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샘깊은 오늘고전 10
방현희 지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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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표류한 일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의 표해록(漂海錄).
이 책은 지금부터 500여년 전인 1488년 ‘최 부’라는 조선 선비가 제주도 인근 바다에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 남부 해안 지역까지 표류한 후 천신만고 끝에 강남 지역과 북경을 거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6개월의 일을 기록한 책이다.

알마에서 ‘샘깊은 오늘 고전’ 시리즈로 펴낸 [표해록]은 완역본은 아니며,
대체로 초등학교 고학년 또는 중학생 정도의 독자들에게 적합하게 다듬어져 있다.
물론 아이들 대상의 편집본이라고 하여 그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당시(조선 성종 연간) 주위 세계와 성리학적 세계관,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조선 선비의 인식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성인들이 읽어도 당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생사의 갈림길에 서면 자신에 대한 제어력을 잃기 쉬운 법이다.
그런데 최 부는 몇 차례나 생사의 갈림길을 넘어들면서도 스스로를 다잡고, 조선 사대부로서의 기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마음이 급박한 상황에서 풍랑을 만나 생사가 위태롭던 상황,
겨우 중국 땅에 당도하여 위기를 넘기나 싶더니 해적을 만나고,
중국 군사들에게 왜구로 오인받아 목이 날아갈 뻔한 상황.
지금처럼 통신시설이 발달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역만리 떨어져 기약없이 돌아갈 날만 기다려야 할 상황.
이렇게 그는 바다에서 생명을 건졌다 뿐이지, 그 생명을 지탱해 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그는 침착하게 일행을 이끌어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기지와 순발력을 발휘하여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는가 하면,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태도를 보여 중국인들로부터 감탄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나는 [표해록]을 보면서 최 부란 한 선비로부터,
아니, 최 부로 대표되는 조선전기 사대부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역시 생사가 급박한 바다 위에서 보여준 놀라운 판단이다.
풍랑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한 일행은 마실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상태에서 바다 한가운데에서 모두 탈진 상태에 이른다.
이 때 나온 귤 몇 개!!!
최 부는 관리라는 입장에서, 지배계층(사대부)이라는 입장에서 이 귤을 독식했을까? 배에 탄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우리들은 모두가 한 나라 사람으로 그 정은 한 핏줄과 같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이 귤과 술은 한 방울이 천금과 같으니 네가 이를 맡아 배에 탄 사람의 절박한 목마름을 풀어주는 것이 좋겠다.”

그는 이 소중한 귤의 사용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고,
‘입술이 타고 입이 마른’ 심각한 상태의 사람들에게 주도록 하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만 남은 상황에서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니...
만약 그가 자신의 계급적 우위를 주장하여 귤을 독점하여 하였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작은 배위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발생하여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또 하나 인상깊었던 장면은 수차(水車)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최 부는 북경을 향해 가면서 갑자기 동행한 중국 관리에게 수차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물이나 퍼올리는 수차에 선비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몰라 묻는 관리에게 답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는 논이 많은데 자주 가뭄이 든다오.
만약 수차 제작법을 배워 우리 백성에게 가르쳐 준다면 농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마치 그로부터 300여년 후에 나타난 실학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의,
당시 사대부로서는 놀라운 성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관리 역시 수차에는 문외한이었던지 ‘형태와 돌리는 방법을 대략’ 듣기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쉬울 지경이다.

이런 것이 조선 전기 사대부들이 가졌던 기본 소양이고 자신감이었나 보다.
아쉽다면 이런 진취적이고 실사구시적인 사대부들의 소양이 그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연산군 치세부터 일어난 사화는 사대부들의 건전한 성장과 진출을 막았고,
(최 부 역시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귀양끝에 처형당했다)
그 직후 일어난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성리학 일변도의 이념만이 강조되어 새롭고 진취적인 풍토의 진작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표해록]을 보면 자꾸 그런 생각이 겹친다.
조선 초기 훈구파의 실용적이면서도 우리 문화에 대해 가졌던 자신감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사림파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수되어 ‘실사구시’와 ‘지조’가 함께 살아숨쉬는 조선사회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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