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지금까지 내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게 해 준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작가가 두 명 있다. 바로 코난 도일 경과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이다.
셜록 홈즈가 펼친 추리가 주는 재미는 그다지 길지 않은 나의 독서 경력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으며,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이 보여준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통찰은 놀라운 간접 경험이었다.
특히 크리스티 여사는 등장인물의 말 한 마디와 배경설명에 아무렇지도 않게 중요한 단서를 뿌려 놓는 것에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그녀의 능력은 같은 작품을 2-3번씩 재독하게 만든다.
추리소설이란 것이 범인과 트릭을 알게 되면 급격히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은 천천히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을 때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보물찾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런 ‘보물찾기’에도 한계가 있다.
결국에는 작가가 정해준 하나의 길, 즉, 범인과 트릭이 정해진 길을 다시 따라간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포와로나 미스 마플이 지명하는 사람을 범인으로 단정하며, 트릭을 그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혹시 여기에 허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피에르 바야르의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이런 점에 착안한다.
그의 작업은 크리스티 여사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길로 들어가 새로운 보물을 캐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크리스티 여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스포일러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유명하다.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아마도 누구나 ‘범인은 누구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내가 그 범인을 맞춰보겠다’라는 의욕에 차서 독서를 시작할 것이다.
물론 잘 맞출 때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은 의외의 범인과 트릭이 주는 반전에 경탄하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아둔함(?)을 탓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독자들은 무의식 중에 절대 범인일 수 없는 두 명을 빼고 생각한다.
바로 수사를 행하는 탐정과 이를 기록하는 화자이다.

크리스티 여사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이러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버렸다.
그녀의 설정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는 당대에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분분하여 롤랑 바르트나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학자들까지도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피에르 바야르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에서
크리스티 여사가 뒤집어 놓은 고정관념을 다시 한 번 전복시킨다.

피에르 바야르는 질문한다. ‘과연 에르큘 포와로가 지목한 범인이 진짜 범인인가?’
그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한다. 진범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셰퍼드 의사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포와로의 ‘망상’의 산물이며,
독자들은 크리스티 여사가 창조한 기가 막힌 반전에 감탄하느라 포와로가 펼친 추리의 허점을 깨닫지 못하고 낚여 버린 것이다.
크리스티 여사가 창조한 추리소설에 대한 또 하나의 추리소설이 탄생한 셈이다.

물론 로저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당연히 근거가 있어야 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먼저 추리소설(특히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소설들)에서 어떻게 범인을 숨기고 독자들을 속이는가를 분석한다.
그는 여기서 특히 ‘생략’의 기법에 초점을 맞춘다.
작품 상의 화자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지만, ‘모든(!)’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전공(정신분석학)을 살려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망상’과, 그 망상이 소설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크리스티 여사의 다른 작품들인 [끝없는 밤], [커튼] 등이 함께 검토되며,
정신분석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역시 하나의 텍스트로서 다루어진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두 군데 있는데,
첫 번째는 역시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진범을 밝혀내는 마지막 장이다.
하지만 누가 진짜 범인인지 여기서 말하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그 몫은 각자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피에르 바야르가 독자들에게 도전한 ‘추리소설’이니 말이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부분은 [커튼]과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비교하는 부분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커튼]은 포와로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으로서, 여기서 포와로는 악마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던 피해자를 살해한다.
살인마를 죽여 앞으로의 살인을 막았으니 포와로의 동기는 순수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법과 정의의 수호자로 자리매김되어 있던 포와로가 살인죄를 범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포와로의 오랜 친구인 헤이스팅즈 대위 역시 부지불식간에 살인을 범한다.
결국 독자들이 추리소설에서 그토록 신뢰하여 마지않던 두 사람, 즉, 탐정과 화자가 과정이야 어떻든 모두 살인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통찰에 감탄했다고 적었다.
수많은 추리소설 속에서 그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미움, 질투, 욕망 등이 살인이라는 극단의 행동으로 표출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인 살인자이다!!!’
다만, 이성의 힘이 그것을 억누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섬뜩하리만치 냉정한 크리스티 여사의 인간 평가와 세련된 추리소설 기법이 만나서 추리소설사에 빛나는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에 더하여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와 같은 새로운 시도를 만나게 되었으니 더욱 즐겁다.

왕년에 크리스티 여사의 광팬으로 자처하며 그녀의 소위 ‘빨간 책’을 모으고 다녔던 입장에서 피에르 바야르의 시도는 신선하고 흥미진진했다.
보통 하나의 문학작품에 ‘텍스트’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고착화되고 정형화된 하나의 해석방법, 또는 무비판적인 작품 수용을 지양하고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키는 해석상의 ‘담론’을 도구로 하여
‘열린’ 해석방법을 적용하고 작품을 해체함으로써 그 이면에 숨겨진 진정한 논리와 구조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바라건데, 이와 같은 원작이 주는 고착성과 권위에 도전하여 그것을 ‘텍스트’로서 해체하고,
새롭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시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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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영국을 가리켜 ‘CCTV의 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영국 전역에 설치된 CCTV 수는 약 400만대로서, 아침에 집을 나와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자신도 모르게 수천번 사진이 찍힌다고 할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영국이 이렇게 CCTV 천국이 된 원인 중 하나가 무척이나 마음 아픈 한 사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93년 리버풀의 한 쇼핑센터에서 ‘제임스 버거’라는 두 살 난 남자아이가 실종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아이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들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영국 범죄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영국을 CCTV 천국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조나단 트리겔의 소설 [보이 A]는 바로 이 ‘제임스 버거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년 범죄의 진면목을 조금 다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소설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보이 A]는 가해자 입장에서 범죄와 그 범죄 이후를 그려 냅니다.

열 살 난 여자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14년간 복역한 소년 A.
그는 복역을 마치면서 ‘잭’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어 세상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직장과 집을 얻고, 친구와 애인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간절했던 것들을 손에 넣을수록 그의 불안감과 죄책감은 깊어집니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폭로하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감정이었죠.
어느 날 잭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한 여자아이의 생명을 구합니다.
잭은 영웅이 되었지만, 그동안 집요하게 교도소에서 나온 소년 A의 행방을 쫓은 미디어에 의해 감춰왔던 과거가 드러납니다.
범죄로 얼룩진 그의 과거 앞에 친구들과 애인은 차갑게 돌변하였고, 세상은 잭을 밀어내기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선택은....

뭐라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법률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본다면, 죄의 값을 감옥에서 치러낸 사람은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그를 대하는 것에 어떤 차별이 없어야 정상이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내가 사는 동네에 아동살해범이나 아동성폭행범이 형기를 마치고 살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아마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사법당국에 항의할 것이고, 지역주민 거의 대부분은 그를 배척할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도 그러한 사람을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없습니다.
[보이 A]는 이런 인간의 모순되지만 당연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태도에 문제를 던집니다.

주인공인 잭은 과거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물론 열 살밖에 되지 않았던 여자아이를 죽인 범죄는 분명 작은 것이 아니었고, 그러한 범죄행위는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어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주위의 친구들 및 애인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도 힘들게 얻은 직장, 친구, 애인과 같은 작은 행복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저는 잭이 친구를 위하여 폭력배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싸우는 모습,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음 직전에 처한 한 여자아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잭에게 더 이상 ‘아동살해범’이란 낙인을 찍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심정적 용서를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히 그의 과거 잘못이 밝혀져 다시 사회로부터 매장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믿을 수 없는 기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는 고귀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무너뜨리는 파렴치범들에 대해 사회로부터 영원한 격리를 주장하는 논리가 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사회로 복귀하고자 하는 범죄자의 인권까지도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또는 가해자의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무슨 잘못을 범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교화敎化를 목표로 하는 교정대책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서 국가와 사회가 운영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이 점에서 범죄자 교정에 대한 국가나 종교의 역할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피해자의 가족에게 성인군자의 용서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만약 가족이 그런 범죄의 피해를 입었다면 도저히 그 범인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고, 나아가 법적으로든 개인 차원에서든 복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정주체(국가 및 종교)는 가해자에게 적합한 벌을 내리는 것과 아울러
그가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는지, 그래서 사회로 복귀했을 때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여 이 사회와 이웃들을 위한 삶을 살아 죄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을지 제대로 평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가족에게 절대 요구할 수 없는 냉정하고 효과적인 교정정책, 그리고 ‘천부인권’이란 보편적인 관점에 입각한 인권 개념을 교정정책에 실현해 줄 것을 국가와 종교에 바라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가 그토록 끔찍한 살해를 당했다면’ 하는 상상만으로도 소름끼쳐 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가 바로 그 살해자였다면’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자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은 가해자 소년들을 사악하기 그지없는 악마로 여겼다(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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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박스 세트 - 전2권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던 소설이었습니다.
이제 ‘신윤복은 사실 여성이 아닐까?’라는 의문은 마치 ‘정조는 독살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처럼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의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공중파 TV를 통해 방송된 드라마의 힘도 한 몫 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원래 미스터리가 있는 책은 결과와 반전을 알게 되면 읽는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지만,
이 소설은 충격적인 반전(이제는 반전이라 말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상식’처럼 알고 있으니..)을 읽기 전에 미리 알고 있음에도 흥미롭습니다.
이 흥미로움의 힘은 역시 우리 옛 그림이 직접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자신을 창조해 낸 화가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으로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름을 접한 것이 언제였을까 생각해 보면, 교과서가 떠오릅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라는 이름과 흐릿한 컬러 도판의 그림이었죠.
[바람의 화원]은 이렇게 막연하게 ‘조선 후기 풍속화가’라고 뭉뚱그려 암기해야 했던 두 화가를 허구의 소설 형식이지만 생생하게 되살려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워낙 작은 도판으로 실려서 배경과 인물을 구별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대체 뭘 그린 것인지도 모르던 교과서 그림의 틀을 뛰어 넘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읽는 방법, 그리고 그 그림에 얽혀 있을 화가의 뒷이야기를 자유롭게 상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허구를 본질로 하는 소설에 깐깐하게 ‘역사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바람의 화원]이 불러 일으킨 열풍은 그야말로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작년에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혜원 신윤복의 작품 전시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습니다. 매년 간송미술관을 가보는데, 그렇게 길게 줄을 늘어선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의 화원]이 결과를 알고 봐도 재미있는 소설이 된 것에는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이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작가가 초점을 맞춘 혜원 신윤복의 매력, 즉, 형식적 틀을 벗어나는 ‘파격’의 매력이 아닌가 합니다.
영조와 정조 시대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로서 새로운 문화의 분위기가 넘쳐 흐르던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쟁을 겪으면서 성리학적 세계관은 과도한 관념성과 배타성으로 인해 그 허구성을 역력하게 드러낸 반면,
중인 이하 계층의 의식 성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기 시작하던 생산력과 맞물려 전혀 새로운 시대로의 발전의 맹아를 보였습니다.

[바람의 화원]의 김조년으로 대표되는 중인 출신 거상들,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에 등장하는 새로운 기술과 생산량 증대는 모두 이 시기의 사회적 사실들입니다.
또한 실학파實學派로 대표되는 사상적 흐름은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혁신과 새로운 풍조는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예술, 미술에 부여된 소명이었을 겁니다.
이 시대 문화적 생산과 소비는 향유 주체에서부터 형태와 기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전에 없이 다양했고, 이는 종래의 상투적 화법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내용은 그것을 담아낼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거리에서, 일터에서, 우물가에서 건강함을 표출하던 민중을 과감히 소재로 끌어온 단원과,
전통적 화풍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소재를 파격적인 빛깔로 형상화한 혜원은
모두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조금도 모자람 없이 감당한 것입니다.

[바람의 화원]의 독자들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천재의 혁신적이면서도 파격적인 그림 대결을 보면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파격과 혁신이 주는 신선함,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끊임없이 그와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파격의 주인공 혜원 신윤복이 누구였는지 역사상 전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윤복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3원 3재’ 중에 넣어서 말하지만,
사실 국가기관인 도화서 화원이었던 단원을 제외한 혜원의 삶에 대한 기록은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혜원에 대해서는 사료상의 기록은 물론이고, 동시대 인물의 증언조차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그림과 이름만 남은 천재화가.
[바람의 화원]은 그 천재화가의 일생을 ‘신윤복은 남장여자였다’라는 충격적인 추정을 곁들여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물론 [바람의 화원]은 어디까지나 허구인 픽션으로서,
‘신윤복은 여성’이라는 것은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지만,
한 시대 예술의 새로운 나아갈 길을 제시한 위대한 선조의 모습과 그 작품 속에 행복한 독서가 되었던 책이었습니다.

뱀꼬리 1
책 속에 하나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정조가 단원과 혜원으로 하여금 어진을 그리게 할 때, 자신을 ‘짐’이라고 호칭합니다.
제가 알기로 ‘짐’은 황제의 호칭이며, 황제 아래 군왕을 칭했던 조선의 임금은 ‘짐’이란 호칭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극이나 실록에는 모두 ‘과인’으로 표기되는 데 작가가 ‘짐’이라고 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뱀꼬리 2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옛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단원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의 그림 [기노세련계도]을 꼭 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몇 년 전 한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받았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었는데, 이미지를 찾아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정말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그림의 소재는 개경(개성) 송악산 아래에서 잔치하는 장면인데,
1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그려놨는지, 넋을 놓고 그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꼭 한 번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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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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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므 파탈(Homme Fatale)도 반복하면서 진화하는 것일까요?
모파상의 [벨아미]의 주인공 조르주 뒤루아에게는 쇼데를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발몽 자작과 스탕달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의 그림자가 겹쳐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태양의 고도가 낮아질수록 그림자는 길어지는 법.
조르주 뒤루아에게서 나온 그림자 길이는 앞의 두 사람에 더하여 한층 늘어나 보입니다.

발몽 자작은 메르테유 후작부인과 결탁하여 순수한 사랑을 농락하는 인물입니다. 이 시기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직전이었죠.
줄리앙 소렐은 출세를 위해 여러 여성을 이용하고 버립니다. 이 시기는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이 몰락한 직후 왕정복고의 반동시대입니다.
조르주 뒤루아 역시 출세를 위하여 사랑까지도 수단화하는, 그러면서도 심판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합니다. 이 시기는 19세기 후반, 세계대전의 씨앗을 배태한 제국주의가 극성기를 향해 치닫던 시대입니다.

발몽 자작에서 조르주 뒤루아까지, 약 100년의 시대는 프랑스 역사에서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시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진보와 변화의 물결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앙시앙 레짐의 구습은 청산되지 못한 채로 심심찮게 반동의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한 시대의 도덕과 철학이 부침을 거듭하는 시기일 뿐 아니라,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그의 3부작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로 넘어가는 순수자본주의의 난숙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쇼데를로 라클로, 스탕달, 모파상 등 프랑스의 대문호들은 나란히 옴므 파탈을 등장시켜 ‘사랑’, ‘우정’, ‘정절’, ‘순수’와 같은 소위 인류가 추구해 온 최고의 가치들을 비웃고 완벽하게 허상화시켜 버립니다.
이것은 과거의 가치와는 전혀 새로운 가치를 반영한 인간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3명의 옴므 파탈들이 점점 더 ‘자본주의적’인 탐욕을 반영하는 인간으로 진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발몽 자작은 육체적 쾌락을 즐기면서 사랑과 정절이 가지는 허점을 비웃었지만, 기본적으로 순수한 사랑에 약한, 어떻게 보면 낭만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줄리앙 소렐에게서는 (마지막에 순수한 사랑을 깨닫는 듯한 장면이 나오지만) 상류층 여성들을 통한 출세와 신분상승이라는, 다분히 목적의식적인 인생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모파상이 시대정신의 담지자로 그려낸 벨아미, 즉, 조르주 뒤루아는 두 사람과 다릅니다.
그에게는 발몽 자작과 줄리앙 소렐이 추구한 쾌락과 출세라는 가치는 물론이고, 거기에 물질적 부와 세속적 정치권력이라는 새로운 욕구가 추가됩니다.
모파상은 냉정하게 제국주의 시대 속에 나타난 제국주의적 가치를 반영한 인간성의 변화를 그려낸 것입니다.
[벨아미]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알제리 전선에서 전역한 조르주 뒤루아는 빈한한 생활을 보내다가 친구 포레스티에의 호의로 신문사에 입사합니다.
그는 기자로 활동하면서 신분상승과 명예, 재산과 권력, 육체적 쾌락을 얻기 위하여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매너로 주위의 여성들(주로 유부녀들)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하는 바가 이루어졌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사귀던 여자를 버리고 새로운 욕구 충족에 가능한 여자를 찾아나섭니다.

그런데 모파상은 결코 조르주 뒤루아의 악행과 탐욕, 여성편력을 꾸짖거나 경멸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타락한 주인공에게 하늘이 내리는 천벌과 같은 ‘권선징악’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안이한 결론으로 이끌어 나가지도 않습니다.
사랑이니, 정절이니, 순결이니 하는 전통적인 미덕의 상실에 안타까워 하지도 않습니다.
모파상은 <미덕과 악덕>, <정절과 불륜>, <선행과 악행>, <좋은 일과 나쁜 일>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로 양자를 동일한 거리에 두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이유는 첫째 그가 그려낸 조르주 뒤루아는 당시 시대에는 보편성을 획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 시대의 미덕과 선행이란 것이 그다지 순수한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악덕과 악행이란 것에도 개인과 사회의 진실된 본질이 들어있다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시대가 만들어 놓은 ‘벨아미’, 아니, 그 시대 자체인 ‘벨아미’에게 도덕적 판단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러한 인물, 그러한 시대가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전혀 새로운 것으로 다시 진화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지요.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앙시앙 레짐이, 그리고 대혁명 자체가,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조르주 뒤루아의 마지막을 상상해 보는 것도 책을 보는 재미가 될 것 같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의 끝은 어디일까요?
책에서는 어쨌거나 조르주 뒤루아는 일차적인 꿈을 이룬 것으로 책이 종결됩니다.
재산과 권력을 가진 왈테르 사장의 사위가 된 것이죠.
여전히 연인인 마렐 부인과의 밀회에서 얻을 육체적 쾌락도 함께 그리면서 말이죠.

그런데 모파상 이후 프랑스 문학에서 이런 옴므 파탈을 그려낸 작가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조르주 뒤루아까지 진화해 온 옴므 파탈이 더 이상 진화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죠.
물론 이러한 인물을 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자연주의’라고 하는 문예사조의 퇴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조르주 뒤루아란 인물로 대치될 수 있던 프랑스 제국주의의 몰락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탐욕의 결정체라 할 20세기 초반 제국주의의 극성은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계대전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그 전쟁에서 독일군에 의해서 참혹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물론 전쟁은 프랑스가 속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짓밟힌 그들의 자존심과 명예는 아마 영원히 복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후는 곧 조르주 뒤루아가 맞을 종말의 모습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레마르크가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치열하게 묘사했던 전선의 모습,
지옥도에서 뒹굴며 살아야겠다는 기본적인 욕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모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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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알라딘’이란 인터넷서점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혹시나 내가 찾는 중고책이 나와 있지 않을까 해서이고,
또 하나는 ‘로쟈의 저공비행(http://blog.aladin.co.kr/mramor)’이란 블로그를 둘러보기 위함이다.

인터넷 서평 중에 우연히 이 블로그를 처음 방문했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한 마디로 그 때의 느낌을 말하자면 ‘경탄과 좌절’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의 분야를 가리지 않는 박학함에 놀랐고, 그 지식을 풀어낸 글에 반했다.
그야말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블로그의 페이퍼들을 넘겨가고 있었는데,
결국 좌절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신은 불공평하구나!”

하여튼 내게 존경심과 좌절감을 동시에 안겨준 양반의 책이 나온다니 적잖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지만,
출간 초부터 너무도 빵빵한 언론의 지원을 보며 느낀 정체모를 당혹스러움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책에 손이 가는 것을 멈칫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블로그는 뻔질나게 드나들며 눈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벼르던 책을 이번에야 붙잡고 읽어보게 되었는데,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개인적으로 일단 손에 잡은 책은 반드시 끝까지 읽는 독서스타일인데,
그 때문인지 책을 평가하는 개인적인 기준 역시 딱 한가지이다.
즉, 다 읽은 후에 또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느냐, 두 번 다시 던져놓고 다시 볼 마음이 안 드느냐의 기준 뿐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당연히 전자에 포함된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재독 욕구를 자극한다.

목차에 따르면 책은 다섯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나는 마음대로 양단해 버린다.
하나는 예술에 대한 논의(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에 대한 논의나 김훈‧김규항‧고종석 등의 문체에 대한 논의, 번역에 대한 논의 등등)이며,
다른 하나는 현대 세계에 대한 해석과 실천에 대한 논의이다.

예술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김기덕 감독이나 김훈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꾸준히 영화를 즐기고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흥미롭게 읽어내려갈 것이다.
반대로 그의 세상에 대한 논의는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어야 하고,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내 수준에서는 불가능했다.
니체, 라캉, 벤야민, 데리다 등의 굵직한 사상가들에서부터 슬라보예 지젝에 이르는 근현대 사상가들과 현실 사회를 연결하여 진행되는 논의를 보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으나,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차례 고민하고 다시 읽도록 하였다.

멋대로 생각해 본다.
현대 사회의 구성과 동인(動因), 변화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목해 보아야 할 사건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9.11, 이라크 전쟁을 꼽고 싶다.
소련의 해체와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어쨌거나 인류가 지향해 왔던 이데아 가운데 하나가 무너진 것이었고,
9.11 사건은 절대강자 미국에 도전한 가소로운(?) 집단의 테러를 통해 세계의 구성과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야말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라크 전쟁은 현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야말로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으면서 위의 세 가지 사건과 사상적 편력을 바탕으로 로쟈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가 활용한 단어와 문구를 그대로 차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2) (특히 젊은 층에게) 자유란?
3) ‘내가 나인 것이 기적’이다? 그럼 이 시대의 기적은?
4)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며, 정의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그럼 정의가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5) ‘레닌으로 돌아가자’ 지젝은 말한다. 레닌이 실패한 것, 레닌이 잃어버린 기회란 과연 무엇일까? 자본주의가 기생하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 아니면 정치경제의 혁명적 폭력?

어느 것 하나 손쉽게 답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로쟈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숨겨둔 것은 아니겠으나, 아둔한 머리로 간취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힌트를 얻었다면,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신선하게 보았던 부분이 다음과 같은 4개의 글이었다.

1) 네 번째 글인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
나는 여기에 소개된 콘찰로프스키의 자유에 대한 인터뷰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2) 여섯 번째 글인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김규항의 글에 대한 비판 중에 동의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로쟈의 비판이 힘을 잃을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3) 열여섯번째 글인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
데리다의 해체가 어떤 것인가를 흥미롭게 보았다. 아울러 그의 법과 정의에 대한 생각도 흥미로웠다. ‘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명쾌한 말이었다.
4) 스물다섯번째 글인 <레닌주의와 대중 유토피아>
지젝이 언급한 ‘레닌’의 효용, 즉, ‘사고 금지’의 상황을 중지시킬 강력한 자유라는 측면에서의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분명 매력적인 말이다.
하지만 3)에서도 언급한 정의와 힘, 또는 폭력의 관계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은 글, 너무 말랑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글’이 선정기준이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쉽지 않았다.
물론 한 번에 나름대로 이해한 글도 있었고, 흥미롭게 읽어내려간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최소한 두 세 번씩 반복하여 읽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읽고서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태반이라는 것!!!)

이 책의 모태가 되는 블로그의 이름(로쟈의 저공비행)에,
그리고 책의 부제에(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에 공히 ‘저공비행’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저공비행은 말 그대로 비행기가 아주 낮은 고도를 비행하는 것.
그렇다면 로쟈는 대중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또 한 번 멋대로 생각을 해 본다.
비록 지공비행이 격추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블로그를 소중히 생각하여 응원을 보내며, 오늘도 즐겨찾기에 등록해 놓은 그의 블로그로 발길을 옮긴다. 내공이 딸려 댓글하나 못다는 눈팅족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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