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다음 해에 읽을 책에 대해 계획을 세우곤 했다. 물론 그 계획대로 실천하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원래 실제 여행보다 더 재미있는 때는 여행계획을 세울 때가 아닌가.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 해에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은 정말 행복한 고민이었다.

 

<나는 가수다>의 첫 번째 방송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 취지를 이야기하던 자문위원 중에 한 분이 ‘노래를 들으며 예전의 행복했던 때를 다시 느끼고 싶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셨다. 이 말이 내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2012년 책읽기 계획은 <나는 가수다>의 이 말에서 따오기로 했다. 이제까지 내게 행복감을 주었던, 내게 새로 깨어나는 아픔과 기쁨과 충격을 주었던, 내게 살아있는 것의 가치를 보여주었던 책을 다시 한 번 잡아 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어쩌면 2011년 하반기에 바쁘게 살아오면서 지쳤던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읽지 않았던 새로운 책들도 읽을 것이지만 그래도 틈 날 때마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느꼈던 행복감을 다시 한 번 되살리는 2012년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2012년 첫 번째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은 헤르만 헤세는 독일보다 동양권,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있는 작가로 격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데미안]의 내용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교훈적이어 교조적이기까지 하고 시대착오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데미안]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고, 지금도 읽을 때마다 그 어떤 책에서 받을 수 없었던 감동과 힘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데미안]과의 인연은 중학교 2학년 때로 올라간다. 한참 사춘기를 겪으면서 적지 않게 힘들었던 시기. [데미안]은 정말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을 들게 한 책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첫 번째 章인 <두 세계>부터 그동안 당연한 듯 소속되어 왔던 가정과 학교, 교회의 규범을 무자비할 정도로 해체해 버렸다. 저녁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다 읽기 전까지는 도저히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결국 수면부족 상태에서 등교한 나는 마치 싱클레어라도 된 양, 교과서 한 귀퉁이에 땅에 절반쯤 박힌 알 속에서 날개짓하며 깨어 나오려고 하는 새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유치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푹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데미안]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데미안]이 그동안 우리가 피해야 한다고 배워왔던 곳, 어둡다고 느껴왔던 곳, 죄악의 세계라고 알아왔던 곳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충격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선(善)과 악(惡), 신(神)과 악마(惡魔)의 세계를 이분하여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보고 들어온 교육체계는 대부분 ‘권선징악’을 가르쳤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서양식 교육이 뿌리내리면서, 또한 기독교라는 종교가 유래없이 폭발적으로 부흥하면서 이런 관점은 더더욱 익숙해졌다.

그런데 새가 껍질을 깨고 날아간 곳이 양면성을 가진 ‘아브락사스’라는 신이라는 점은 이런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아벨이 아니라 카인을,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간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편 강도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으로 죽은 왼편의 강도를, 아담이 아니라 이브(에바 부인)에게 관심을 돌리고 그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은 이제껏 부정해 왔던 다른 세계가 있음을, 그리고 그 ‘두 세계’가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춘에게, 세계와 사회에 반항의 기세를 떨치는 사춘기 청년에게 [데미안]이 주는 충격파는 이만저만 커다란 것이 아니다.

 

또 한가지 [데미안]이 주는 충격파는 구원을 전지전능한 신에게서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미안]은 신에 의한 분별이 아니라 자신에게 침잠함으로써 얻는 지혜를 말해준다. 하늘을 우러러 신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바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함을 말한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비롯되고, 또 모든 것이 ‘나’에게서 종결된다. 이제 ‘나’는 (물론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지만) 신의 위치로 격상되며, 신의 선(善)이 아니라 ‘나’의 선(善)이 삶의 잣대가 된다. 사실 구약성경도 슬쩍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어딘가 하면 인류의 기원을 말하고 있는 '창세기'다. 인류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해 주는’ 나무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선과 악을 나누는 잣대를 알게 된 셈이 아닌가? 그러니 [데미안]에 나오는 이 표현은 놀라울 정도로 함축적이면서도 의미가 깊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p.172)

 

쓰고 보니 [데미안]을 무슨 지독한 무신론적, 인본주의적, 상대주의적 책으로 적어버린 감이 있는데, 물론 꼭 그렇게 읽을 필요는 없다. 나만 하더라도 중학교 때 [데미안]을 처음 읽은 후 20대, 30대.. 나이를 먹으면서 몇 번을 읽더라도 변하지 않는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나 자신의 길을 확고하게 걸으라는 것, 내가 가져야 할 진실한 직분은 자신을 찾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라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내 운명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나이 마흔을 앞두고 어쩌면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2012년, 새로운 해를 시작하면서 읽은 [데미안]은 변함없이 내게 중요한 것은 ‘좋은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하고 굴절 없이 살아내라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중략)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無)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 것만이! (p.172)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세상 어디에서건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지금 이 순간을 보내는 ‘나’ 역시 과거나 미래 어느 순간에도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데미안]은 명쾌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다소 고루해 보이긴 하지만..) 2012년의 첫 번째 책 [데미안]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언제나 변하지 않고 바로 그렇게 한 해를 살아갈 자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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