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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 평전 - 유교의 전제에 맞선 중국 사상사 최대의 이단아
옌리에산.주지엔구오 지음, 홍승직 옮김 / 돌베개 / 2005년 4월
평점 :

이 지(李 贄). 호를 탁오(卓吾)라 했던 그의 평전의 원래 제목은 [중국제일 사상범(中國第一 思想犯: 이지전(李贄傳)]이다.
사상범! 우리 현대사에서 무척이나 익숙한 단어이다.
군사독재시설,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이루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사상범’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탄압한 것이 불과 20여년 전의 일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가 지금부터 400여년 전인 중국 명(明) 말기 이탁오라는 사람에게 붙여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기에?
"나는 어릴적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정작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공자를 존경하지만, 공자의 어디가 존경할 만한지 알지 못한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가 짖은 까닭을 묻는다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
“나는 따라짖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이탁오의 통렬한 자기반성이자, 현대의 ‘나’에게도 뼈아프게 다가온 말이었다.
공자에게서 시작한 유학은 맹자를 거쳐 정호‧정이 형제를 거쳐 송(宋)의 주희에 의하여 집대성된다. 그리고 이탁오가 살았던 명나라 말기. 주자학은 정통성을 독점하고 주자와 다른 해석들은 모두 이단으로 배척하는 지위에 오른다.
이탁오는 이러한 앎의 독점과 사상의 교조화에 따른 편협한 정통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였고, 이 때문에 혹세무민의 죄목을 얻어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격렬하고 치열하게 살아서였을까.
그가 남긴 책 제목 역시 보통 비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과격한(?) 주장을 담은 책들로 인해 피비린내가 일 것을 예상했는지, 그는 자신의 책에 ‘불태워 버릴 책’이란 뜻의 ‘분서(焚書)’, ‘숨겨야 할 책’의 ‘장서(藏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책은 명, 청 시대에 가장 유명한 금서였고, 신해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논란 가운데 정당한 평가를 얻는다.
[이탁오 평전]은 중국 사상사의 이단아였던 한 개인의 평전일 뿐만 아니라,
쇠락해 가던 대제국 명나라의 사회상과 당대 지성의 실상을 아는 데에도 유용하게 읽힌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말단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부패하고 무능했는지,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란 것이 얼마나 민중의 생활과 동떨어져 있었는지, 그래서 그 지배사상이란 것이 얼마나 무기력하면서도 잔혹했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송나라 주희를 기준으로 그 이전의 유학과 그 이후의 유학을 나눌 정도로 유학사상사에서 주자의 사상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격물치지를 통해 얻은 사물의 이(理)를 인간의 본성(性)으로 환원시킨 ‘성즉리(性卽理)' 주장은 ’사물의 이치=마음의 본성‘으로 이해되면서 일원적 관념론으로 빠져든다.
이것이 그냥 한 명의 학자, 또는 하나의 학파의 사상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리라.
문제는 이 일원적 관념론이 절대화되어 다른 사상은 모두 천박하고 저질이며, 오직 주자의 사상만이 고귀하여 유학의 정통성이 주자에게 계승되었으므로 그 정통성을 고수해야 한다는 소위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로 발전하여 사회를 장악했다는 점이었다.
주자를 비판한다는 것은 곧 그 사회를 부정하는 큰 일탈이었으며,
주자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은 곧 ‘혹세무민’의 죄를 의미했다.
수많은 학자들이 단지 ‘주자와 다른 주장이다’라는 이유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을 당해야 했고, 때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아야 했다.
나는 이 책, [이탁오 평전]을 보면서 그가 당시 사회체계와 지성계의 어떤 점을 그렇게 맹렬하게 비판하였는지, 또 왜 그에게 ‘중국 사상사 최대의 이단아’란 호칭이 붙었는지 어렴풋 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이탁오는 무엇보다 앎의 전제(專制)를 비판했다. 앎의 전제는 하나의 앎, 하나의 해석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그 이외의 앎과 해석은 배척하는 사상의 독점인 것이다.
물건의 독점은 필연적으로 가격을 올리고 품질을 낮춘다.
마찬가지로 사상의 독점은 앎의 생명력을 죽이고 지식을 교조화시킴으로서 다양한 입장의 존립 자체를 거부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앎의 독점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와 손쉽게 결합하여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세뇌시킨다는 점이다.
앎의 독점이란 결국 획일화가 아닌가. 지식의 획일화는 사람들을 통치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삶에 만족하게 하는 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이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지배층은 절대 권위의 지식을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외우고 따르기만 할 것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 시대처럼 절대 권위의 지식이 ‘과거(科擧)’란 이름으로 출세의 수단이 되어 버리면 소극적으로는 ‘정답을 달달 외워서 아름다운 문장으로 포장된’ 허울뿐인 지식만이 남게 되거나, 적극적으로는 어떤 반대편의 주장, 어떤 다양한 생각도 인정하지 않는 ‘낙인찍기’의 도구로 변질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성인의 말씀’이란 허울 속에 교조화되고 전제화된 앎에 대해 이탁오가 얼마나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지 보자.
“만약 반드시 공자로부터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면, 천고 이전 공자가 없을 때는 끝내 사람이 될 수 없었단 말인가?”
“하늘이 한 사람을 태어나게 했으면 당연히 그 사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폐기하고, 모두가 공자에게 복종케 하고, 그를 따라 그대로 말해야 한다고 하는가?”
이탁오 사상의 비판지점으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앎의 무용성이다.
이는 아마도 이탁오 본인의 경험에서 생겨난 것이리라.
그는 어릴 때부터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 추위 속에서 살아야 했고, 말단 관리 생활 가운데 뇌물이나 청탁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급기야는 3남 4녀 중 딸 하나를 남기고 모두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떴으며, 특히 둘째 딸과 셋째 딸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비극을 맞았다.
(칼 마르크스와 무척이나 비슷하지 않은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던 그에게 현실 생활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앎은 단지 화려한 언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기존 지식을 달달 외워 출세한 관리들의 무능함과 부정부패는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모습인 것이다.
입으로 ‘인의’와 ‘도덕’을 내세우는 자들은 오로지 입만 살았을 뿐,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 한끼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을 실제 몸으로 겪은 이탁오는 철저하게 ‘공리주의’ 입장에서 허울뿐인 도덕론을 공격한다.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인륜이요 만물의 이치이다. 옷 입고 밥 먹는 것을 제외한다면 인륜도, 만물의 이치도 없다.”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억누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입고 먹는 것을 떠나 ‘인륜 물리(人倫物理)’가 어떻다는 둥 논하는 것은 바로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기존 지식의 무용성에 대한 비판은 무능한 관료집단 및 지배집단인 향신(鄕紳)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주희의 주장대로) 하늘이 곧 이라고 치자(天卽理).
그러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바로 ‘이(理)’에 제사 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理)’는 사람마다 똑같이 지니고 있는데, 왜 오직 황제만 ‘이(理)’에 제사 지낼 수 있다는 것인가? 일반 백성은 왜 ‘이(理)’, 즉,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나?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국가의 대규모 제사 규범으로 백성의 재산을 크게 축내고 백성의 노동력을 동원한다.
만약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 곧 ‘이(理)’에 제사지내는 것이라면, ‘이(理)’가 있는 것이 ‘이(理)’가 없는 것만도 못하지 않은가!”
황제는 곧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로 자처하던 시대.
지금 봐도 위험천만해 보이는 이런 주장을 이탁오는 당시 지배계급 앞에서 서슴지 않는다.
하늘이 있어 백성의 재산을 축내고, 백성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라면 그 하늘은 차라리 없다는 것이 낫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대역죄에 해당할 위험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이탁오를 위해 변호하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그를 ‘극단적 개인주의자’, ‘이기주의자’로 보는 입장이다.
이런 비판의 근거는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자기의 길을 고집하는 것, ‘자기를 위하는 것’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비판은 이탁오의 주장 표면만을 파악한 것이다.
사실 유교 문화가 뿌리내려 온 중국 사회는 줄곧 사회 질서를 강조하여 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나사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은 사회 질서를 위한 윤리 관계 내에서 생활하면서, 이 관계 준칙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 천리에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윤리 관계라는 것이 공공연한 불평등원칙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 질서를 수호하고 조화와 안정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오직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여기서 개인은 ‘낮은 지위’, ‘억압받는 지위’에 있는 개인이란 점이 문제이다.
부모관계에서 (부모가 아닌) 자식, 군신관계에서 (군주가 아닌) 신하, 부부관계에서 (남편이 아닌) 아내, 형제관계에서 (형이 아닌) 아우,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관리가 아닌) 백성이 희생해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군주, 부모, 남편, 형, 관리의 압박을 순종하며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윤리 관계와 사회 질서 뒤에 숨겨진 논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지향’은 실상 엄청난 허위성과 잔혹성을 가진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자기를 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길을 가는 데 힘쓴다”는 이탁오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겠는가?
그의 개인 본위와 개인 행복 지상주의는 현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며, 억압하고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탁오의 주장은 윤리 본위와 ‘사회 지향’의 유교 국가에서 부처와 노자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이단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탁오 평전]을 읽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했던 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2009년 대한민국’에 그의 비판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의 비판을 거울 삼아 우리나라의 정치, 현대사, 학계의 모습을 비추어 보라.
앎과 사상의 독점은 우리 사회에서 무수한 ‘공산주의자’와 ‘빨갱이’를 양산해 왔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인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교묘히 자극함으로서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상충되는 주장에 대해 붉은색을 덧칠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무한반복되고 있는 전략 아닌가.
이들에게 좌파란 말그대로 중도를 기준으로 한 진보적 집단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식의 감정적 반공의식에 호소하여 타도해야 할, 국가와 민족의 적(敵)일 따름이다.
때문에 이런 ‘빨갱이’들의 위협 앞에서 개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행복추구의 자유와 권리는 간단하게 무시된다.
지금 정부는 ‘실용’이라는 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지만,
그 실용의 열매는 과연 누구의 배를 불리고 있으며, 살아갈 공간 한 뼘조차 얻기 힘들어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답으로 돌아오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탁오 역시 그가 살고 있었던 종법적 봉건제도라는 시대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좌충우돌식 강단과 고집은 인간관계에 서툰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현재와 같은 민주주의나 공화정을 지향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백성을 가난에 빠뜨린 원인이 사상의 독점에서 나온 무용지물에 불과한 지식과 지배층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원인 진단과, 실질적이고 다양한 앎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종법적 봉건질서가 지배하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탁오는 지금부터 400여년 전, 우리나라도 아닌 중국(명나라)에서 살다 간 사람이었다.
그 때의 주장이 지금 우리 사회에 적용되어 수많은 ‘21세기 한국의 이탁오’를 양산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건 나의 생각이 지나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