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장이의 딸 - 상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아고라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적 폭력이나 사회적 억압이 개인에게 어떻게 나타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분명 진보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질 문명은 날로 발달하였고,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 평등의 가치는 최소한 문서상으로는 과거에 비해 잘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진보 뒤에 감추어진 ‘야만’의 역사 역시 아직까지 우리들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의 절반이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은 소위 잘 사는 나라들의 향유물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게 합니다.
또한 인간의 가치가 과연 차별없이 구현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부정적인 답을 여전히 떼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토장이의 딸]은 진보의 역사 속에 숨겨진 야만의 역사를 레베카 슈워트라는 한 여성의 일생을 통해 드러낸 작품입니다.
작가인 조이스 캐롤 오츠는 사토장이라는 하층 계급의 딸이 운명적으로, 사회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세 가지 차별과 폭력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사토장이의 딸’인 레베카 슈워트는 세 겹 차별의 하늘을 지고 태어났습니다.
첫 번째 차별은 역시 유대인이라는 전통적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입니다.
그의 아버지 제이콥 슈워트는 독일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지성인이었고, 어머니 안나는 피아노를 사랑하던 감수성 예민하던 소녀였습니다.
그들은 독일에서 살았다면 안정적인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제이콥은 나치의 탄압으로 고향을 떠나 낯설기만 한 미국에 도착합니다.
뿌리부터 거부당한 슈워트 가문. 그들이 이후로 겪은 비극의 출발점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인 인종 차별에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차별은 사토장이라는, 낮은 사회적 지위에서 발생하는 차별입니다.
전쟁과 차별을 피해 아무런 준비없이 말과 생활이 낯선 새로운 대륙에 찾아온 제이콥 슈워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결국 그는 공동묘지를 관리해야 하는 ‘사토장이’라는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낮은 사회적 지위는 낮은 교육수준, 좋지 않은 환경(나쁜 우물물), 이웃 및 관리들로부터의 멸시와 천대의 원인이 됩니다.
결국에는 나치들이 자신을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강박관념과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제이콥은 엽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아내인 안나까지 죽인 후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해 버립니다.
이 경험은 ‘사토장이의 딸’인 레베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고, 마음 속에 낙인으로 새겨집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아니 인생 전체에서 ‘사토장이의 딸’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가족의 비극적 종말은 그녀의 삶 자체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차별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입니다.
부모님의 비극적 죽음 후 레베카는 호텔 여급으로 살아가다가 나일스 티그너라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티그너와 결혼하여 ‘티그너 부인’이 된 레베카는 곧 남편의 권위의식과 무관심, 폭력을 겪게 됩니다.
아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좋지 못한 환경의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남편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알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남자와 대화 한 마디 했다간 심한 의심을 받아야 했고, 무엇보다 남편의 말에 거슬렀다는 이유로 자신과 아들에게 내려진 극심한 폭력을 경험합니다.

물론 레베카 슈워트는 이 세 겹 차별의 하늘을 걷어내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차별과 멸시의 상징과 같았던 자신의 이름을 ‘헤이젤 존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꿈으로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 아들을 피아니스트로 양육하였고, 자신과 가족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 역시 긍정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레베카 슈워트가 보여준 해피 엔딩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세상의 많은 소수민족, 하층계급, 여성 등 취약계층은 차별의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레베카가 겪어야 했던 차별과 폭력은 사실 몇 십년 전 일제시대에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을 보면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약 60여년간 명목적인 차별은 제도적으로는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문화 속에는, 그리고 우리의 습관적 행태 속에는 임지현 교수가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내면화된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게 됩니다.
가부장적 혈통주의는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단체와 사람들 속에도 성차별의 흔적을 깊게 새겨두고 있습니다.
우리 속의 소수자들인 외국인 노동자들과 결혼이주 여성들에게 과연 우리 사회가 멸시와 차별의 가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승리주의, 승자독식주의에 경도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장애인, 아동, 도시빈민들과 같은 취약계층에게 취하고 있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그들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 외에도 인류에게 소수민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과 탄압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게토와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탄압하였고, 수많은 집시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우생학과 사회생물학 등 당시 최고의 과학을 동원하여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강조한 반면, 그 외의 하급(!) 인종들은 아리아인들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논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치의 모습이 과연 70여년 전 독일에서만 통용되고 사라져 버렸을까요?
얼마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소위 ‘용산참사’는 이런 파시즘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통용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보여줍니다.
법과 질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인간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정당성 획득에 급급하는 모습에서 슬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봅니다.

[사토장이의 딸]을 읽고 우리 현실 속의 억압과 차별의 논리와 더불어 소위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 진보진영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던 인물들과 단체들의 최근 모습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대외적인 억압기제를 깨뜨리는 행동과 더불어 대내적으로 생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계기가 반드시 필요함을 새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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