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5
마이크 마퀴스 지음, 김백리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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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있을수도 있는데, 밥 딜런은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이다.
아직 살아있는 인물에 대한 전기가 나온다는 것은 사실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밥 딜런은 사회적 활동을 모두 마치고 은퇴한 상태의 사람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2006년 65세의 나이로 발표한 ‘모던 타임즈(modern times)’가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에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의 활동영역은 포크라는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아서,
블루스, 컨트리, 가스펠, 재즈 등 다양한 형식으로의 끊임없는 변신을 가져왔던 사람이며,
뮤지션으로서의 활동 이외에도 작가와 화가라는 새로운 예술 영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바 있는 사람이다.

간단히 말해 밥 딜런은 ‘현재 진행형’의 인물로서,
‘평전’이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로 평가가 가능한 시점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평전’이란 말 그대로 ‘개인의 일생 전반에 걸쳐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가 아닌가.
또한 지금까지 밥 딜런의 살아온 인생을 보건데,
그는 앞으로 더 변화하고, 더 새로워지며, 지금과 더욱 다른 삶을 살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 딜런의 평전이 나왔고, 번역되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형인 사람의 전기는 왜 출판되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1960년대 전후의 시대상황에 대한 보고서라고 생각한다.
즉, 밥 딜런은 한 명의 뮤지션이나 포크 가수가 아니라 1960년대를 관통하던 시대의 아이콘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불의 시대’를 지나온 아이콘이 어떤 변화의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살아온 밥 딜런을 통하여 주의하여 생각해 볼 점은
첫째는 ‘진정성’이며, 둘째는 ‘거대 담론 속의 개인’이라 측면이다.
밥 딜런을 비롯하여 저항을 노래한 수많은 뮤지션들을 추동한 동기는 ‘진정성(authenticity)’이었다.

포크 싱어들에게 있어 ‘진정성’은
역사와 전통, 포크와 민중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실존적인 요구였고, 그 기준은 바로 ‘정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발전의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는 자본주의는
이 시기에 산업적 생산물을 급격히 증가시켜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의 소외를 본격화시키기기 시작하였다.
광풍처럼 불어닥친 ‘매카시즘’이란 red complex는 어떤 종류의 비판적인 외침에도
‘반체제적’, ‘비애국적’, ‘빨갱이’란 딱지를 붙여가며 때론 목숨에 대한 탄압도 서슴치 않았다.
특히 미국 사회에 여전히 잔존해 있던 인종차별은 하나의 인습이 되어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들의 인권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밥 딜런의 음악에 담긴 진정성이란
기본적으로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민중의식의 분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자유와 평등을 억누르는 경제적 속박(자본주의)과 정치적 속박(반공주의, 매카시즘), 제도적 속박(온갖 인습과 구세대의 규제)을 끊고자 하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거대 담론 속의 개인’이란 측면에서 밥 딜런을 바라보는 것은
한 개인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우면서도 어딘가 서글픈 구석이 남아 있는 지점이다.
더욱이 이런 밥 딜런의 변화는
우리나라의 김지하, 박노해, 김광석, 안치환, 정태춘 등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은 감상을 준다.
밥 딜런은 1965년 전자기타를 들고 연주회에 나타나 ‘변절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으며,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그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의심받아야 했다.
생각해보면, 밥 딜런은 그 시대의 아이콘은 되었으되, 그가 스스로 원하여 된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가 반대하고 거부한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여러 가지 ‘거대 담론’들의 억압...
즉, 자본주의, 인종차별, 반공주의 등이었으되,
이러한 것들에 대한 반대가 다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그 담론의 입맛대로 재단하는 것이란 느낌이 들 때에 밥 딜런은 또다시 그 틀을 벗어나 버렸다.
그는 한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였지만, 그는 그 상태를 싫어했던 것이다.

                    내가 대변자가 될 것으로 여겨졌던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은 커녕
                                    심지어 그들을 아는 바도 전혀 없었으며..... 
                반체제 문화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알 만큼은 알고 있었다. 
                                   내가 쓴 가사들, 내 노래에 담긴 의미들이 
                             논쟁으로 인해 파멸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밥 딜런 평전]을 보면서 역시 우리나라의 ‘불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에 저항하는 아이콘이었던 김지하 시인.
사회주의 혁명에 기여하고자 분주했던 [노동의 새벽]의 박노해 시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제도권으로 나와 여전히 활동하는 안치환... 그리고 김광석...
그리고 김남주, 정태춘 등등....
아직 본인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고,
이제는 다소 간의 방향전환을 통해 새로운 앞길로 진출하는 이도 있고,
또 이제 고인이 되어 더 이상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지만,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의 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불꽃과 같았던 저항의 역사와
이제 다소간 진정(?)되어 나름대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그들의 변화..
또 그 저항과 변화가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이다.

다시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nin' in the Wind)”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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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마녀 2008-09-0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딜런 토마스'를 넘 좋아하여 이름을 '답 딜런'이라고 지었다던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로 시작하던 그 노래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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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하고 풍경이 울렸다"

적막을 깨는 한밤중의 소리가 얼마나 사람에게 공포감을 주는지는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뭔가에 익숙해 있을 때, 특히 고요함에 익숙해져 있을 때 갑자기 들리는 '딸랑' 소리는
우선 청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다음으로 촉각을 자극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공포감을 주는 것이다.

'구온지' 가문의 데릴사위였던 한 남자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임신한지 20개월이 되도록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삼류소설가인 '나(세키구치)'와 고서점을 운영하는 교고쿠도는 '구온지' 가문의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와 아기를 낳다 죽은 원념을 가리키는 '우부메'의 정체를 쫓는다.

[우부메의 여름]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독특함을 가진 소설이었다. 마치 어두운 밤의 풍경소리처럼 말이다.
먼저 이 소설은 우리가 얻는 정보의 9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는 시각에 대해 의심하도록 하며,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 실재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에 얼마나 허구가 들어 있는지를 말해준다.
이는 우리가 익숙해 있는 '감각'이란 고요함을 깨는 첫번째 풍경소리이다.
그리고 '우부메'라는.... 아기를 낳다가 죽어 그 원념이 아기를 찾아 떠도는 요괴의 전설을 내세우고,
이 전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공포와 헛된 야욕에서 발생한 것임을 통렬하게 밝힘으로써
우리가 생활중에 체득하고 있는 과학과 합리는 통념을 정면에서 뒤엎어 버린다.
이는 우리가 익숙해 있는 '이성'이란 고요함을 깨는 두번째 풍경소리이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좌우에서 울리는 이 풍경소리들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익숙해져 있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음양사'라는 존재가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허무맹랑함이 묘한 현실감 가운데 살아있다는 점이다.
이건 무엇보다도 사실과 허구, 이성과 감각, 과학과 민속이 나누어지지 않은 시기...
즉, 지금에 비해 보다 인간의 원형에 가깝던 시기(그래봤자 50년 전이지만)인 1952년을 배경으로 하면서,
황량한 언덕길에서 만나게 되는 끈적끈적한 일본의 여름 날씨... 또 갑작스레 퍼부어대는 빗줄기 등이 정치하게 배치되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의 현실감은 전반부에 나오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그 유명한 '장광설'에서도 일정 부분 비롯한다고 보여진다.
감각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뇌는 어떻게 활동하는가 등과 같은 과학의 근본적이고 사변적인 질문과 더불어
민속학,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나비효과가 버무려져 펼쳐지는 지식의 장광설.
이것은 교고쿠 나츠히코가 배치한 양쪽의 풍경소리가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라는 의식을 독자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심어준다.


사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은 편이 아니었고, 교고쿠 나츠히코란 작가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이었으며,
아무래도 과학과 이성에 찌든 머리를 가진 내게는 다소 억지스런 설정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게 하였지만
하여튼 특이하면서도 보통 공력을 가진 작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평을 쓰면서 교고쿠 나츠히코의 원작을 TV 애니매이션으로 제작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제목은 [항간에 떠도는 100가지 이야기(巷說百物語)]라고 한다나....
교고쿠 나츠히코를 좋아하는 분들은 구해서 보면서 더운 여름을 잊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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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신혼여행
고스기 겐지 외 지음, 정태원 옮김 / 문학의문학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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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중 한 명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비롯한 11개의 단편집이다.
최근 유행하는 일본 소설의 특징답게 술술 잘 읽혀져 가며, 일본의 여러 추리소설상에서 입상한 작가들의 이력에서 보이듯 미스테리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결과로 나타나는 반전도 아주 상큼한 책이다.
뭐랄까.... 생각지도 않은 작은 미술관에서 작고 아기자기한 소품 명작들을 접한 느낌이라고 할까...
휴가지에 가져가서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읽기에는 제격인 책이었다.


책의 제목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제목을 따서 [기묘한 신혼여행]으로 지었다.
이것은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11편의 소설 모두에 다양한 남녀관계 또는 부부관계가 등장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숨겨진 이면을 짚어낸다는 의미도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아홉 번째 작품인 <예절의 문제>는 이런 설정의 예외이다)

사실 이런 책에서는 어떤 거창한 의미를 짚어 내어 말하기는 무척 어렵다.
구태여 찾아낸다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연인 또는 부부들이 겪게 되는 오해.
그리고 그 오해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오해는 때론 가볍게 웃음지을 정도로 유쾌하게 표출되기도 하지만,
또 때론 주위 사람들조차 파멸로 이끌 정도로 무섭게 나타난다.
문학의 영원한 테마라 할 수 있는 남자와 여자의 상관관계.
그리고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
그 상관관계와 대화, 소통의 모습을 최근 유행하는 일본소설의 전형성 속에서 맛보는 것도 색다른 독서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11편의 간단한 줄거리와 함께 더운 밤을 다소나마 시원하게 보내는 것은 어떨까?

<마지막 꽃다발>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하며 나온다.
꽃미남인 ‘나’와 나의 첫사랑인 ‘에리카’의 짧은 행복과 비극적 결말의 이야기.
아름다운 아가씨인 ‘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배달되는 정체불명의 선물에 관한 이야가.
이 두 이야기은 과연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붉은 강>
‘인간적인’ 변호사를 표방하는 가자미 변호사.
그는 자기 부인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변호를 맡을 정도로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가자미 변호사가 변호한 강간살인범 ‘무가이’가 출소하게 되고, 변호사의 집에 얹혀 사는데..
무가이는 가자미 변호사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눈치채게 되고,
이는 멀고 먼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결되어 연쇄살인을 부른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반전!


<겹쳐서 두 개>
어느 호텔 방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놀라운 것은 여자의 시체는 머리에서 허리까지만 있을 뿐, 시체에 붙은 하반신은 남자의 것이었다.
즉, 두 사람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겹쳐진 시체인데...
그렇다면 여자의 하반신과 남자의 상반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혼식 손님>
아키히코는 5년 전 히로코라는 여성을 유혹하여 즐긴 후 바로 헤어져 버린다.
그러나 아키히코에 반한 히로코는 슬픔으로 자살해 버리는데...
5년 후 아키히코의 결혼식.
아키히코는 피로연장에서 히로코의 어머니로 보이는 노파를 발견하고 불안에 휩싸인다.

<기묘한 신혼여행>
하와이에서의 신혼여행 첫날 밤.
‘나’는 아내인 나오미를 죽이려 목을 조른다.
나오미가 전처의 딸이었던 히로코를 죽였다는 의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에 대한 벌>
금전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던 이토코는 친한 친구인 유카리를 찾아간다.
남편의 불륜에 대한 이혼위자료로 시아버지의 거액의 상속재산을 기대하던 유카리.
유카리는 지나가는 말로 이토코에게 “누가 그 노인 좀 안락사 안 시켜주나....”라고 말한다.


<기묘한 인연>
가벼운 접촉사고 후 ‘스미다’라는 예의바른 사람을 알게 된 변호사 ‘나’
어느 날 스미다의 고향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형 가구회사와 지역 주민들간의 분쟁 소식을 알게 되고,
‘나’는 마을 주민들 편에 서서 유리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그 뒤에 숨은 의도는?

 

<좋은 사람이지만>
영업사원인 ‘나’는 상사의 소개로 ‘마리에’라는 의사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나는 마리에와 수영장에서 만날 약속을 하지만,
마침 일이 생긴 마리에는 수영장에 오지 않았고, 그 동안 나는 귀걸이를 잃어버린 한 여성을 돕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귀걸이를 찾아준 여성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예절의 문제>
“문단속을 잘 합시다”라는 제목으로 한 신문에 실린 독자 투고.
그런데 그 독자투고에는 끔찍한 사건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더욱이 투고한 독자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아메리카 아이스>
마약과 강간, 폭력이 횡행하는 미국의 한 고등학교.
일본인 유학생 노보루는 일본 여학생을 강간한 세 명의 미국인을 혼내준다.
앙심을 품은 미국 학생들은 ‘나’와 함께 노보루를 없앨 계획을 세우는데...
노보루를 없애기로 정한 날. 노보루는 멀쩡히 돌아왔으나 미국 학생들은 행방불명이 된다.

 

<식인 상어>
일본 내해에서 식인 상어를 보았다는 제보가 한 언론사에 접수된다.
그리고 2주 후, 정말 상어에 의해 한 잠수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과연 식인상어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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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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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일상’이란 것 속에서 살아간다.
일상이란 규칙적, 익숙함, 안정감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반면 지루함, 권태감, 반복성 등과 같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속에 살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잠시나마 그 일상을 벗어나기를 꿈꾸며, 또한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일상을 벗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일탈’이란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일상 속에 살다가 이 일상이 잠시나마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계획한 여행과 같이 의도된 것이기도 하고, 우리의 의도 밖에 있는 우연에 의해서 경험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연에 근거한 일탈은 워낙 순간적이어서 그것이 닥쳐올 때의 느낌을 포착하기가 어렵고,
어느 정도 일탈이 진행되고 난 이후에야 우리는 ‘아! 내가 뭔가 다르게 살고 있구나’, ‘뭔가 다른 것을 경험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상이 예측 가능한 것이라면 일탈은 예측하기 어려운 우연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우연성 때문에 일상이 깨어질 때에는 익숙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뭔가 박진감 넘치는 스릴을 느끼면서 자극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유디트 헤르만은 이와 같은 일상의 틈새를 파고드는 ‘일탈’을 잘 간취하는 작가인 것 같다.
[단지 유령일뿐]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은 일상과 일탈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인물들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7편의 단편은 모두 ‘여행’이라는, 우리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방법으로서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유디트 헤르만은 ‘의도된’ 일탈 과정 중에 순간순간 나타나는 ‘의도되지 않은’ 일탈을 배치하여
이런 우연성에 기반한 일탈이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 친구의 애인을 만나러 떠나고(루스),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며(차갑고도 푸른, 단지 유령일 뿐,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긴 여행을 떠난다(뚜쟁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
그리고 유디트 헤르만은 이런 일탈의 이야기를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그야말로 툭툭 던지며,
메마르고 차갑게, 마치 담배 연기 속에 금방 사라져 가는 듯이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내가 보기에 유디트 헤르만은 7편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일탈이 주인공들에게 단지 그 시점에서는 ‘순간’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일탈이 이후의 주인공의 살아가는 인생가운데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순간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관심이 간 본 작품은 <차갑고도 푸른>, <단지 유령일뿐>, <어디로 가는 길인가>였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인생이란 시간은 선(line)을 따라 단순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가 분리될 수 없고, 서로 뒤바뀔 수 있는 입체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치 이리저리 돌려서 동일한 색상을 만드는 큐브 퍼즐처럼,
일상과 일탈, 또는 예측가능성과 우연성은 서로 맞물려서 현재의 ‘나’란 존재를 형성한다.
일상이 계속되어 쌓일 때, 어느 순간 일탈은 ‘우연’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 내 삶을 흔든다.
그 일탈이 진정되고, 일탈의 변혁성이 사그러질 때,
일탈의 에너지는 다시 일상 속으로 녹아들고, 그 때의 일상은 일탈 이전의 일상에 비해 한 단계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도저히 풀 수 없는 큐브도 결국에는 정확한 순서와 인과관계에 의하여 같은 색상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듯이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차갑고도 푸른>에서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는 ‘현재형’ 시제를 들 수 있다.
현재의 동거인인 마그누스와 딸 수나와 살고 있는 일상을 당연히 현재형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1년전 독일에서 온 요나스 및 이레네와 보낸 5일간의 과거 회상 내용 역시 모두 ‘현재형’으로 처리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일도 ‘요나스는 말했다’가 아니라 ‘요나스는 말한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편은 과거가 현재는 뒤섞여 있으면서 과거의 ‘일탈’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같은 맥락으로 <단지 유령일 뿐>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으리라 생각된다.
사막과 같은 사이였던 펠릭스와 엘렌은 우연히 묵은 모텔에서 만난 ‘버디’를 비롯한 사람들로부터 둘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버디’가 자기 아이에게 줄 작은 운동화를 통해 느끼는 행복감과 신비로움은,
마지막 문단에서 펠릭스와 엘렌이 실제 둘 사이의 아이에게 사주는 운동화로 현실화된다.
과거의 일탈, 과거의 충격은 현재의 실제와 현재의 행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준비한 작은 운동화와 함께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해 줄께’라는 작은 위트는 과거가 현재속으로, 현재가 과거 속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1년 전의 내 모습... 또는 2년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본다.
중간중간 ‘우연히’ 만난 사람, ‘우연히’ 경험한 사건, ‘우연히’ 가게 된 장소...
어쩌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우연한’ 사람, 사건, 장소,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수록된 7편의 간단한 줄거리 정리

1. <루스>
‘나’는 연극 공연을 위해 떨어져 지내던 오랜 친구인 루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루스의 애인인 라울을 만난다.
루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라울은 ‘나’에게 “너 같은 사람은 내 인생에서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고,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라울로부터 자신이 있는 뷔르츠부르크 행 왕복 기차표와 한 줄의 편지를 받는다. “네가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뷔르츠부르크 행 기차에 오른다.

2. <차갑고도 푸른>
‘세상의 끝’이라는 아이슬란드에서 동거하고 있는 마그누스와 요니나.
마그누스의 베를린 유학시절 알고 지내던 이레네와 요나스가 그들을 방문한다.
단조로우면서도 무미건조하던 아이슬란드에서의 일상을 보내던 요니나는 활기차면서도 솔직한 요나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눈밭에 빠진 차 아래 들어가 바퀴의 눈을 파내면서 요나스와 서로 ‘머리를 맞대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평소에 느끼지 못한 희열을 느낀다.

3. <아쿠아 알타>
부모님은 물의 도시 베니스로 여행을 떠나셨다.
코르시카를 여행하던 ‘나’는 베니스로 부모님을 찾아가 1박 2일을 함께 지내면서(그런데도 잠은 부모님과 다른 호텔에서 잔다.)
부모를 만나러 온 큰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여전히 걱정하는 부모님.
‘아쿠아 알타’ 즉, 가을과 겨울에 물이 범람하여 베니스에 넘치는 것과 같이
서로에 대한 감정은 차오른다... 그리고 그 감정을 나타내기 전에 딸과 부모는 작별을 고한다.

 

4. <뚜쟁이>
연인이었다가 친구가 된 ‘나’와 요하네스는 ‘카를로비 바리’라는 온천휴양도시에서 만난다.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무미건조한 둘 사이의 관계 속에 함께 하기로 한 시간은 지나간다.
돌아가기로 예정된 전날 밤. ‘나’와 요하네스는 ‘벨레 에타지’라는 나이트클럽에 간다.
술과 피곤에 취하여 숙소로 돌아온 ‘나’는 요하네스의 품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다음 날 짙은 안개를 뚫고 집으로 향한다.

5. <단지 유령일 뿐>
미국 횡단여행 중이던 펠릭스와 엘렌은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루를 쉬기 위하여 모텔에 투숙한다.
거기서 그들은 모텔을 운영하는 애니와 유령을 쫓는 여자, ‘버디’라는 한 남자를 만난다.
서로간의 대화가 줄어들고 멀어져만 가던 느낌을 받던 펠릭스와 엘렌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된다.

6. <어디로 가는 길인가>
야콥과 사귀는 중인 ‘나’는 1년 전 연말을 보내기 위해 페터, 미하, 사라와 함께 프라하의 미로슬라브를 방문한다.
해가 바뀌는 3일동안 ‘나’는 프라하에서 이들 네 명과 함께 생활한다.
아무 특별한 일도 없던 단조로운 생활 가운데 ‘나’는 소통의 단절을 느낀다.

 

7.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음악 페스티벌에 초대받고 노르웨이 트롬쇠로 간 오언과 ‘나’.
그러나 페스티벌은 취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구나르란 사람이 운영하는 여관에 묵게 되는데, 여기서 같은 독일인인 마틴과 카롤리네를 만난다.
이들은 함께 지역의 파티에 참여했다가 아리 오스카르손이란 사람과 그의 아내 시카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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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탄생 (반양장) - 대학 2.0 시대, 내 젊음 업그레이드 프로젝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혹시 이어령 선생님이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회식을 기획하셨다는 것을 기획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전세계의 온갖 탈과 가면이 등장한 ‘혼돈’ 이후에...
넓고 넓은 잠실주경기장 한쪽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
소년이 굴리는 굴렁쇠 하나에 전세계가 집중하였고,
‘혼돈’을 정화하는 ‘고요’와 ‘적막’에 대해 그 분위기 하나로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파격과 아이디어를 즐기신 분이 저자인 책이라면,
우선 읽어보아야 할 책 리스트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어령 선생님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 사람이면 꼭 읽어봐야 할 필독서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음의 탄생]... 부엉이가 그려진 표지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부엉이는 잘 알려진대로 지혜의 여신 아테나(미네르바)의 상징인 동물.
헤겔은 그의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어령 선생님이 시대에 뒤처지는 이성이 아닌, 시대를 선도하고 새로운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발견해 내는 이성을 기대하고 쓰신 것이라는 인상을 먼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젊은이’들에게 두고 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젊음의 탄생]에는 카니자 삼각형, 물음느낌표, 개미의 동선, 오리-토끼, 매시 업, 연필의 단면도, 빈칸 메우기, 지(知)의 피라미드, 둥글 별 뿔난 별 등 아홉 가지 매직 카드가 제시되어 있고,
각 카드에 지적 호기심, 지행일치, 목표에 대한 일관된 열정, 진리의 상대성, Cross Over, 절제와 균형, 독창성, 순수하지만 위대한 아마추어적 열정, 세계와 지역의 융화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젊은이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20여년의 나이만 먹으면, 청년기에 진입합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신체적인 나이일 뿐,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청년의 마음을 가지고 살지만,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젊은 나이가 맞나 의심이 갈 정도로 의미없는 일상의 반복과 세파에 찌들어 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젊음이란 그냥 가만히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주위의 이야기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그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의 원융 속에서 발전의 의미를 찾을 때에 비로소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탄생은 산고가 뒤따릅니다. 젊음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젊음의 탄생] 가운데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의 부활과 현상의 상대성을 이야기한 부분을 특히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해내지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지성과 이성의 순수성은 그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에 더욱 빛나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진정한 아마추어의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자본화되어 어떤 것에도 금전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뼈를 깎는 노력으로 만들어낸 노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보호하고 보상이 있어야 하겠으나,
지금처럼 짜깁기를 합법화시키는 레포트를 돈주고 웹상에서 구매하는 행태의 만연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진정한 창조는 독창성에서 나오며, 그 독창성은 관심있는 분야를 즐길 줄 아는 것에서 나온다는 이어령 선생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최소한 대학에서만은 그 ‘즐기는 일’이 상품화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이 책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이어령 선생님은 너무나 좋은 얘기만 써놓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젊음의 탄생]을 읽다보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정말 장밋빛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웹 2.0 시대를 이야기할 때, 분명 이러한 정보인프라에 접근하고 싶어도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즐기는’ 아마추어리즘.... 좋은 이야기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이 현실입니다.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발 한발 나가는 젊은이가 있는 반면, 세상의 고단함과 피곤함을 어쩔 수없이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젊은이도 많습니다.
취직 걱정에, 취직해서도 비정규직이라는 불안감에, 언제 구조조정될지 모르는 불안정성에 대고 ‘꿈을 가져라! 노력해라!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하는 얘기는 뜬구름 잡는식의 이야기입니다.
경제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양극화와 차별이 분명 존재하는 현실에 눈감는다면, 창조하는 ‘지식인’은 될 수 있으되, ‘지성인’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보면서 가장 감동을 주었던 것은 쉴새없이 더듬이를 다듬고 있는 개미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먹이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고,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개미는 그 날, 그 순간을 위하여 자신의 더듬이를 닦으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이란, 그리고 그 개인이 모인 사회의 모습이란 언제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좋은 점, 나쁜 점, 발전할 점, 조심해야 할 점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자신만의 더듬이를 다듬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젊음의 탄생’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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