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일상’이란 것 속에서 살아간다.
일상이란 규칙적, 익숙함, 안정감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반면 지루함, 권태감, 반복성 등과 같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속에 살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잠시나마 그 일상을 벗어나기를 꿈꾸며, 또한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일상을 벗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일탈’이란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일상 속에 살다가 이 일상이 잠시나마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계획한 여행과 같이 의도된 것이기도 하고, 우리의 의도 밖에 있는 우연에 의해서 경험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연에 근거한 일탈은 워낙 순간적이어서 그것이 닥쳐올 때의 느낌을 포착하기가 어렵고,
어느 정도 일탈이 진행되고 난 이후에야 우리는 ‘아! 내가 뭔가 다르게 살고 있구나’, ‘뭔가 다른 것을 경험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상이 예측 가능한 것이라면 일탈은 예측하기 어려운 우연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우연성 때문에 일상이 깨어질 때에는 익숙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뭔가 박진감 넘치는 스릴을 느끼면서 자극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유디트 헤르만은 이와 같은 일상의 틈새를 파고드는 ‘일탈’을 잘 간취하는 작가인 것 같다.
[단지 유령일뿐]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은 일상과 일탈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인물들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7편의 단편은 모두 ‘여행’이라는, 우리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방법으로서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유디트 헤르만은 ‘의도된’ 일탈 과정 중에 순간순간 나타나는 ‘의도되지 않은’ 일탈을 배치하여
이런 우연성에 기반한 일탈이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 친구의 애인을 만나러 떠나고(루스),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며(차갑고도 푸른, 단지 유령일 뿐,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긴 여행을 떠난다(뚜쟁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
그리고 유디트 헤르만은 이런 일탈의 이야기를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그야말로 툭툭 던지며,
메마르고 차갑게, 마치 담배 연기 속에 금방 사라져 가는 듯이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내가 보기에 유디트 헤르만은 7편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일탈이 주인공들에게 단지 그 시점에서는 ‘순간’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일탈이 이후의 주인공의 살아가는 인생가운데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순간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관심이 간 본 작품은 <차갑고도 푸른>, <단지 유령일뿐>, <어디로 가는 길인가>였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인생이란 시간은 선(line)을 따라 단순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가 분리될 수 없고, 서로 뒤바뀔 수 있는 입체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치 이리저리 돌려서 동일한 색상을 만드는 큐브 퍼즐처럼,
일상과 일탈, 또는 예측가능성과 우연성은 서로 맞물려서 현재의 ‘나’란 존재를 형성한다.
일상이 계속되어 쌓일 때, 어느 순간 일탈은 ‘우연’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 내 삶을 흔든다.
그 일탈이 진정되고, 일탈의 변혁성이 사그러질 때,
일탈의 에너지는 다시 일상 속으로 녹아들고, 그 때의 일상은 일탈 이전의 일상에 비해 한 단계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도저히 풀 수 없는 큐브도 결국에는 정확한 순서와 인과관계에 의하여 같은 색상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듯이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차갑고도 푸른>에서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는 ‘현재형’ 시제를 들 수 있다.
현재의 동거인인 마그누스와 딸 수나와 살고 있는 일상을 당연히 현재형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1년전 독일에서 온 요나스 및 이레네와 보낸 5일간의 과거 회상 내용 역시 모두 ‘현재형’으로 처리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일도 ‘요나스는 말했다’가 아니라 ‘요나스는 말한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편은 과거가 현재는 뒤섞여 있으면서 과거의 ‘일탈’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같은 맥락으로 <단지 유령일 뿐>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으리라 생각된다.
사막과 같은 사이였던 펠릭스와 엘렌은 우연히 묵은 모텔에서 만난 ‘버디’를 비롯한 사람들로부터 둘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버디’가 자기 아이에게 줄 작은 운동화를 통해 느끼는 행복감과 신비로움은,
마지막 문단에서 펠릭스와 엘렌이 실제 둘 사이의 아이에게 사주는 운동화로 현실화된다.
과거의 일탈, 과거의 충격은 현재의 실제와 현재의 행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준비한 작은 운동화와 함께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해 줄께’라는 작은 위트는 과거가 현재속으로, 현재가 과거 속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1년 전의 내 모습... 또는 2년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본다.
중간중간 ‘우연히’ 만난 사람, ‘우연히’ 경험한 사건, ‘우연히’ 가게 된 장소...
어쩌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우연한’ 사람, 사건, 장소,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수록된 7편의 간단한 줄거리 정리

1. <루스>
‘나’는 연극 공연을 위해 떨어져 지내던 오랜 친구인 루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루스의 애인인 라울을 만난다.
루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라울은 ‘나’에게 “너 같은 사람은 내 인생에서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고,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라울로부터 자신이 있는 뷔르츠부르크 행 왕복 기차표와 한 줄의 편지를 받는다. “네가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뷔르츠부르크 행 기차에 오른다.

2. <차갑고도 푸른>
‘세상의 끝’이라는 아이슬란드에서 동거하고 있는 마그누스와 요니나.
마그누스의 베를린 유학시절 알고 지내던 이레네와 요나스가 그들을 방문한다.
단조로우면서도 무미건조하던 아이슬란드에서의 일상을 보내던 요니나는 활기차면서도 솔직한 요나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눈밭에 빠진 차 아래 들어가 바퀴의 눈을 파내면서 요나스와 서로 ‘머리를 맞대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평소에 느끼지 못한 희열을 느낀다.

3. <아쿠아 알타>
부모님은 물의 도시 베니스로 여행을 떠나셨다.
코르시카를 여행하던 ‘나’는 베니스로 부모님을 찾아가 1박 2일을 함께 지내면서(그런데도 잠은 부모님과 다른 호텔에서 잔다.)
부모를 만나러 온 큰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여전히 걱정하는 부모님.
‘아쿠아 알타’ 즉, 가을과 겨울에 물이 범람하여 베니스에 넘치는 것과 같이
서로에 대한 감정은 차오른다... 그리고 그 감정을 나타내기 전에 딸과 부모는 작별을 고한다.

 

4. <뚜쟁이>
연인이었다가 친구가 된 ‘나’와 요하네스는 ‘카를로비 바리’라는 온천휴양도시에서 만난다.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무미건조한 둘 사이의 관계 속에 함께 하기로 한 시간은 지나간다.
돌아가기로 예정된 전날 밤. ‘나’와 요하네스는 ‘벨레 에타지’라는 나이트클럽에 간다.
술과 피곤에 취하여 숙소로 돌아온 ‘나’는 요하네스의 품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다음 날 짙은 안개를 뚫고 집으로 향한다.

5. <단지 유령일 뿐>
미국 횡단여행 중이던 펠릭스와 엘렌은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루를 쉬기 위하여 모텔에 투숙한다.
거기서 그들은 모텔을 운영하는 애니와 유령을 쫓는 여자, ‘버디’라는 한 남자를 만난다.
서로간의 대화가 줄어들고 멀어져만 가던 느낌을 받던 펠릭스와 엘렌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된다.

6. <어디로 가는 길인가>
야콥과 사귀는 중인 ‘나’는 1년 전 연말을 보내기 위해 페터, 미하, 사라와 함께 프라하의 미로슬라브를 방문한다.
해가 바뀌는 3일동안 ‘나’는 프라하에서 이들 네 명과 함께 생활한다.
아무 특별한 일도 없던 단조로운 생활 가운데 ‘나’는 소통의 단절을 느낀다.

 

7.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음악 페스티벌에 초대받고 노르웨이 트롬쇠로 간 오언과 ‘나’.
그러나 페스티벌은 취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구나르란 사람이 운영하는 여관에 묵게 되는데, 여기서 같은 독일인인 마틴과 카롤리네를 만난다.
이들은 함께 지역의 파티에 참여했다가 아리 오스카르손이란 사람과 그의 아내 시카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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