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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영국을 가리켜 ‘CCTV의 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영국 전역에 설치된 CCTV 수는 약 400만대로서, 아침에 집을 나와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자신도 모르게 수천번 사진이 찍힌다고 할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영국이 이렇게 CCTV 천국이 된 원인 중 하나가 무척이나 마음 아픈 한 사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93년 리버풀의 한 쇼핑센터에서 ‘제임스 버거’라는 두 살 난 남자아이가 실종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아이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들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영국 범죄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영국을 CCTV 천국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조나단 트리겔의 소설 [보이 A]는 바로 이 ‘제임스 버거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년 범죄의 진면목을 조금 다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소설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보이 A]는 가해자 입장에서 범죄와 그 범죄 이후를 그려 냅니다.
열 살 난 여자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14년간 복역한 소년 A.
그는 복역을 마치면서 ‘잭’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어 세상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직장과 집을 얻고, 친구와 애인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간절했던 것들을 손에 넣을수록 그의 불안감과 죄책감은 깊어집니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폭로하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감정이었죠.
어느 날 잭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한 여자아이의 생명을 구합니다.
잭은 영웅이 되었지만, 그동안 집요하게 교도소에서 나온 소년 A의 행방을 쫓은 미디어에 의해 감춰왔던 과거가 드러납니다.
범죄로 얼룩진 그의 과거 앞에 친구들과 애인은 차갑게 돌변하였고, 세상은 잭을 밀어내기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선택은....
뭐라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법률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본다면, 죄의 값을 감옥에서 치러낸 사람은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그를 대하는 것에 어떤 차별이 없어야 정상이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내가 사는 동네에 아동살해범이나 아동성폭행범이 형기를 마치고 살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아마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사법당국에 항의할 것이고, 지역주민 거의 대부분은 그를 배척할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도 그러한 사람을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없습니다.
[보이 A]는 이런 인간의 모순되지만 당연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태도에 문제를 던집니다.
주인공인 잭은 과거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물론 열 살밖에 되지 않았던 여자아이를 죽인 범죄는 분명 작은 것이 아니었고, 그러한 범죄행위는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어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주위의 친구들 및 애인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도 힘들게 얻은 직장, 친구, 애인과 같은 작은 행복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저는 잭이 친구를 위하여 폭력배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싸우는 모습,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음 직전에 처한 한 여자아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잭에게 더 이상 ‘아동살해범’이란 낙인을 찍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심정적 용서를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히 그의 과거 잘못이 밝혀져 다시 사회로부터 매장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믿을 수 없는 기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는 고귀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무너뜨리는 파렴치범들에 대해 사회로부터 영원한 격리를 주장하는 논리가 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사회로 복귀하고자 하는 범죄자의 인권까지도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또는 가해자의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무슨 잘못을 범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교화敎化를 목표로 하는 교정대책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서 국가와 사회가 운영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이 점에서 범죄자 교정에 대한 국가나 종교의 역할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피해자의 가족에게 성인군자의 용서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만약 가족이 그런 범죄의 피해를 입었다면 도저히 그 범인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고, 나아가 법적으로든 개인 차원에서든 복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정주체(국가 및 종교)는 가해자에게 적합한 벌을 내리는 것과 아울러
그가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는지, 그래서 사회로 복귀했을 때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여 이 사회와 이웃들을 위한 삶을 살아 죄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을지 제대로 평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가족에게 절대 요구할 수 없는 냉정하고 효과적인 교정정책, 그리고 ‘천부인권’이란 보편적인 관점에 입각한 인권 개념을 교정정책에 실현해 줄 것을 국가와 종교에 바라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가 그토록 끔찍한 살해를 당했다면’ 하는 상상만으로도 소름끼쳐 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가 바로 그 살해자였다면’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자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은 가해자 소년들을 사악하기 그지없는 악마로 여겼다(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