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죽었다
셔먼 영 지음, 이정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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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2007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25퍼센트가 일 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국민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 권정도이고, 성인 열 명 중 네 명은 한 달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책맹(冊盲)이다.




<사례 2>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는 백과사전 출판사가 고용하는 수많은 조사원이나 작가를 고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의미의 출판을 하지 않음에도 30만개의 항목과 9천만 개의 낱말에 대한 사전을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참고로 백과사전의 대명사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겨우(!) 8만 5천 개의 항목과 550만개의 낱말로 이루어져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마추어라 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와 전문가인 [브리태니커]의 정확성 차이는 크지 않으며,

오히려 오류 수정은 위키피디아가 훨씬 더 빠르다는 점이다.




<사례 3>

"신문보다 인터넷" 중진 작가들의 온라인 진출 - 박범신의 [촐라체],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SBS 2008년 3월 5일 뉴스)




셔먼 영은 "책은 죽었다!"라고 용감하게 선언한다.

책이 죽다니!!! 아무 것도 읽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문자중독증인 나에게 책이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을 잘 읽어가다 보면 "책은 죽었다"라는 용감하면서도 무모하고 충격적인 말이

사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어미를 가진 두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는 말 그대로 "책은 죽었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평서형 어미이다.

이건 위의 <사례 1>에서 보듯이 책을 읽지 않는 현실, 그 때문에 작가나 출판사에 닥친 불황 등등...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책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둘째는 "책은 죽어야 한다"라는 의무를 나타내는 어미이다.

[책은 죽었다]에서 셔먼 영의 일관된 주장이면서 주제는 책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 말은 책이 가진 외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인 셔먼 영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1) 책은 2장 이상의 종이에 잉크로 내용을 인쇄하고, 그것을 묶은 물건이다. 따라서 책의 본질은 그 안에 품고 있는 '사상'에 있으며,

 이 '사상'은 '책 문화'를 형성하고 전달한다.

 2) 따라서 이 사상이 있어야만 책이며, 사상이 없는 책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안티 책(anti-book) '이다.

 3) 그런데 문제는 요즘 사람들이 책은 읽지 않고, 읽는다고 해봐야 이런 '안티 책'만을 읽는다는 점이다.

 4) 왜? 정보가 필요하면 인터넷이 훨씬 빠르고, 즐거움은 TV가 주는 것이 더 재미있으며, 어딘가에 몰입하고 싶으면 게임만한 것이 없다.

 5) 게다가 출판환경조차 좋지 못하다. 책을 내는 일은 비용이 적지않게 드는 일이지만, 요즘과 같은 세태에서 '책팔아 먹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6) 그러므로 책은 이제 본질적인 변화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책의 외형을 죽이는 것이다"




책은 결국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정보가 '감동'의 형태를 가지든 '실용'의 형태를 가지든 '지식'의 형태를 가지든, 그리고 그 정보가 쓸모 있는 것이든 쓸모 없는 것이든 책이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그 정보(본질)가 사물(외형)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을까? 쉽게 말해 책 속의 정보를 '책'이라는 껍데기를 통하지 않고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보가 사물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보라. 요즘 '음악'이란 정보를 얻기 위해 CD나 LP를 누가 사는가?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지 않는가?

그리고 누구나 음악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린다. 음반회사를 찾아가거나 CD나 LP로 만들 필요도 없다. 본인이 즐기면서 본인이 만든 것을 아주아주 손쉽게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

아직 책이란 외형적 물체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점점 기술이 발달하면서 책의 형체가 없는 e-book이나 audio book의 사용도 증가한다.

아직까지는 책의 외형을 좋아하는 보수적인(?) 독자들 덕분에 책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 기술이 더욱 발달하고, 편리성과 접근성이 개선되고 난 이후로 현재 CD나 LP의 운명을 책이 맞이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위의 <사례 2>의 위키피디아처럼 이제 사용자들이 직접 책의 내용을 채워간다.

<사례 3>처럼 작가들이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하고 독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살펴보며 다음 이야기의 방향에 반영한다.




자... 이렇게 책이 외형을 버릴 때, 즉.... 책이 죽을 때 셔먼 영의 '천국의 도서관'은 완성된다.

이제 네트워크가 연결된 곳에서는 누구나 책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절판의 염려도 없고, 책을 보관할 광대한 공간도 필요없다.

책이 헤어지거나 떨어져나갈 염려도 없고, 빌려온 책장 사이에서 정체불명의 머리카락을 발견하여 기분 나빠할 걱정도 없다.

그뿐이랴..

이제 프로슈머(prosumer)가 된 독자들은 쌍방향으로 작가들과 대화하고, 때론 독자들 스스로가 글을 써서 올린다.

이렇게 디지털화 된 책의 세상, 책이 진정으로 죽은 세상. 셔먼 영은 그 세상이 이제 올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상상의 도서관'은 무질서면서도 무한한, 그러면서도 내적 질서를 가지는, 독서가들에게 말 그대로 '천국의 도서관'이었다.

셔먼 영 역시 [책은 죽었다]에서 '천국의 도서관'을 꿈꾼다.

그러나 셔먼 영의 천국의 도서관은 보르헤스의 그것과 '상상'이라는 특징을 빼고는 다르다.

아니, 셔먼 영의 천국의 도서관은 현실이면서 미래라는 점에서 '상상'이라는 특징조차 벗어버렸다.




이 책, [책은 죽었다]의 저자의 주장은 반신반의하게 하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한다.

솔직히 종이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종이책이 좀 더 발전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은 있으나, 지금의 독서문화는 우울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 요즘에 누가 논문이나 보고서를 쓰러 도서관이나 논문자료실을 먼지마시며 뒤지고 다니는가.

신문이나 잡지의 내용은 인터넷 클릭으로 습득하는 세상,

지하철을 타면 게임을 하거나 DMB를 보는 사람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되, 책읽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의 세상.

반대로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 환경은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어서 결국에는 책의 영역도 넘어가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기왕에 책의 외형을 죽일 것이라면 제대로 죽이고, 제대로 책의 사상을 살리는 방향이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상업주의에 빠져버린 출판문화는 책의 외형과 함께 죽어주었으면 한다.

물론 책을 출판한다는 것이 땅팔아서 먹고 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책을 벼락부자로 만들어주는 신통한 제품, 단기간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지는 않았으면 한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책이 좋은 책이며 그렇지 못한 책은 나쁜 책이 된다는 논리,

그렇기 때문에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하여 보이는 좋지 않은 노력, 즉, 지나치게 화려한 홍보나 마케팅, 과열경쟁은 이제 그만하였으면 한다.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책의 내용은 실망스럽기가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그 비용을 고스란히 독자들의 주머니로 환원시키는 모습이 없었다고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저자의 주장에 개인적인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저자가 말한 안티 책(anti-book)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입장이다.

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를 가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책을 선택하고 읽는 데에도 기호의 다양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고상하고 심오한 책들과 세계명작들만 남은 책들의 세계는 오히려 더 삭막하고 숨막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저자처럼 운동선수들의 자서전이나 저자의 명성에만 기대는 책들, 자기계발서, 재테크 책들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의 차이일 뿐, 그와 같은 책들에 책의 발전을 저해하는 ‘안티 책(anti-book)’이란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한 입장 속에는 뭔가 의미를 가진 책에 대한 일종의 우월주의적 사고가 투영된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다.




책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말이 길어진다.

우리나라 출판에 대해서 더 쓸 말은 많이 있지만, 일단 이 정도로 그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도 좋은 책을 쓰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여러 작가분들과,

그 책을 독자들에게 아름답게 전달해 주기 위하여 땀과 눈물을 흘리고 계신 출판계의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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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라무슈
프로메테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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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카라무슈.

즉흥극이 유행하던 시대. 검은 의상을 입고 항상 기타를 들고 나와서 비굴하면서도 허풍 떠는 익살꾼 역할을 의미한다.

지금식대로 간단히 말하자면 '광대'인데, 이들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세상을 비웃으면서도 아무 거리낌없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이들은 중세시대에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곤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바보 광대'이며, 아직도 그 흔적은 트럼프 카드의 '조커'로 남아 있다.

이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안에서 사회적 억압기제가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는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중요한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라파엘 사바티니의 [스카라무슈]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시대적 대전환기의 한 가운데를 살면서,

그 시대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그 시대를 조롱하고자 하였던 한 광대(스카라무슈)의 이야기이다.

앙드레 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원래 냉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으나, 평등과 이상사회를 꿈꾸던 친구가 지배계급이었던 다쥐르 후작의 계략에 빠져 죽은 후 혁명 선동가가 되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는 도망치면서 스카라무슈(일종의 광대) 역할을 하는 배우가 되었다가, 검술 학원을 운영하는 검술 마스터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혁명을 옹호하기 위하여 실제 검을 들고 결투의 복판에 서는 정치가가 되었다.




우선 이 책은 여러가지로 재미있다. 따라서 막힘없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주인공인 앙드레 루이라는 인물의 인생역정이 아주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앙드레 루이대 다쥐르 후작이라는 대결구도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격변기를 살아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귀족들,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에서 당시의 상황을 느끼게 해주는 긴박감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도 하나 기다리고 있어서, 이런 반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선물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한 여러 시민혁명들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지라,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로서의 의미로만 읽히지는 않았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역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일 것이지만, 이 책 역시 나름대로 생각거리를 주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가 다쥐르 후작의 입을 빌려 프랑스 혁명에 대해 가지는 관점을 보여준 부분이었다.

그의 주장은 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웠음에도 그 방법이 폭력적이 되어 혼란과 무질서를 부르고,

결국에는 다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의미없는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결과론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결국은 자본주의 부르조아의 승리, 그들의 지배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을 말한 후작의 이야기는 옳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혼란과 무질서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보는 '혼란'과 '무질서'는 결국 자신이 이때까지 향유해 왔던 지배적 지위에 대한 '혼란'이며 '무질서'이니까...

그래서 그 지위가 민중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날 때,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혼란'과 '무질서'를 말하지 않는가.

민중의 폭력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침묵하던 민중의 손에 무기를 들게 만든 자신들의 폭력과 억압에는 관대하다.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흘려진 피는 정말 안타까운 것이나,

그 피흘림의 일차적인 책임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민과 농민들을 착취했던 귀족계급들과,

귀족들과 야합하여 혁명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출동시켰던 유럽의 봉건군주들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대혁명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몸소 실천한 시민혁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에서 주장했듯이 산업혁명과 '이중혁명'으로 작용하여 봉건주의 종식과 자본주의적 지배권 확립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장을 연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간다면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켰으며', 결국에는 '현대의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듯이

지배계층의 교체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주역인 계층(노동자)의 각성과 등장을 의미하는 일대 사건이었을 수도 있다.




작은 것 같지만, 이런 점에서 [스카라무슈]의 출판사 이름이 '프로메테우스'라는 점도 흥미롭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사회주의권에서 칼 마르크스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 세상에 불을 가져다 주어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열었듯이, 마르크스 역시 '공산주의'라는 불을 통해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추억 하나.

책의 띠지에 "노스탤지어가 샘솟는 최고의 활극소설"이라 한 것은

아마도 한 자루 검에 의지하여 정의와 사랑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활극같은"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경심을 의미한 것이리라.

그런데 개인적으로 [스카라무슈]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엉뚱하게도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로 이어져 있다.

아마 이현세씨의 만화였을 것 같은데 [보물섬] 창간호에는 <<검객 스카라무슈>>라는 만화가 연재되었다.

시대적 배경이야 아직 어린 나이에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멋진 주인공의 멋진 검술 솜씨는 아직도 기억의 한 컷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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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아고라 -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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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진부한 표현이 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표현 속에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어울려 살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다소 도식적인 의미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말이 쉽지, 어떻게 서로 다른 처지와 조건을 가진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고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의 도덕성을 확보한 사회적 강제를 통하여 개인의 삶을 통제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가장 바람직한 것을 개인들간의 자발적인 입장 정리와 통일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론’이 가지는 역사성은 인간이 집단을 이룬 역사와 동일하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의 토론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인 ‘아고라’나 소피스트들이 아테네 청년들에게 가르쳤던 것이 결국은 ‘변론’이었다는 사실,
케사르의 암살을 두고 벌어진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그 유명한 연설 대결.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사상을 담은 책에는 자신의 이상과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토론이 빠짐없이 담겨 있다는 사실 등은 토론의 역사가 얼마나 장구한지를 말해준다.
토론의 역사는 현대 우리사회에도 지속되는데,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토론의 광장은 언제나 수많은 누리꾼들로 북적대며,
[백분토론]과 같은 토론 프로그램은 사안에 따라 유례없는 인기를 누리기도 하고, 출연자가 다음 날 검색순위 1위에 오르기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최소한 표면적으로라도) 군왕과 신하들에게 끊임없는 자기수양과 학습을 요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언로(言路)’ 위주의 정치를 폈던 조선사회에서 치열하면서도 세련된 토론이 없었을 리가 없다. 
이 한의 [조선 아고라]는 ‘조선을 뜨겁게 달군 격론의 순간들’이란 부제를 달고
조선시대의 5가지 토론, 즉, 한성천도 논쟁, 공법실시 논쟁, 제1차예송 논쟁, 제2차예송 논쟁, 문체반정 논쟁의 시초와 진행과정, 결과를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논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알려준다는 지식의 전달 측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몇 년 전부터 ‘말랑말랑한’ 역사서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은 엄청날 정도로 많아졌다.
그렇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 이면에서 지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있는 문화사적 의미를 제시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책에는 그러한 점에서 지은이의 수고와 고민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각 논쟁들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만한 것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다.
한성천도 논쟁: 비과학적인 것, 하지만 여러 사람이 인정하는 것(여기서는 풍수지리)은 판단의 잣대가 될 수 있을까?

공법실시 논쟁: 토지는 누구의 것인가? 왕의 것? 신하의 것? 민초들의 것? 왜 중국과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주나라 정전(井田)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는가?

제1차 및 제2차 예송논쟁: 현실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는 것은 곡학아세(曲學阿世)가 아닐까?

문체반정 논쟁: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정조시대의 개혁은 왜 실패하였는가? 왜 실학은 현실정치에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학문적인 수준에서만 머물렀는가?

이러한 의문점들은 하나씩만으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주기 때문에 여기서 길게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책의 논쟁들을 읽으면서 조선이란 사회가 뒤로 올수록 세련되어지면서도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점만은 지적하고 싶다.
설령 말뿐일지라도 조선 초기에 이상으로 남아 있던 애민, 부국의 가치에서 격식과 형식을 존중하는 가치로, 또 더 나아가 지배층이 보수와 통제의 가치로 돌아서는 과정을 다섯 편의 논쟁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현상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이며, 그렇다고 조선 초기가 긍정적인 사회였냐라고 묻는다면 또다른 길고 긴 논쟁이 될 것 같으니 잠시 여기서는 뒤로 미뤄두었으면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점이 현재에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의 논쟁’에서도 중요하게 생각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나는 토론과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곡학아세(曲學阿世)를 가장 조심하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타인, 우리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쉽다면, 이 책에 소개된 토론들이 모두 ‘국왕과 신하들’이라는 토론상대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쩌면 결국 토론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이 국왕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사회의 정치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예송논쟁에서와 같이 세부적으로는 사대부들 사이의 논쟁이 섞여 있는 것도 있었으나,
국왕중심주의 하에서 어떤 주제든 정치적 토론의 중요한 축은 국왕에게 있었다는 점은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다소 학술적이거나 경제적인 주제에 대한 토론을 하나 정도 소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유학자들(퇴계나 고봉 등)의 논쟁, 불교에 대한 논쟁, 조선 후기 경제적 변화에 대한 실학자들의 논쟁 등도 충분히 다뤄볼 만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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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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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멸의 사랑'....
사랑의 불멸성을 이야기하려면 플라톤의 [향연]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의 향연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랑이야기를 꺼내놓는다.
[향연]의 연설가인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제우스는 신들의 영역을 넘볼 정도로 강력한 인간을 견제하고자 인간을 반으로 쪼개놓는다.
이 쪼개진 양쪽은 한쪽은 남자, 한쪽은 여자가 되어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된 삶을 살게 되며,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을 갈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다.
에로스란 본래 하나였던 몸이 쪼개진 후 그 쪼개진 반쪽을 찾아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인데,
신조차 넘볼 정도로 강한 힘을 인간에게 부여한 것... 그것은 잃어버린 반쪽과 결합하여 완전한 사랑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에로스(사랑)란 원래 상태로의 회복이며, 치유이고, 능력의 원천이며, 힘이 된다.

앤드루 데이비드슨의 [가고일]에는 몇 가지 점에서 소위 '막장'인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잘 나가고 매력적인 포르노 배우이다. 그렇지만, 그의 육체는 마약과 알코올, 시시때때로 애인을 갈아치우는 쾌락에 빠져 있다.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그의 생활은 썩어 있었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막장'이었다.
이 남자는 결국 마약에 취해 운전하다가 전신화상을 입게 되고, 그야말로 끔찍한 외양과 고통스러운 치료과정만을 남기게 된다.
그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성기는 불타는 차 속에서 “심지만 남은 양초”꼴로 타버려서 겨우 흔적만을 남긴다.
그가 신뢰하던 것, 그의 생활의 원천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그의 두번째 ‘막장’이었다.
까맣게 탄 살만 남아서 하루하루를 약물과 고통스러운 치료 속에서 보내던 이 사람... 더욱이 견디기 힘든 것은 육체에 의존하여 살던 사람이 자신의 육체를 잃어버린 데에서 다가오는 절망감이었다.
결국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결심한다. 이것이 그의 세번째 ‘막장’이었다.
이 세 겹 막장 속에서 이 남자의 삶의 결말은 당연히 보였다. 바로 죽음...
이 사람을 누가,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 때 마리안네 엥겔이란 한 여성이 등장한다.
마리안네는 주로 가고일을 조각하던 조각가였는데,
그녀가 가고일을 조각하는 방식이 참으로 특이했다.
몇 날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로 모든 옷을 벗어버린다.
그리고 가고일을 조각할 돌 위에 몸을 밀착시키고 돌 속에 있다는 ‘가고일’을 일깨운다.
그녀가 가고일을 조각하는 것은 무생물인 돌에서 형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갇혀 있는 가고일의 영혼을 깨어나게 하고, 그 가고일을 속박하던 돌을 깨뜨림으로써 가고일이 스스로 세상 속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고일 조각 방식이 바로 마리안네가 화상으로 세 겹 막장에 둘러싸인 그를 위한 사랑의 방법, 에로스였다.
그는 육체의 즐거움, 마약과 술의 탐닉에 빠져 그것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속박하고 있는 돌덩어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에게 돌을 던졌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그러한 그의 특성을 이용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안네는 마치 나체로 돌 위에 엎드려 있듯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은 순수함으로 그의 영혼을 덮은 어두움을 깨뜨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도구로 사용한 것이 전생에서 겪은 자신과 그의 사랑이야기, 4명의 사랑이야기(프란체스코, 비키, 세이, 시귀르드르),
즉,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찾고 갈망하며,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는 불멸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마리안네의 사랑과 헌신으로 화상을 입어 죽음만 기다리던 그는 살아난다.
육체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도움을 얻어 지옥과 연옥, 천국을 다녀온 것과 같이 환상 중에 지옥을 체험하게 되고,
이제 완전히 ‘육체’라는 것을 벗어나 ‘정신’의 사랑이 가지는 의미를 깨우쳐 간다.

저자인 앤드루 데이비드슨은 환상처럼 보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 곳곳에 삽화처럼 배치된 4편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이야기했던 ‘에로스’를 보여주었다.
서로의 반쪽을 찾아 헤매고 갈망하며, 그 반쪽을 찾아내었을 때 가지는 근원적인 힘으로의 회복과 치유인 에로스.
그리고 그 에로스를 통하여 한 영혼이 구원에 이르렀음을 알려주었다.
700년, 아니 이제 영원히 지속될 불멸의 사랑을 통해서 말이다.

책에 대한 또다른 간단한 소감

1. 무척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러면서도 저자가 창작하여 배치한 4편의 사랑이야기는 무척 감동적이면서도 뭉클하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주인공 남녀가 용병대의 추격을 받아 쫓기는 부분에서는 안타까우면서도 고통스럽기도 했다. 추워지는 날씨에 가슴아프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를 원하는 친구가 있다면 좋은 선물이 될 책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 전에 [제물의 야회]라는 책을 선물로 받아서 읽었는데... 글쎄 이젠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좀 질렸다. 오랜만에 따뜻한 이야기를 읽어본 것 같아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2. 저자가 사진빨을 잘 받는지... ㅎㅎㅎ 무척 잘 생긴 사람이었다. 냐하하.. 못 믿으실 분들을 위한 사진 뽀나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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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의 야회 미스터리 박스 3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여름 휴가지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 책을 읽었다는 회사 동료가 선물해 주어 읽은 책입니다.

간단하게 책 뒷표지에 있는 글로 줄거리 소개는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범죄 피해자 가족모임'에 참가했던 두 여성이 살해되었다.

하프 연주자는 양 손목이 잘려나가고, 다른 한 명은 뒤통수가 돌계단에 내리쳐진 채로.
오코우치 형사는 피해자 남펴의 행방에 의문을 품지만 공안부에서 이유없이 수사를 중지시킨다.
또한 모임에 패널로 참석했던 변호사가 19년 전 일어났던
소년 엽기범죄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엽기적인 살인마와 프로 킬러가 맞붙은 순간,
경찰조직의 부패에 직면한 형사도 고독한 한 마리 늑대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뭐랄까요... 먼저 '머리'라는 그릇 속에 많은 물이 여러 곳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만 골라 내어도 여러 권의 책이 나올 수 있는 주제들.... 그 주제들이 정신없이 머리속으로 몰아쳐 들어왔습니다.
 
미성년 범죄자의 갱생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범죄피해자의 사적인 복수는 허용이 되는가?
정치와 경찰이라는 국가기관간의 유착과 검은 거래는 사라지지 않는가?
그리고 그 검은 거래를 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던져 책임지고 입을 막아야 하는가?

이런 사회성 짙고 논쟁이 여지가 아주 많은 주제들부터 시작해서...
가족이란? 사랑이란? 친구란? .... 그리고 개인의 경험과 트라우마라는 상대적으로 미시적이고 심리적인 분야까지
모두 건드리고 나가는 작가의 좌충우돌식 글쓰기는 일면 위태위태하면서도
상대진영을 헤집고 다니는 축구선수(!!)를 보는 것처럼 즐거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나오는 하드보일드한 장면들은 섬뜩섬뜩함을 느끼게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 이런 책을 보면 무척 서글퍼지기까지 합니다.
이토록 잔인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이제 현실이 되었고,
그 가슴 아픈 개인사의 뒷면에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들을 더이상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하드보일드'라고 하는 것...
인간적인 상식 수준에서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양상들이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엽기적인' 사건이 주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받는 충격과 그에 따르는 '반성'이 점점 사그러들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하드보일드한 내용을 '책'이란 매체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어느 정도로 그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야회(夜會).... 밤에 여는 사교적인 모임이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동기이든 사회적인 동기이든 밤과 같은 어두움 속에서 은밀히 벌여지는 희생제물들의 잔치(!!!!!).
그렇게까지 우리 사회가 어두움에 가득차 있는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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