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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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므 파탈(Homme Fatale)도 반복하면서 진화하는 것일까요?
모파상의 [벨아미]의 주인공 조르주 뒤루아에게는 쇼데를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발몽 자작과 스탕달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의 그림자가 겹쳐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태양의 고도가 낮아질수록 그림자는 길어지는 법.
조르주 뒤루아에게서 나온 그림자 길이는 앞의 두 사람에 더하여 한층 늘어나 보입니다.

발몽 자작은 메르테유 후작부인과 결탁하여 순수한 사랑을 농락하는 인물입니다. 이 시기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직전이었죠.
줄리앙 소렐은 출세를 위해 여러 여성을 이용하고 버립니다. 이 시기는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이 몰락한 직후 왕정복고의 반동시대입니다.
조르주 뒤루아 역시 출세를 위하여 사랑까지도 수단화하는, 그러면서도 심판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합니다. 이 시기는 19세기 후반, 세계대전의 씨앗을 배태한 제국주의가 극성기를 향해 치닫던 시대입니다.

발몽 자작에서 조르주 뒤루아까지, 약 100년의 시대는 프랑스 역사에서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시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진보와 변화의 물결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앙시앙 레짐의 구습은 청산되지 못한 채로 심심찮게 반동의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한 시대의 도덕과 철학이 부침을 거듭하는 시기일 뿐 아니라,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그의 3부작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로 넘어가는 순수자본주의의 난숙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쇼데를로 라클로, 스탕달, 모파상 등 프랑스의 대문호들은 나란히 옴므 파탈을 등장시켜 ‘사랑’, ‘우정’, ‘정절’, ‘순수’와 같은 소위 인류가 추구해 온 최고의 가치들을 비웃고 완벽하게 허상화시켜 버립니다.
이것은 과거의 가치와는 전혀 새로운 가치를 반영한 인간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3명의 옴므 파탈들이 점점 더 ‘자본주의적’인 탐욕을 반영하는 인간으로 진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발몽 자작은 육체적 쾌락을 즐기면서 사랑과 정절이 가지는 허점을 비웃었지만, 기본적으로 순수한 사랑에 약한, 어떻게 보면 낭만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줄리앙 소렐에게서는 (마지막에 순수한 사랑을 깨닫는 듯한 장면이 나오지만) 상류층 여성들을 통한 출세와 신분상승이라는, 다분히 목적의식적인 인생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모파상이 시대정신의 담지자로 그려낸 벨아미, 즉, 조르주 뒤루아는 두 사람과 다릅니다.
그에게는 발몽 자작과 줄리앙 소렐이 추구한 쾌락과 출세라는 가치는 물론이고, 거기에 물질적 부와 세속적 정치권력이라는 새로운 욕구가 추가됩니다.
모파상은 냉정하게 제국주의 시대 속에 나타난 제국주의적 가치를 반영한 인간성의 변화를 그려낸 것입니다.
[벨아미]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알제리 전선에서 전역한 조르주 뒤루아는 빈한한 생활을 보내다가 친구 포레스티에의 호의로 신문사에 입사합니다.
그는 기자로 활동하면서 신분상승과 명예, 재산과 권력, 육체적 쾌락을 얻기 위하여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매너로 주위의 여성들(주로 유부녀들)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하는 바가 이루어졌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사귀던 여자를 버리고 새로운 욕구 충족에 가능한 여자를 찾아나섭니다.

그런데 모파상은 결코 조르주 뒤루아의 악행과 탐욕, 여성편력을 꾸짖거나 경멸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타락한 주인공에게 하늘이 내리는 천벌과 같은 ‘권선징악’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안이한 결론으로 이끌어 나가지도 않습니다.
사랑이니, 정절이니, 순결이니 하는 전통적인 미덕의 상실에 안타까워 하지도 않습니다.
모파상은 <미덕과 악덕>, <정절과 불륜>, <선행과 악행>, <좋은 일과 나쁜 일>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로 양자를 동일한 거리에 두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이유는 첫째 그가 그려낸 조르주 뒤루아는 당시 시대에는 보편성을 획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 시대의 미덕과 선행이란 것이 그다지 순수한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악덕과 악행이란 것에도 개인과 사회의 진실된 본질이 들어있다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시대가 만들어 놓은 ‘벨아미’, 아니, 그 시대 자체인 ‘벨아미’에게 도덕적 판단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러한 인물, 그러한 시대가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전혀 새로운 것으로 다시 진화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지요.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앙시앙 레짐이, 그리고 대혁명 자체가,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조르주 뒤루아의 마지막을 상상해 보는 것도 책을 보는 재미가 될 것 같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의 끝은 어디일까요?
책에서는 어쨌거나 조르주 뒤루아는 일차적인 꿈을 이룬 것으로 책이 종결됩니다.
재산과 권력을 가진 왈테르 사장의 사위가 된 것이죠.
여전히 연인인 마렐 부인과의 밀회에서 얻을 육체적 쾌락도 함께 그리면서 말이죠.

그런데 모파상 이후 프랑스 문학에서 이런 옴므 파탈을 그려낸 작가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조르주 뒤루아까지 진화해 온 옴므 파탈이 더 이상 진화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죠.
물론 이러한 인물을 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자연주의’라고 하는 문예사조의 퇴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조르주 뒤루아란 인물로 대치될 수 있던 프랑스 제국주의의 몰락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탐욕의 결정체라 할 20세기 초반 제국주의의 극성은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계대전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그 전쟁에서 독일군에 의해서 참혹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물론 전쟁은 프랑스가 속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짓밟힌 그들의 자존심과 명예는 아마 영원히 복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후는 곧 조르주 뒤루아가 맞을 종말의 모습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레마르크가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치열하게 묘사했던 전선의 모습,
지옥도에서 뒹굴며 살아야겠다는 기본적인 욕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모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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