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하멜른
케이스 매퀸.애덤 매퀸 지음, 이지오 옮김, 오석균 감수 / 가치창조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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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하멜른]은 피리부는 사람의 쥐떼 소탕과 어린이 실종 전설을 배경으로 하여,
중세 봉건제도의 하에서의 농노들의 가슴 아픈 생활, 정의와 자비의 양립, 가족과 사회성원으로서의 의미 등
만만치 않은 소재와 주제들을 버무린 흥미진진한 역사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다.

가혹한 영주의 수탈로 아버지가 병들고,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된 요하네스는 피리 길드의 장인들을 만나 도제로 들어간다.
몇 년 후 하멜른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쥐떼를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하네스.
그는 정의와 자비를 상징하는 다색옷을 입고 하멜른에 도착하게 되고,
쥐떼와 영주들의 압제에 고통당하는 민중들과, 민중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흥청망청 즐기며 혈세를 낭비하는 지도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쥐떼를 소탕하면 받기로 되어 있는 사례금 금고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하멜른 시의  시장의 딸인 클라라와 함께 정체불명의 자객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우선 이 책은 무척이나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기에 좋은 책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지고지순한 가치로 믿어 온 것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충돌하며,
또 어떻게 변형되고 반박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은 무한신뢰와 무한애정의 관계로 흔히 생각하지만,
때론 아들은 아버지를 무능하게 여기고, 아버지는 아들을 무시하거나 학대한다.
이런 이중적 부자관계는 반역자 안셀름에게서도, 바우어와 슈트롬 사이에서도, 그리고 주인공인 요하네스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리고 사례금을 받지 못하게 된 요하네스가 주장하는 부정부패에 대해 ‘정의’로운 심판에는
‘자비’가 빠져 있어서 융통성 없는 원리원칙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엄청난 재산을 갖춘 영주이면서 하멜른 시의 부시장이란 명예를 얻은 바우어의 이면에는
농노들을 착취하고 시민의 재산을 횡령하여 결국엔 스스로를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은 악마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길드와 시민사회의 갈등, 자매 사이의 갈등, 중세의 계층과 계급 사이의 차별 등이 하멜른에서의 닷새 동안 펼쳐진다.

하멜른을 황폐화시킨 쥐떼의 정체와 본질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가장 가까운 가족 내에서 싹튼 미움과 분노, 자비와 애정이 없는 정의,
지위와 명예를 이용한 착취와 수탈 등이 하멜른을 뿌리부터 갉아먹고,
결국에는 그들의 미래인 어린 아이들조차도 앗아가 버린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모든 하멜른 시민들과 피리 악사들의 화해와 축제라는, 겉으로 보기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여전히 찜찜한 그 무엇인가가 남아 있었다.
바로 사라진 아이들은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었고,
그래서 하멜른의 축제 뒤쪽에는 미래를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슬픔 속에 있는 부모와 그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의 어떤 모습이 하멜른의 쥐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 쥐떼가 우리를 뿌리부터 갉아먹고, 결국에는 우리의 미래까지도 가져가 버리는 날이 오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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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 효종.현종실록 - 군약신강의 나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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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나 좋아하고 아끼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권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만화라고 무시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나온 조선왕조에 대한 어떤 입문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에 빠져서 IMF로 어려웠던 시절에 직장까지 그만두고 사료와 씨름한 작가의 마음가짐과 준비한 공력 때문일 것이다.

이번 13권은 조선의 16대, 17대 왕이었던 효종과 현종실록을 다룬다.
이 두 왕은 ‘북벌(효종)’과 ‘예송논쟁(현종)’이라는 뚜렷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실록과 기타 사료를 검토하고 난 후 효종의 북벌이 실제로 추진되었다기 보다는 하나의 구호적인 성격과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효종은 군사에 관심이 많았고, 다양한 군사제도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효종의 군사개혁은 청을 정벌하려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침입이 있을 경우 임진왜란 때와 같은 장기항전 및 게릴라전을 염두에 두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효종이 북벌을 표방한 것은 적장자였던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이후 효종이 평생동안 낙인처럼 지니고 있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송시열을 중용한 것도 역시 당대 주류 사대부들인 산림(山林) 세력의 지지를 얻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다분히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고 보고 있다.

현종 당시의 예송논쟁은 이후 숙종에서부터 정조시기까지를 관통한 ‘당쟁’이 본격화된 사건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예송논쟁은 왕이 직접 당쟁의 중심에 서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시도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종대의 예송논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효종과 그 왕후가 죽은 후 입어야 할 상복의 기간을 두고 치열한 예학의 해석논쟁과 더불어 일어났다.
하지만 작가도 지적하듯이 상복을 입는 기간은 전시대에도 온갖 편법이 난무하였던 문제였고, 또한 각 당파의 주장에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점에서 논쟁의 결과가 완전한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 되어 버린 예송논쟁은 분명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효종의 북벌과 현종의 예송논쟁은 이제는 조선사회에서 왕권에 대한 신권의 우위가 돌이키기 어려운 대세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태종이나 세조, 연산군이 노력했던 신권을 지배하는 왕권이나 세종이 노력했던 왕권과 신권의 조화와 균형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기가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왜란과 호란, 인조반정 등을 거치면서 나타난 왕권의 무력함과 및 간관제도와 상소로 대표되는 성리학 사상으로 무장한 산림세력의 자신감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이 시대를 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시점에서 보수회귀와 근본주의적 편협함이 나타났고, 종국에는 이것이 국력의 약화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왕권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대부 지배체계 역시 무력함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였고, 그런 점에서 서서히 의식과 물질기반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중소상인들과 일부 농민들의 역할이 중요해 지는 시기였다.
하지만 결국 이 시대의 흐름은 ‘소중화(小中華)’를 강조하고, 경전의 문구 하나에 치중하여 상대편을 몰락시키는 보수적 근본주의로 회귀하고 말았다.
청나라는 서양 각 국가들과, 일본은 네덜란드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화로의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조선은 중화중심를 심화시켜 가고 있었다.
이제 당쟁은 건전한 붕당정치라기 보다는 문구 하나하나로 꼬투리를 잡아 ‘너죽고 나살기’ 방식의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조금만 더 융통성을 가진 지배체제가 이루어졌더라면, 수권 집단의 타협이란 새로운 정치문화가 창출되었더라면, 기층 민중들의 의식이 좀 더 각성하였더라면 하는 등등의 생각을 가져보지만....
결국 역사에서 가정이란 하나의 결과론이며 아쉬움의 표출 이상이긴 어려운 것 같다.

다행이었다고 느낀 점은 김 육과 같은 정치인이 있어서 ‘대동법’이라는 민중중심적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점 정도일까.
그나마도 기득권 세력의 반대로 전국적인 실행은 그 후로도 한참 후인 숙종 시대나 되어야 하니, 더욱 답답함을 느낄 뿐이었다.

이제 현종의 시대까지 가고, 아마도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장 많은 소재가 되었을 ‘장희빈’이 등장하는 숙종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예송 논쟁을 통해 지배계급의 주류였던 서인 세력과 만년 야권이었던 남인 세력의 본격적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당쟁을 통해 당시 조선의 지배계급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영조/정조시기에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다음 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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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이빨 1
제이디 스미스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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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이 태어나서 잘 자라다가 어느 때가 되면 밤에 자다가 갑자기 깨어 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가 돋아나는 아픔 때문이라고 한다.
살갗에 가시만 하나 박혀도 불편하고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갓 태어난 아기의 입속 생살을 뚫고 딱딱한 이빨이 나고 있으니 얼마나 아프고 불편하겠는가.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은 제목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지만,
마치 새로운 이빨이 돋을 때의 아픔과도 같은 소설이다.
[하얀 이빨]은 런던의 준빈민지역에 거주하는 두 가족, 즉, 영국인 아치 존스와 그의 전우인 방글라데시인 사마드 익발 가족의 이야기이다.
아치 존스는 자메이카 출신의 클라라와 결혼했으니 소위 말하는 ‘국제결혼’을 한 셈이며, 사마드 익발은 멀고먼 방글라데시에서부터 런던까지 흘러들어왔으니 ‘이민1세대’인 셈이다.
이야기는 이들이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었고, 또 어떻게 각자의 아내들과 만나 결혼했으며, 각자의 자녀들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인간의 오만함과 신의 뜻에 따른 바벨탑의 혼란이 원인이 되었든,
아니면 지리적인 산맥과 강, 바다로 가로막힌 환경의 제약조건이 되었든,
어쨌거나 인류는 유사한 정서와 언어, 생활공간을 지닌 사람들끼지 공동체를 형성해 왔고, 그 공동체만의 문화적 특수성을 발달시켜 왔다.
이제 전세계가 melting pot처럼 하나의 공간화, 지구촌화되어 가고 있는 지금 이들 공동체 간의 화합과 공존은 마치 가지런한 치아가 신체의 건강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인류 전체의 건강함을 담보하는 일차 조건이 된다고 하겠다.

다문화사회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이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어떻게 해서든 적응하며 먹고사는 문제에서만 그치지 않고 매우 복합적인 갈등구조를 가진다는 데에 있다.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사마드 익발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위하여 싸웠고, 그래서 ‘영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자부심은 영국 백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인도 독립운동의 영웅 판디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어떤 경우에라도 이슬람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고향 회귀적’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사마드 익발은 가족 내에서도 세대간 갈등이라는 수직적 갈등을 경험한다.
이민 1세대인 아버지세대와 2세대인 자녀세대 사이에는 세대차이라는 보편적 간격과 함께 전통의 고수 대 새로운 문화로의 흡수라는 문화적 간격을 동시에 내포한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자신의 뜻과 전통의 힘에 따라 살아가길 바라지만, 이미 새로운 사회의 문화로부터 세례를 받은 아들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식에 끊임없는 의문을 던지고 부모세대들에 반항한다.
결국 사마드 익발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슬람 전통에서 멀어지는 두 아들 마기드와 밀라트는 끝내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다.
고급스러운 서양문화에 젖은 마기드와 서양의 밑바닥 문화를 경험한 밀라트 역시 형제 사이의 우애는 저버린지 오래이다.
런던에서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는지 몰라도 차별의 세대 유전과 가족의 해체는 사마드 익발의 정체성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없다.
작가인 제이디 스미스는 이 과정을 톡톡 튀는 언어로, 때론 유쾌해 보이기까지 하는 분위기 속에 그리고 있지만, 그 웃음에는 씁쓸한 고통과 절망, 한탄과 한숨이 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사마드 익발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생존을 위하여 이민의 길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경제적 자리는 잡았으나, 가족 내의 이민 1세대, 2세대, 3세대의 갈등이 상존하고 있는 우리의 교포 사회.
한국 사회 속에서 3D 업종에 근무하나 불법체류 외국인이라는 현실 앞에서 모든 면을 차별당하며 울분을 참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사회.
무슨 이유에서건 한국 사람과 결혼하여 이 땅에 들어와 민족적 차별과 여성의로서의 차별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결혼이주여성들이 아파하는 사회.
어떤 지역은 거주 외국인들로 인하여 슬럼화되어 가고 있지만, 또 어떤 지역은 외국인들의 고급주택이 즐비하게 늘어선 사회.
무엇보다 수도 한 복판과 전국 곳곳에 외국인 군대가 들어와 있고, 그들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

소설의 배경인 영국의 다문화 사회는 19세기 제국주의와 식민화 정책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미국의 다문화 사회 형성 역사 역시 흑인 노예의 역사와 아시아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이주민들의 이주/생존의 역사와 상당 부분 일치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다문화사회의 역사를 써나갈 것인가.
이제 막 새로운 이빨이 나오려는 아픔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가지런하고 조화로운 치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아류 제국주의’로 흐르지 않았으면 한다.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의 고통을 누구보다 아프게 겪은 우리 민족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온갖 차별을 받아왔던 우리가 이제 어느 정도 경제적 위치에 올라왔다고 하여 지금의 우리보다 열등해 보이는 다른 민족과 사람들을 차별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다면 이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잊은’ 모습일 뿐이다.

예전에 나는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걷고, 함께 노래 부르는 세상을 꿈꾸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무척 감명깊게 읽었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님이 [나의 소원]에서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대목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기는 백범 선생님이 원하셨던 대로,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들이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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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장이의 딸 - 상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아고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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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사회적 폭력이나 사회적 억압이 개인에게 어떻게 나타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분명 진보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질 문명은 날로 발달하였고,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 평등의 가치는 최소한 문서상으로는 과거에 비해 잘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진보 뒤에 감추어진 ‘야만’의 역사 역시 아직까지 우리들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의 절반이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은 소위 잘 사는 나라들의 향유물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게 합니다.
또한 인간의 가치가 과연 차별없이 구현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부정적인 답을 여전히 떼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토장이의 딸]은 진보의 역사 속에 숨겨진 야만의 역사를 레베카 슈워트라는 한 여성의 일생을 통해 드러낸 작품입니다.
작가인 조이스 캐롤 오츠는 사토장이라는 하층 계급의 딸이 운명적으로, 사회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세 가지 차별과 폭력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사토장이의 딸’인 레베카 슈워트는 세 겹 차별의 하늘을 지고 태어났습니다.
첫 번째 차별은 역시 유대인이라는 전통적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입니다.
그의 아버지 제이콥 슈워트는 독일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지성인이었고, 어머니 안나는 피아노를 사랑하던 감수성 예민하던 소녀였습니다.
그들은 독일에서 살았다면 안정적인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제이콥은 나치의 탄압으로 고향을 떠나 낯설기만 한 미국에 도착합니다.
뿌리부터 거부당한 슈워트 가문. 그들이 이후로 겪은 비극의 출발점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인 인종 차별에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차별은 사토장이라는, 낮은 사회적 지위에서 발생하는 차별입니다.
전쟁과 차별을 피해 아무런 준비없이 말과 생활이 낯선 새로운 대륙에 찾아온 제이콥 슈워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결국 그는 공동묘지를 관리해야 하는 ‘사토장이’라는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낮은 사회적 지위는 낮은 교육수준, 좋지 않은 환경(나쁜 우물물), 이웃 및 관리들로부터의 멸시와 천대의 원인이 됩니다.
결국에는 나치들이 자신을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강박관념과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제이콥은 엽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아내인 안나까지 죽인 후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해 버립니다.
이 경험은 ‘사토장이의 딸’인 레베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고, 마음 속에 낙인으로 새겨집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아니 인생 전체에서 ‘사토장이의 딸’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가족의 비극적 종말은 그녀의 삶 자체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차별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입니다.
부모님의 비극적 죽음 후 레베카는 호텔 여급으로 살아가다가 나일스 티그너라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티그너와 결혼하여 ‘티그너 부인’이 된 레베카는 곧 남편의 권위의식과 무관심, 폭력을 겪게 됩니다.
아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좋지 못한 환경의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남편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알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남자와 대화 한 마디 했다간 심한 의심을 받아야 했고, 무엇보다 남편의 말에 거슬렀다는 이유로 자신과 아들에게 내려진 극심한 폭력을 경험합니다.

물론 레베카 슈워트는 이 세 겹 차별의 하늘을 걷어내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차별과 멸시의 상징과 같았던 자신의 이름을 ‘헤이젤 존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꿈으로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 아들을 피아니스트로 양육하였고, 자신과 가족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 역시 긍정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레베카 슈워트가 보여준 해피 엔딩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세상의 많은 소수민족, 하층계급, 여성 등 취약계층은 차별의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레베카가 겪어야 했던 차별과 폭력은 사실 몇 십년 전 일제시대에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을 보면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약 60여년간 명목적인 차별은 제도적으로는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문화 속에는, 그리고 우리의 습관적 행태 속에는 임지현 교수가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내면화된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게 됩니다.
가부장적 혈통주의는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단체와 사람들 속에도 성차별의 흔적을 깊게 새겨두고 있습니다.
우리 속의 소수자들인 외국인 노동자들과 결혼이주 여성들에게 과연 우리 사회가 멸시와 차별의 가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승리주의, 승자독식주의에 경도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장애인, 아동, 도시빈민들과 같은 취약계층에게 취하고 있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그들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 외에도 인류에게 소수민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과 탄압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게토와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탄압하였고, 수많은 집시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우생학과 사회생물학 등 당시 최고의 과학을 동원하여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강조한 반면, 그 외의 하급(!) 인종들은 아리아인들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논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치의 모습이 과연 70여년 전 독일에서만 통용되고 사라져 버렸을까요?
얼마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소위 ‘용산참사’는 이런 파시즘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통용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보여줍니다.
법과 질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인간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정당성 획득에 급급하는 모습에서 슬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봅니다.

[사토장이의 딸]을 읽고 우리 현실 속의 억압과 차별의 논리와 더불어 소위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 진보진영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던 인물들과 단체들의 최근 모습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대외적인 억압기제를 깨뜨리는 행동과 더불어 대내적으로 생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계기가 반드시 필요함을 새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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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기사 제대로 읽는 법 - Health Literacy
김양중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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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건강과 웰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통로가 갖추어지면서 소비자들의 정보 접근능력과 정보 생산능력은 몰라보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소비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이용자에게 친화적으로 바뀌어 가는 전반적인 사회흐름에도 불구하고 공급자의 목소리가 여전히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의료이다.
사실 병원과 의사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환자도 의사의 사소한 처방 하나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며,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수많은 정보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료현장에서 소비자의 목소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가?
더 나아가 어째서 소비자가 접하는 의료 관련 정보에서 왜곡이 발생하는가?
저자는 이와 같은 왜곡의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정보 수집 및 제공과 해석 과정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정보 오류(information bias)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과 우리나라 암환자들의 상병 특성과 건강보험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전체 암환자의 생존을 비교하여 의료체계의 우수성을 평가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라거나,
특정 병원의 내원 환자 정보가 마치 전체 환자의 정보인 것처럼 보도되거나,
정보의 원천이 기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응답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수집되거나 하는 것이 이런 오류이다.
하지만 이런 오류들은 사실 아차하여 저지르는 실수일 가능성이 높고, 때론 큰 악의(?)를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치는 수준에서 관대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원인인데, 이는 정보 제공자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불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
병원의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사소할 수도 있는 질병을 과장하거나,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의 기준을 낮추어 의약품 및 서비스 판매를 촉진하거나,
폐경이나 탈모 등 과거에는 질병이 아닌 것들도 ‘질병화’ 시킴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의료서비스를 더욱 많이 이용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특정한 의도에서 발생하는 왜곡은 공공재(public good)로서의 성격을 가져야 할 의료가 사적 이윤의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책의 저자 역시 이와 같은 의료의 영리화와 상업화를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다.
특히 현재 정부가 ‘의료의 선진화’를 이야기하면서 영리의료법인의 허용, 의료채권을 비롯한 의료기관 수익구조의 다변화 등의 일련의 정책도입을 통해 의료 현장에 시장과 자본의 논리를 적용하고자 하는 시점에서 저자의 논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business-friendly를 이야기하고, ‘규제완화’가 마치 지상과제인 것처럼 주장되고 있으나,
과연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의료가 영리보장과 규제완화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최고의 의료수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국민의 건강수준은 떨어지는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질병이나 사고의 위협은 상위 계층의 사람들보다는 취약 계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자주, 그리고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70%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직도 가족 중 1명이 중증질환자라면 모든 가계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상황에서 우리 의료체계의 우선과제는 ‘영리화’ 보다는 다른 것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또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점은 건강은 물론 객관적인 신체 현상의 하나일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푸코의 주장처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측면이 강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 몸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의학에서 개발한 숫자들의 정상범위 안에 들어왔느냐 여부를 가지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 정상범위도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라 전문가라고 하는 의료인들에 의하여 정하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정상범위 안에 있어야만 건강인가?
예를 들어 정상혈압이 120/80이라고 한다. 그럼 내 혈압이 125/85라면? 나는 ‘비정상’이고, 나는 ‘환자’인가?
정상혈압의 범위를 조금만 낮게 잡아도 관련 의약품의 매출량은 그에 연동되어 요동친다. 그렇다면 우리의 건강이란 기준을 누가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월경과 폐경 등은 오랜 옛날부터 여성들에게 특수하게 일어나는 하나의 병리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것이 남성중심 의학이 규정한 여성의 몸에 대한 지배와 질병규정이라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어쨌든 [건강기사 제대로 읽는 법]을 통해 건강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실재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성과였다.
그 안에는 전통적인 인술(仁術)의 논리 뿐만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서부터 전근대적인 권위의 논리까지 다양한 논리가 들어 있다.
누가, 어떻게 건강을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건강의 기준은 달라지고, 그에 따른 정책의 우선순위도 달라져 왔다.
결국 우리가 우리 몸의 주체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하여여 함은 물론이고,
건강을 위협하고, 우리 몸의 주체성을 왜곡시키는 사회적 요인에 제대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이제 이런 몸의 주체성 회복 노력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시작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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