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다음 해에 읽을 책에 대해 계획을 세우곤 했다. 물론 그 계획대로 실천하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원래 실제 여행보다 더 재미있는 때는 여행계획을 세울 때가 아닌가.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 해에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은 정말 행복한 고민이었다.

 

<나는 가수다>의 첫 번째 방송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 취지를 이야기하던 자문위원 중에 한 분이 ‘노래를 들으며 예전의 행복했던 때를 다시 느끼고 싶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셨다. 이 말이 내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2012년 책읽기 계획은 <나는 가수다>의 이 말에서 따오기로 했다. 이제까지 내게 행복감을 주었던, 내게 새로 깨어나는 아픔과 기쁨과 충격을 주었던, 내게 살아있는 것의 가치를 보여주었던 책을 다시 한 번 잡아 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어쩌면 2011년 하반기에 바쁘게 살아오면서 지쳤던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읽지 않았던 새로운 책들도 읽을 것이지만 그래도 틈 날 때마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느꼈던 행복감을 다시 한 번 되살리는 2012년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2012년 첫 번째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은 헤르만 헤세는 독일보다 동양권,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있는 작가로 격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데미안]의 내용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교훈적이어 교조적이기까지 하고 시대착오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데미안]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고, 지금도 읽을 때마다 그 어떤 책에서 받을 수 없었던 감동과 힘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데미안]과의 인연은 중학교 2학년 때로 올라간다. 한참 사춘기를 겪으면서 적지 않게 힘들었던 시기. [데미안]은 정말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을 들게 한 책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첫 번째 章인 <두 세계>부터 그동안 당연한 듯 소속되어 왔던 가정과 학교, 교회의 규범을 무자비할 정도로 해체해 버렸다. 저녁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다 읽기 전까지는 도저히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결국 수면부족 상태에서 등교한 나는 마치 싱클레어라도 된 양, 교과서 한 귀퉁이에 땅에 절반쯤 박힌 알 속에서 날개짓하며 깨어 나오려고 하는 새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유치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푹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데미안]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데미안]이 그동안 우리가 피해야 한다고 배워왔던 곳, 어둡다고 느껴왔던 곳, 죄악의 세계라고 알아왔던 곳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충격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선(善)과 악(惡), 신(神)과 악마(惡魔)의 세계를 이분하여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보고 들어온 교육체계는 대부분 ‘권선징악’을 가르쳤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서양식 교육이 뿌리내리면서, 또한 기독교라는 종교가 유래없이 폭발적으로 부흥하면서 이런 관점은 더더욱 익숙해졌다.

그런데 새가 껍질을 깨고 날아간 곳이 양면성을 가진 ‘아브락사스’라는 신이라는 점은 이런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아벨이 아니라 카인을,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간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편 강도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으로 죽은 왼편의 강도를, 아담이 아니라 이브(에바 부인)에게 관심을 돌리고 그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은 이제껏 부정해 왔던 다른 세계가 있음을, 그리고 그 ‘두 세계’가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춘에게, 세계와 사회에 반항의 기세를 떨치는 사춘기 청년에게 [데미안]이 주는 충격파는 이만저만 커다란 것이 아니다.

 

또 한가지 [데미안]이 주는 충격파는 구원을 전지전능한 신에게서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미안]은 신에 의한 분별이 아니라 자신에게 침잠함으로써 얻는 지혜를 말해준다. 하늘을 우러러 신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바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함을 말한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비롯되고, 또 모든 것이 ‘나’에게서 종결된다. 이제 ‘나’는 (물론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지만) 신의 위치로 격상되며, 신의 선(善)이 아니라 ‘나’의 선(善)이 삶의 잣대가 된다. 사실 구약성경도 슬쩍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어딘가 하면 인류의 기원을 말하고 있는 '창세기'다. 인류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해 주는’ 나무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선과 악을 나누는 잣대를 알게 된 셈이 아닌가? 그러니 [데미안]에 나오는 이 표현은 놀라울 정도로 함축적이면서도 의미가 깊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p.172)

 

쓰고 보니 [데미안]을 무슨 지독한 무신론적, 인본주의적, 상대주의적 책으로 적어버린 감이 있는데, 물론 꼭 그렇게 읽을 필요는 없다. 나만 하더라도 중학교 때 [데미안]을 처음 읽은 후 20대, 30대.. 나이를 먹으면서 몇 번을 읽더라도 변하지 않는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나 자신의 길을 확고하게 걸으라는 것, 내가 가져야 할 진실한 직분은 자신을 찾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라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내 운명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나이 마흔을 앞두고 어쩌면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2012년, 새로운 해를 시작하면서 읽은 [데미안]은 변함없이 내게 중요한 것은 ‘좋은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하고 굴절 없이 살아내라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중략)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無)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 것만이! (p.172)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세상 어디에서건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지금 이 순간을 보내는 ‘나’ 역시 과거나 미래 어느 순간에도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데미안]은 명쾌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다소 고루해 보이긴 하지만..) 2012년의 첫 번째 책 [데미안]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언제나 변하지 않고 바로 그렇게 한 해를 살아갈 자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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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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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는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이 발현되는 현상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에 대하여 분명한 근거없이, 그리고 그 행동이 이루어진 전후사정에 대한 이해없이, 때로는 루머에 근거해서, 때로는 질투심이나 이기심으로 인해서 비난을 퍼붓는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Human Stain)]에서 이런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은근한 칼날을 들이댄다. 그가 비판적으로 보는 인간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오점(stain)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감추고, 속이며 부정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둘째, 다른 사람의 밝혀진 오점에 대해서 (자신도 오점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때 ‘자신만이 성자인 척 하는’ 태도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위선이다.

아테나 대학의 전(前)학장인 콜먼 실크는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불명예스럽게 사직한다. 그는 철밥통들이 가득하던 아테나 대학을 학문 탐구로 활기가 넘치는 학교로 변모시켰고, 최초로 흑인 교수를 임용하는 등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수업에 장기간 결석한 학생을 유령에 비유한 스푸크(spook)라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한 순간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spook는 속어로 흑인을 비하하여 ‘검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필 또 그 학생이 진짜 흑인이었다.)
콜먼 실크의 억울함과 분노는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아내마저 사망하면서 극에 달한다. 그런데 이 극심한 분노가 사그러드는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일어난다. 딸보다 나이 어린, 그래서 40년 가까이 나이차이가 나는 30대의 여성, 자신이 재직하던 학교의 청소부로 일하던 여성인 포니아 팔리와 사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콜먼 실크의 자식들조차 각종 억측과 루머를 담아서 그들을 비난하였지만, 서로 가슴아픈 오점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이 진정한 것임을 깨닫는다. 포니아 팔리의 전남편인 레스터 팔리에 의해 현세에서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채로 말이다.

[휴먼 스테인]의 등장인물들은 제목처럼 모두 얼룩덜룩한 오점(stain)을 가진 인간들이다. 필립 로스는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들의 삶이 ‘숨기고자 하는 오점과 비밀’들로 얼마나 가득차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폭로해 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불충분한 것인지, 나아가 오점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이야기해준다.

탄탄대로의 콜먼 실크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파멸의 원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평생동안 부정하면서 감추어 왔던 그의 위선적 태도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콜먼 실크는 ‘당연히’ 백인인 것이라고, 그리고 ‘당연히’ 유태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가던 어느 순간 그의 부모님이 흑인이었음을, 그래서 콜먼 역시 ‘당연히’ 흑인이란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이 아이러니의 절정은 백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의 인연을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콜먼의 행동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건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spook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콜먼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님을, 따라서 그는 누명을 쓴 결백한 사람임을 확신하던 독자들도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청년 콜먼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의 불명예스러운 노년이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출산의 시기, 자녀들이 태어날 때 콜먼 실크는 얼마나 불안에 떨어야 했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백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인종차별을 받지 않고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자신이 가진 흑인으로서의 유전적 형질이 자녀에게서 나타난다면 그의 오점은 백일하게 드러나 버리고 말 것이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갓 낳은 아기를 보러가는 그의 마음은 시한폭탄을 열러 가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책을 보니 그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백인과 흑인의 피를 반씩 섞어 물려받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콜먼 뿐만 아니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의 위선도 그에 못지않다. 다만 그들의 저열함이 콜먼처럼 파급력을 가지고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자기 자녀를 수석 졸업시키기 위하여 콜먼의 가족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는 대신에 콜먼에게 성적 조작을 부탁하는 이웃, 콜먼이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처음 임용한 흑인 교수였지만 그를 배신해 버리는 교수. (이 사람은 콜먼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배신을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하기 위한 미사여구를 일삼는다.) 콜먼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리고 포니아 팔리와의 소문이 돌았을 때, 아버지를 믿기 보다는 세상의 소문에 동조하여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아버지에 대해서 경멸과 비난으로 대우했던 그의 자녀들이 콜먼의 장례식장에서는 울며불며 ‘훌륭했던’ 아버지를 추모하고, 아테나 대학의 건물 중 하나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 다른 교수들과 흥정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위선의 절정은 콜먼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껴왔던 델핀 루 교수에게서 나타난다. 그녀는 콜먼에게 익명의 협박편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적 취향을 담은 이메일을 동료 교수들에게 보낸 실수를 무마하기 위하여 절도 사건을 날조한 후, 자신의 실수와 절도혐의를 모두 죽은 콜먼 실크에게 뒤집어 씌운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 곳곳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을 집어넣었다. 미국과 세계를 흔들었던, 미국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오점을 남긴 클린턴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던 시기를 왜 배경으로 삼았을까. 글쎄. 어쩌면 필립 로스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모두가 클린턴을 비난하는데, 그는 성욕이라는 욕망의 실천자이면서 그것이 외부에 노출된 처지의 사람일 뿐이다. 들키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도 모두 오점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대통령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혹시 이런 태도는 나만 깨끗한 성자인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휴먼 스테인]에서 저자의 주제 의식을 잘 나타내 주는 인물은 오히려 포니아 팔리일 것이다. 자신의 오점을 숨기기에 급급한 콜먼 실크를 비롯한 상류층의 위선과 비교해 볼 때, 포니아 팔리의 삶의 방식은 솔직한 ‘오점 드러내기’로 동정과 이해, 호응을 불러 일으킨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추행과 강간, 남편의 폭력이라는 가부장 사회의 폭력과 자녀의 죽음이라는 상처로부터 생존해 왔다. 누군가를 비난해도 정당성을 얻을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실제로는 읽고 쓸 줄 알았지만) 죽을 때까지도 문맹인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자신의 오점을 세상에 드러내어 비난을 이겨낼 수 있는 ‘당당함’을 획득한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이 언제 들통날까봐 노심초사했을 콜먼 실크, 자신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근거없는 비난을 들어야 했던 콜먼 실크에게 그녀의 이런 솔직한 ‘오점 드러내기’는 일종의 구원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는 콜먼의 오점, 즉, 그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진짜로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포니아에게 사랑할 사람이란 인종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현재 이 순간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각자의 삶에 대해 과도하게 간섭하지만 않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것을 콜먼 실크가 인정하는 순간 콜먼은 팔리아를 향하여 ‘나는 사실 흑인이요’라는 필생의 고백이 나온다.

필립 로스는 책의 앞 부분부터 ‘자기만이 성자인 척하는’ 이라는 어구를 반복하여 사용한다. 물론 이런 태도는 잘못이다. 당연히 우리는 상대방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그가 인생에 대해 가지는 자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니 말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윤리적으로만 생각해 본다면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 말은 과연 올바르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런데 이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우리는 일종의 양비론자 또는 불가지론자가 되어 버린다. 그럼 누가 누구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을까.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내 옆의 가족들과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에 이르기까지 다들 불완전한 존재인데 누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이해와 포용에는 뭐랄까... 일종의 전제조건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와 포용이 의미를 가지려면 오점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진정성 있는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복수심에 불타던 콜먼이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회복해 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포니아의 삶을 보고 평생을 감추어 왔던 비밀(자신은 흑인이다!)을 고백하면서 그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란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한 것에는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후회와 뉘우침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의 오점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여 알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그 오점을 감추기 위하여 얽매여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필립 로스는 이런 사실을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라는 거울로 삼아 우리 앞에 놓아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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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2012-08-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2권이 1권의 반복 설명같다는 말을 듣고 우연히 얻은 1권 밖에 안 읽었는데, 이 글을 보고나니 2권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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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인지라 책을 읽고 난 후의 경험과 평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듯 눈앞을 확트이게 해주었던 책이 [데미안]이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영원히 싫어할 수 없는 작가가 되어 버렸고, 누가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책이 뭐냐?’라고 물어보면 [데미안]이라고 말해주곤 하였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골드문트였다. 아마 지금까지 읽은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가운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데미안은 어쩐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과 같고, 싱클레어 역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나 자신과 오버랩되기도 하였지만 데미안(또는 에바 부인)의 말에 껌뻑 죽어버리는 지극히 모범적인 마무리(?)가 딴 세상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골드문트는 얼마나 멋진가!!! 또한 얼마나 반항적인가!!! 세상 속에 뛰어들어 자신이 바라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두려움없는 용기, 혈혈단신으로 독일 전역을 종횡무진 헤매는 그 자유로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변덕은 있으되 결코 변하지 않는 우정, 뭇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황금입술 골드문트,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였을 때 느끼는 생명의 에너지 등등. 남자가 보기에도 멋져 보이지 않는가? (아닌가?)

내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작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읽느냐에 따라서 느끼는 바가 달라진다는 점 때문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이번에 새롭게 읽으면서 10대나 20대에 읽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받았다. 치기에 가까운 자신감이 넘치면서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 내가 골드문트에게서 본 것은 ‘니가 나를 밟고 지나갈 테냐? 깔려 죽을지언정 길을 비킬 수 없다’라고 선언하듯 수레바퀴 앞에 앞발을 쳐든 사마귀의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좁은 수도원 골방에 쳐박혀서 세상과 담을 쌓은 삶을 사는 나르치스의 인생은 얼마나 쫌스러워 보였는지 모른다. 뭐하러 그렇게 산담.... 나는 자연히 골드문트의 삶에 이끌렸고, 이에 비교하여 나르치스의 삶에는 거북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보니 골드문트는 그렇게 화염과 같은 격렬함과 화려함으로 뭉친 사람만은 아니었고 나르치스 역시 골드문트를 빛나게 하는 조역으로서만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흔히 이 책을 [지(知)와 사랑]으로 번역하면서 골드문트에 감성, 사랑, 예술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나르치스에 지성, 학문, 종교 등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지만 둘 사이는 엄밀하게 나누어 보기 어렵다. 그들은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서로 다른 등산로를 택한 사람들과 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본질적으로 하나인 존재가 서로 다른 표출방식을 가지고 있는 느낌 말이다.

골드문트는 기본적으로 ‘구원’을 갈망하던 사람이었고 구원에의 여정의 출발은 본능적 부름에서 비롯하였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와의 이별과 아버지의 욕망대로 자라야 했던 어린시절부터 그의 앞에 주어진 인생의 선택지는 마리아 브론 수도원에서 평생을 수도사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르치스의 도움(?)을 얻어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고, 아마도 집시로 생각되는 리자라는 여인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사랑을 발견하면서 세상으로 나온다. 그리고 어떤 경우 사랑이 이끄는대로, 어떤 경우 예술혼이 이끄는대로, 어떤 경우 본능과 욕망이 이끄는대로 세계를 주유한다.
나르치스 역시 ‘구원’을 갈망한다. 그의 삶은 마치 그레고리안 찬트처럼 정형화되어 있고,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 그 자체이다. 명예, 금전, 권력은 물론이고 남녀간의 애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 같은 본능도 그의 인생에서의 신념을 흔들 수 없다. 헤르만 헤세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르치스라는 이름이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결국에는 한송이 수선화가 되어 버린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과 동일하다는 것은 보통 상징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눈을 내면으로 돌리고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하여 자신과의 투쟁을 통해 구원을 추구한 셈이다.

구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나르치스와 같이 속세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수양하고 치열한 내면의 투쟁을 통해 삶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것도 궁극의 구원에 이르는 한 방법이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란 영혼과 양심을 가진 존재라고 믿고 있는데, 영혼 깊숙한 곳에 갈무리되어 있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나르치스의 구원 추구 방식이 얼마나 고독하면서도 힘든 일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새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과 대학생 시절에 읽을 때에는 도저히 생각도 못한 감정이었다.
골드문트의 방식은 어떨까? 골드문트가 경험하는 치열한 내적 갈등은 스스로를 세상의 밑바닥에 던져넣는 행동을 통해 구원을 찾고자 한데서 비롯한다. 화려한 여성편력과 두 사람을 죽인 살인행각에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골드문트는 가장 비천한 밑바닥까지 뒹굴었고, 거기서 묻힐 수 있는 온갖 더러움과 흙먼지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용은 약간 다르지만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를 통해 탐구한 석가모니의 삶, 그리고 가장 낮은 곳부터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은 채로 결국 궁극의 구원을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골드문트의 인생역정 가운데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스도가 왕자의 삶으로, 또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으로 일관했다면 아마도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 평범한 인물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그네스와의 마지막 사랑을 꿈꾸던 골드문트는 사형수의 신분이 되었다가 나르치스를 극적으로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오랜 세월만에 조우한다. 그런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이 후반 부분은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떠올리게 한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마리아 브론 수도원에서의 우정의 시기를 지나면서 나르치스는 ‘깊이’로, 골드문트는 ‘넓이’로 각자의 방식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 나르치스는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궁극의 정화된 영혼을 얻고자 수양하였고, 골드문트는 가능한 넓게 퍼져 나감으로써 세상의 모든 삶의 모습을 체험하여 사랑의 기쁨은 물론이고 이별의 아픔과 절망을 경험하였다. 언뜻 상반된 것과 같은 인생을 걸어간 두 사람은 어느 순간 각자가 추구한 구원이, 그리고 상대방이 추구한 구원이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둘은 마주앉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였으며, 언제부터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순결한 영혼을 위한 내면의 투쟁과 발딛고 선 현실에서의 더나은 삶을 위한 투쟁,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대표하는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 이성과 사랑, 학문과 열정은 둘이 아니라 결국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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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경옥 옮김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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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산책]은 기본적으로 미국 문화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문화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하여 선택한 도구가 언어, 그러니까 ‘영어’다. 빌 브라이슨은 1620년 소위 Pilgrim Fathers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시기를 전후로 하여 최근까지 약 300여년 동안의 미국 정치, 산업, 문화, 일상생활 등을 씨줄로 하고, 영어를 날줄로 하여 한 편의 미국 문화사를 써낸 것이다.
따라서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물론 ‘Bill Being Bill'이긴 하다. 그의 ’글빨‘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독서의 어려움을 상당 부분 완화해 준다.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뽑아내는 능력이나, 독설로까지 보일 정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는 태연함, 그러면서 독자를 킥킥거리게 만들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마법같은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고(영어권 국가에 가 본 적조차 없다),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도 얕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이 따발총처럼 내뱉는 영어에는 생경함이 먼저 든다. 책의 원제인 [Made in America]가 왜 [발칙한 영어산책]이 되었는지도 이해가 잘 안 가며(아마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과 제목을 통일시키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영어를 어떻게 써야 발칙한 것인지 잘 모르겠고(우리말에서 ’에잇! 발칙한 것‘이라고 하면 변사또가 춘향이에게 쓰는 말 아닌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영어 단어와 문장이 가지는 미묘한 뉘앙스 및 그 어원의 차이도 제대로 포착해 내지 못하겠다.
영어에 대한 내 실력을 처음부터 ‘뽀록내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영어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쓰여질 글은 빌 브라이슨이 펼쳐 놓은 미국 역사의 이야기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을 정리하고, 가끔 영어를 양념처럼 뿌리는 정도의 수준이 될 것이라는 변명을 미리 늘어놓은 것이다.
 

2.
개인적으로 미국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melting pot이 아닌가 한다. 원래 다인종사회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여러 인종이 모였다는 것은 단순히 피부색깔 다르고 생김새가 각각인 사람들이 한 장소에 섞여 살게 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처한 환경조건에 적응하여 생존을 위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관계망이 성립되는 것은 진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아닌가. 인간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 다종다기한 문화적 특색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다른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필연의 과정이다. 하위 문화로 분열하기도 하고 때때로 문화 간의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미국이 그랬다. 인디언과 버팔로만이 초원을 누비던 시절에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을 찾은 유럽 ‘변두리’ 지역의 사람들,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 들어온 아프리카의 사람들, 유대인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늦게 미국을 찾은 아시아 지역의 사람들, 원래 미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 미국의 역사는 이들이 300년의 역사를 가진 용광로 안에서 뒤섞이는 과정이었고, 이들의 문화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이었다. 미국문화가 가지는 독특함은 역설적이게도 ‘미국만의’ 문화가 없다는 점에 있다. [모비딕]의 저자인 허먼 멜빌은 이런 미국의 특징을 “미국은 국가라기보다는 세계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내렸다. 용광로로서 미국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미국인들의 언어, 영어다(어쩌면 그래서 빌 브라이슨은 미국 문화사의 ‘도구’를 영어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작은 섬나라 영국의 언어에 불과했던 영어는 미국에서 인디언들의 언어, 프랑스, 독일,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언어, 유대인들의 언어, 아프리카 계열의 언어, 아시아 국가들의 언어가 혼합되면서 비로소 더욱 풍성해지고 ‘세계언어’로 발전해 가기 시작한다.
미국이 지금처럼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아마도 American Dream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고, melting pot의 불꽃은 꺼지지 않으리라.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변화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지 않은가.
 

3.
예전에 세계사를 공부할 때 세계 3대 혁명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대혁명,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왕권신수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에 공화정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의미와 <독립선언문>을 통해 만방에 표출한 천부인권 및 자유/평등의 가치는 결코 낮지 않지만, 미국의 역사가 과연 이런 자랑거리에 명실상부한 것이었나라는 의문 또한 어쩔 수 없다.
빌 브라이슨은 식민지 아메리카 거주민들이 독립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선 파고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표없이 과세없다’라는 논리. 그러나 빌 브라이슨에 따르면 독립선언 당시 미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목숨걸고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킬만한 건덕지가 없었던 셈이다.

1776년 미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경제적인 유동성, 지역 대표를 뽑을 권리, 언론의 자유, 한때 어느 영국인이 열을 올리며 말한 “가장 역겨운 평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더 좋은 음식을 먹었고, 더 안락한 집에서 살았고, 짐작컨대 전반적으로 영국의 사촌들보다 훨씬 더 높은 교육을 받았다. 요컨대 미국의 혁명은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p.64)

미국혁명이란 당시 식민지 미국인들의 기득권 수호 움직임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한 혁명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혁명은 그 과정과 결과에서 차이점을 보일 수밖에 없을텐데, 이런 모습이 미국 역사가 보여준 ‘배반의 역사’에 원초적인 출발점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부인권과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그토록 숭배하는 미국 사회는 어째서 같은 인간을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차별했는가? (그리고 지금도 차별하고 있는가?) 새뮤얼 존슨이 지적한 바대로 “흑인을 부리는 사람들이 꽥꽥거리며 자유를 부르짖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노예제도 뿐만 아니라 마치 지금의 미국이 있게 만든 시대정신인 것처럼 찬양되는 서부개척과 프론티어 정신이란 것도 입장을 돌려놓고 보면 동부 백인들의 거주지역을 확장하고 풍요로움을 얻는 도상에서 인디언들을 비롯한 기존 거주민들을 쫓아내는 행위이지 않았던가? 인디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미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정든 고향을 떠나 보호지역(reservation)에서 살다가 쫓겨나거나 비참한 일생을 마쳐야 했는지는 여기서 재삼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독립전쟁은 <독립선언문>에 명시한 고상한 겉모습과 달리 차별받으면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던 또다른 미국인들을 향한 양날의 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인디언과 400가지의 조약을 맺고는 그 모두를 어겼다. 인디언은 1924년까지도 미국 시민이 되지 못했다. (p.230)
 

4.
미국은 현재 세계 최강대국이며, 번영과 광명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발칙한 영어산책]의 원제가 [Made in America]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은 유형의 도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의 판단기준으로서 ‘로마’가 가지는 세계제국의 입지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요즘은? 막말로 세계정치와 경제의 판단기준에서 ‘모든 길은 USA로 통한다’. Made in America는 막강한 힘의 상징이면서 문질문명의 중심이자 자부심과 자긍심의 상징이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은근히 이 ‘Made in America’에는 그다지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역사가 숨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 빌 브라이슨이 미국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세계 다른 국가들에게 선망이 되면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었던 시기는 melting pot이 제대로 작동하던 시기, 그러니까 다인종들이 역동적으로 미국사회에 정착하던 시기였다. 반대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인디언들을 속이며,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나치 뺨치는 편협함을 드러낸 시기는 미국이 주장하는 고상한 가치들의 실상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음을 지적해 낸다.
현실 정치는 Pax Romana는 Pax Britanica를 거쳐 Pax America로 넘어왔다. 남들 다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미국의 ‘혈맹’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나라도 조금은 미국의 본질과 앞으로 나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상대에 대한 배려, 합리성, 정당성에 대한 감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언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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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사 -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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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티조선운동’과 그 취지에 동감했던 사람들의 온라인 모임인 ‘우리모두’는 내게도 최소한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가입 이후 뚜렷한 활동이 없는 눈팅족에 불과했지만 나름 안티조선운동의 목표에 공감했고, 그렇게 공감대를 이룬 사람들이 모여서 펼치는 백가쟁명이 스스로의 생각 정리에 좋은 기회도 되었다. 지금은 유명해진,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던 진중권, 홍세화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진보정당 지지자에게 보여준 민주당 지지자들의 배타적 태도에 혼자 분개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환호했다.

안티조선운동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어떤 활동가들은 그 출발점을 1970년대의 언론운동에서 찾는다. 반드시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본격적인 의미의 안티조선운동은 1998년 조선일보가 시도한 소위 ‘최장집 교수 사상검증기사’에서 촉발되어 1999년 ‘우리모두’ 사이트가 개설된 시기부터 2007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기까지의 기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문좌파의 촉망받는(?) 재원이면서 ‘아흐리만’이라는 닉네임으로 안티조선운동에서 활동했던 한윤형은 이 10여년 동안 펼쳐졌던 역사를 꼼꼼하게 되살려낸다.

여기서 잠깐! 나는 바로 앞 문장에서 저자인 한윤형을 ‘인문좌파’라고 지칭했다. 사실 이건 이택광 교수의 표현을 빌려온 것인데, 그가 정의내린 바, 인문좌파의 특징은 정치지형도 상에서 왼쪽에 속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이념을 모두 회의하고 냉정히 평가하는 사유를 보여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윤형 본인은 ‘인문좌파’라는 나의 멋대로 평가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안티조선운동사]를 읽으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저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이런 명칭을 붙여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인문좌파라느니, 치우치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을 꺼낸 것은 그게 바로 이 책, [안티조선운동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나만 해도 조선일보, 월간조선 등등 ‘조선’ 형제들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지향점이 나와 다른 위치라는 점도 그렇지만,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에 서슴없이 사상의 굴레를 씌우고, 기사나 인터뷰를 정치적으로 ‘마사지’하여 교묘하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윤색해 내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일보가 사용하는 ‘좌파’라는 용어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붙이는 ‘좌파’라는 용어의 이면에는 <좌파=빨갱이>라는 이미지를 부지불식중에 각인시킴으로써 좌파라는 딱지가 붙여진 정치적 입장을 우리 사회에서 매도시키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숨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내 성질을 버려놓는다는 거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침마다 ‘만나’가 내려왔듯이 아침마다 우리 집 현관문 밖에 곱게 접은 조선일보를 놔 둔다. 출근하려고 문을 나서면서 그 제호를 보는 순간 짜증이 확 몰려온다. 말을 섞기도 싫고 배달하는 양반들이 뭔 죄가 있으랴 싶어서 “조선일보 사절”을 붙여 놓아도 별반 소용이 없다. 결국에는 보급소에 전화하여 소리를 빽빽 질러 기분을 상하게 한 후에야 겨우 그만 둔다. 그리고 한 1-2년 지나면 또 슬며시 ‘만나’를 내려주신다.

2.
개인적 글이 좀 길어졌지만 결론은 하여튼 ‘나는 조선일보가 싫어요!’ 이거다. 이런 내가 한윤형만한 필력과 기억력을 가지고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글을 쓴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제1장에서는 친일행각, 냉전적 사고방식 등 ‘조선일보의 죄악상(!)’을 들이대어 조선일보가 ‘악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을 것이고, 제2장에서는 안티조선운동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영웅적으로 활동해 왔는가를 찬양할 것이다. 그런데 한윤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방적이거나 근거없이 조선일보를 비판하거나 안티조선운동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안티조선운동을 평가한다. 그가 책 말미에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안티조선 운동의 공과를 판단해 볼 때, 나는 이 운동이 한국 사회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안티조선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다. (중략) 그러나 본질적으로 볼 때,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로 대표되는 기존 매체의 저급한 편향성을 극복해야 했다. 그 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p.464)

저자의 결론을 내 마음대로 정리하면 이거다. ‘좋다. 조선일보는 언론이 가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불편부당함을 가진 매체가 아니라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온 매체였다. 저급한 보도행태이고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조선일보의 행태에 대한 잣대는 반대편의 소위 ’진보지‘라고 하는 언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안티조선운동은 단순한 일개 신문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성공적인 운동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언론 전체에 편향성 극복이라는 메스를 들이대고, ’공론‘이란 것을 형성하기 위한 그릇으로 기능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

일면 양비론으로 들릴 수도 있는 주장이지만 자신이 몸담고 참여했던 사회운동에 대한 냉정한 자기 성찰과 새로운 언론운동의 방향성 제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지점 중 하나는 자신들의 입장에 유/불리한 주장을 구분한 후, 유리한 주장들로 일종의 ‘세력’을 이루고, 그 세력을 통해 불리한 주장들을 배타적으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 아프게도 이런 모습은 안티조선운동 내부에서도 있었다. 오히려 좀 더 유치한 방법으로 말이다. 우리모두 사이트가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겪은 심각한 내홍은 ‘민노당이건 다른 진보정당이건 민주당 후보(노무현)를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진보정당의 희생을 강요하였던 측면이 있었고,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진중권씨가 이 시기 민주당 지지자들을 ‘김대중 광신도’로 거칠게 비판(비난?)하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물론 이런 갈등은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진보진영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해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때문에 안티조선운동이 ‘선명성’을 획득했다는 자화자찬에 있지 않았을까. 선명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안티조선운동은 그 폭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에 제 몫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가능한 장이었고, 또 계속하여 그런 원칙 하에서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우리나라 전체 언론, 나아가 정치행태에 대한 문제게기가 가능했던 운동이었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간다’라고 했던가. 안티조선운동에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은 또다른 분열이었고, 또다른 무리짓기였으며,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날선 대립각만을 세운 모습이었다.

3.
저자의 성찰을 바탕삼아 본다면,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의 편향성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대중의 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과가 없지 않으나, 편향성의 문제를 조선일보의 문제로 축소시킴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역할과 바람직한 보도행태라는 좀 더 큰 담론으로까지 끌고 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남겼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안티조선운동 내부에서 나타난 ‘조선일보스러운’ 모습은 상당히 뼈아프다고 할 것이다.

전술하였듯이 안티조선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은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의 논문 중 일부를 발췌, 짜깁기 하여 <최장집 교수=국가관에 의심이 가는 좌파>라는 꼬리표를 달아 당시 김대중 정부에 대한 생채기를 내고자 하였던 의도적인 보도행태에서 비롯하였다. 이것은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정확한 사실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지고 목적에 따라 기사를 재구성하는 전형적인 ‘세력화’ 행태였다. 따라서 안티조선운동은 일차적으로 특정 정치사상의 시녀로 전락하여 기사를 윤색함으로써 상대방을 견딜 수 없도록 몰아붙이는 보도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어야 했다. 이 점에서 안티조선운동의 성과는 작지 않다. 어쩌면 이후 모든 진보진영의 운동에서 ‘조중동’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아이템이 되었으니 말이다.

안티조선운동이 제기한 문제의 출발점은 옳았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쨌거나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 조선일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를 본격화시키기에 좋았고 대중화시키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운동 과정에서 안티조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하고 새로운 언론의 상을 창조해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소설가 이문열이 제기한 소위 ‘홍위병’으로 대표하는 보수 진영의 공세 속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운신폭을 좁혀 버린 배타성 속에서 안티조선운동이 원래 가지고 있던 건강한 비판이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그런 점에서 저자인 한윤형이 인용하여 지적한 다음 내용은 매우 가슴 아프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한국 언론의 심각한 문제는 이른바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다. 이를테면 언론이 자기주장에 동조하는 지지자에게 아첨하거나 그런 지지자를 규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양적 분석을 통해 볼 때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사설이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를 가장 많이 추구한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지적했다. (p.467)

4.
매우 딱딱할 것 같은 책이지만 [안티조선운동사]는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어떤 대목은 마치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힐 정도이고, 만약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면 더더욱 실감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참여정부에 대한 적극적 지지층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안티조선운동에 대한 저자의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나는 그래도 안티조선운동은 성과가 많았던 운동이라는 평가 쪽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언론은 불가피하게 현실 정치와 이런저런 관련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을 인정한다면, 사실 다종다양한 이해관계와 성격을 가진 집단의 목소리를 객관적인 틀로 받아 안는 ‘공론화’ 또는 ‘공론장’으로서의 언론은 매우 이상적인 상이다. 그리고 이상적이라는 것은 다분히 실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도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의 사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금은 정부 권력과 불화하는 매체가 겪는 어려움보다 자본 권력과 불화하는 매체가 겪는 어려움이 훨씬 크다.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위한 물적 조건이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과연 고상한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시기는 언제쯤이 될 것인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언론운동은 싫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지저분하면서, 그래서 흙탕물에 뒹굴거려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런 각오를 하고 뛰어들었을 때에만 언론 민주주의에 한발자국 더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시 총선과 대선이 펼쳐질 2012년을 앞두고 있다. ‘보수라는 이름의 야만’, ‘자본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에 안티조선운동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안티조선운동사]가 과거 참된 언론의 모습을 고민하며 들었던 깃발을 다시 한 번 세우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안티조선운동의 과정은 세련되지 못하였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한계, 상처를 거쳐 ‘일단은’ 실패한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그 경험이 결코 ‘파산’이 아닌 승리의 자양분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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