 진실로 어떠했는가’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과거 사실들이 개별적으로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사실의 개별성’과 ‘사실의 개체성’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역사는 ‘과학’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이 모여 구성되는 각 시대는 그 자체로 완결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들의 인과성이나 직선적인 과정으로서 역사적 진보는 거부된다.
반대로 실증사학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랑케의 생각을 ‘고상한 꿈일뿐’이라고 치부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과거의 사실들이란 역사가의 자아가 개입되고, 역사 서술계층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의도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크로체가 말한 ‘모든 역사는 현재사(contemporary history)의 성격을 갖는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역사란 현재 역사가의 관심과 상황에 따라 재구성되고 있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란 말도 이런 점이 반영된 말이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가 과연 어떤 관점에서 쓰여졌고, 그 관점에 따라 인물과 시대상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역사란 무엇인가]가 역사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로는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우선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 전체에 흐르는 통합적, 상호의존적 관점이다. E.H.카는 실증사학과 反실증사학의 대립, 정치사상의 대립,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의문들 속에서 접점을 찾고자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도출될 수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루었다.
두 번째 이 책의 강점은 그 문제들이 하나같이 역사철학에서 대단히 비중있는 주제들이란 점이다. 과거의 사실과 역사적 사실, 역사 속에서의 개인과 집단, 역사가 가지는 과학적 성질, 역사상 사건들의 인과관계, 역사의 진보와 방향성 등 굵직굵직한 주제들은 사실 각각 하나의 책으로 나올 수 있을만큼 중요한 문제들이다. 카는 이런 주제들을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설적이지만, 그 문제들이 결코 하나의 해답으로 완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저자의 주장이 가지는 생명력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지금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E.H.카의 주장 역시 포스트모던 계열과 구조주의 계열의 역사학자들로부터 끊임없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된, 지금도 살아 있는 주장인 것이다.
이번에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해 본 것이 있다.
E.H.카가 말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는 결국 ‘과거의 사실들과 현재의 역사가들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랑케의 실증사학을 극복하고 역사가를 역사적 사실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으니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과연 역사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수많은 사실들 가운데 역사적 사실을 추려 내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역사가의 힘이 지나치게 커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E.H.카는 대화가 ‘사회적’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주장하였고,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과학적’ 방법의 원용을 주장한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란 그 시대와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계속하여 강조한다. 영웅, 위인, 악인들은 어쩌면 한 명의 개인이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듯,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마침내 역사적 사실로 발생한 ‘축적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 축적성이 있는 과거 사실이라야 ‘역사적 사실’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과학적 방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객관화와 일반화를 의미한다. 또한 인과관계의 규명도 중요한 과학의 특성이다. 왜 E.H.카는 과학을 언급했을까? 그 이유는 과도한 역사가의 주관 개입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니라 역사가에 의한 사실의 ‘지배’와 ‘왜곡’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가 주장하듯이 역사학을 진보적인 학문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는 역사학의 발전을 변증법적으로 보는 듯 하다. 내가 본 것이 틀리지 않다면 E.H.카는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과거를 해석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이것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학은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모순의 축적에 따른 진보, 즉, 역사적 사실의 축적에 따른 사회의 진보가 아니라 ‘역사학의 진보’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부분은 그의 마지막 장이다. E.H.카는 역사학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하여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지양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리엔탈리즘’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 이전인 50여년 전에 영국의 한 학자가 이러한 주장을 폈다는 것이 한 편으론 신기하면서도 또 한 편으론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